가장 먼저 해 뜨는 나라, 가장 먼저 가라앉는 나라 [세상에이런여행] 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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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아니아의 섬 ⑥ 키리바시·끝>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에 악영향
바닷물이 섬 집어삼켜 다리 만들어 통행
맹그로브 심어 토사 유실 방지에 안간힘

어려운 상황이어도 이방인엔 누구나 친절
나그네 꺼리지 않고 기꺼이 차량 태워 줘
내릴 때는 불편 걱정하며 버스비까지 지원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나라는 어딜까?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가장 먼저 없어지는 나라는? 극지방의 빙하가 모두 녹으면 해수면은 무려 60m나 높아진다고 하니 영향을 받는 나라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세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영광스러운 표현보다 가장 먼저 물에 잠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는 나라, 키리바시다.

키리바시 곳곳에 토사 유실을 막으려고 심은 맹그로브가 자라고 있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키리바시 곳곳에 토사 유실을 막으려고 심은 맹그로브가 자라고 있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키리바시에 도착하니 공항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뉴질랜드, 피지 등지에서 일하기 위해 떠난 가장들이 연말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오는 날이기에 마중 나온 가족들로 붐비는 것이었다. 환전소는 공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공항이 외딴 섬에 있어 도심까지 약 3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이곳의 길은 하나뿐이었다. 화산섬처럼 둥글지도 않고 긴 지렁이처럼 생긴 섬의 덩치가 점점 작아지는 모양새였다. 토사가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섬과 섬 사이는 가교로 이었다. 옛날에는 이 가교 없이도 섬끼리 통행할 수 있었는데 바닷물이 점점 섬을 집어삼키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뉴질랜드 달러를 사용한다.

키리바시 공항에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키리바시 공항에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키리바시에서는 잔잔한 파도에 토사가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맹그로브를 기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섬의 테두리는 맹그로브로 둘러싸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물속 토양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물 밖으로 자라는 맹그로브는 생명의 보고다. 물고기들이 알을 낳는 산란의 장소이며 뿌리가 서로 뒤엉켜 들어온 토사를 나가지 못하게 잡아주는 역할도 하므로 섬나라에서는 필수다. 맹그로브 나무의 뿌리는 물밑으로 10m까지 내려갈 수 있기 때문에 급작스럽게 토사가 유실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 태풍에는 방풍림 역할까지 할 수 있어 정말 유용하다.

문제는 환전소에 가려면 도심으로 가야하는데 거기까지 갈 돈이 없다는 점이었다. 거리에 따라 버스비에 차등을 두고 한 방향으로만 순환하기 때문에 지나가는 아무 버스나 타면 되고 요금도 비싸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물가가 높다는 사실이었다. 대부분의 생활필수품과 공산품을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이었다.

키리바시 공항에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키리바시 공항에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도심지까지 갈 방법이 막막했지만 더 어두워지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그때 사람 좋아 보이는 운전자가 앉은 승용차가 주차장에 섰다. 나는 자연스럽게 운전자에게 다가갔다. 도시로 가야하는데 돈이 하나도 없다고 하자, 조금만 기다리라더니 태워주겠다고 한다. 큰 칼 하나가 운전석 옆에 떡하니 실려 있는 걸 보고 살짝 긴장됐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빼앗길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잠시 뒤 그가 공항에서 나왔다.

“차에 타세요.”

“오, 정말 감사합니다.”

조수석에 큰 칼이 버티고 있어 칼을 치우고 앉기는 껄끄러웠기에 뒷자리에 탔다. 공항을 벗어난 지 2분 정도 되었을까? 그가 말했다

“제 아들이 곧 공항에 도착하는데 도시까지 갔다 올 시간이 안 될 것 같아요. 여기서 버스를 타세요.”

“저는 지금 돈이 없는데요?”

“버스비는 호주달러로 2달러 아니면 2달러 50센트일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2달러짜리와 1달러짜리 호주 동전을 손에 쥐어 주었다. 모두 8달러나 됐다. 한 차례 버스 값이면 충분하기에 3달러만 남기고 돌려주자 도로 쥐어주면서 지폐까지 한 장 더 꺼내줬다. 무려 10달러짜리다.

“아니 왜 이러세요? 이거면 됩니다. 정말 고마워요.”

공짜로 주면서도 더 못 줘서 미안해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

“명함 있으면 주세요. 한국에 돌아가서 여행기를 쓸 때 당신처럼 아름다운 분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래요.”

“여기서는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면 누구라도 저와 같은 행동을 할 겁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친 그는 명함 한 장을 건넨 후 차를 타고 공항으로 돌아갔다. 조수석에 있는 칼만 보고 사람을 섣불리 판단한 것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고, 이렇게 소중한 인연이 맺어진 것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다.

그런데 명함이 조금 이상했다. 직책이 장관이었다. 피닉스제도와 라인제도 개발을 맡은 그는 키리바시의 생명 연장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키리바시는 크게 3곳의 섬으로 구분된다. 길버트제도, 피닉스제도, 라인제도다. 길버트제도는 수도인 타라와가 포함된 16개의 섬, 피닉스제도는 8개의 섬, 라인제도는 8개의 섬으로 이뤄졌다. 차를 태워준 장관은 길버트제도를 제외하고 피닉스제도와 라인제도의 개발을 맡았다는 것이었다. 이런 호의를 그렇게 높은 사람이 주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권위의식도 없고 여행자에게 친절한 모습이 정말 인상 깊었다.

트럭을 태워준 키리바시 현지인들. ⓒ도용복 오지여행가 트럭을 태워준 키리바시 현지인들. ⓒ도용복 오지여행가

이번에는 버스정류장을 묻기 위해 그가 내려준 곳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데 10명쯤 탄 흰색 트럭이 내 앞에 멈추었다. 대개 이야기할 수 있게 조수석 옆에 세우지만, 이 트럭은 신기하게 트럭 뒷부분의 사람들과 인사할 수 있도록 조금 더 지나서 세웠다. 바로 나를 소개하고 길을 물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레미라고 해요. 한국에서 왔어요. 도심으로 가는 버스는 어디서 탈 수 있나요?”

트럭에 탄 사람 중 하나가 물었다.

“어, 당신은? 아까 비행기 타고 오신 분 맞죠?”

“네, 맞아요. 반갑습니다.”

비행기가 크지 않았고 승객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서로 기억할 수 있었다. 그도 나도 서로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반가워요. 저도 비행기에서 오랜만에 아시아 사람을 만나서 뭐하는 분일까 궁금했는데 이렇게 인연이 닿네요. 어디 가신다고 하셨죠? 저는 도심까지 가지는 않는데 괜찮으시면 제가 가는 곳까지 태워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서 다시 낯선 사람들과 동행하게 됐다. 그의 가족이 이런저런 질문을 했지만 또박또박 천천히 말하는 영어도 알아듣기 힘든데, 특유의 억양이 섞인 영어가 엔진소리로 시끄럽고 흔들리는 트럭에서 제대로 들릴 리 없었다. 애석하게도 깊은 대화보다 친밀감을 쌓겠다는 생각에 다짜고짜 물었다.

“한국 노래 아세요?”

“당연히 알아요! BTS! 사랑해요.”

공통관심사를 만들기 위해 노래 이야기를 꺼냈는데 요즘 세계를 울리는 한국가수들의 이름이 술술 나온다. 이들은 단순한 연예인이 아니라 민간외교와 국익 증진에 톡톡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여행을 통해 더욱 피부로 느낀다. 아쉽게도 그들의 노래를 흥얼거리기에는 나이가 적지 않다.

키리바시 현지인의 집 내부 전경. ⓒ도용복 오지여행가 키리바시 현지인의 집 내부 전경. ⓒ도용복 오지여행가

“오, 자랑스러운 우리 BTS! 한국을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그렇다면 이 노래도 알아요?”

그렇게 말하며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를 살짝 불렀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

“잘 모르지만 노래는 좋네요!”

휴대폰으로 니우에에서 나를 재워주었던 왓데와 제이니 부부 중 제이니와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던 영상을 보여주며 말을 이어갔다.

“제가 이 노래를 니우에에서 가르쳤습니다. 거기서 저를 10일 동안이나 재워주었던 은인이었어요. 저는 여행할 때 가능하면 현지인들 집에서 머물거든요.”

“통안(통가 사람)이군요.”

“어떻게 그렇게 바로 알아요?”

“그냥 알아요. 하하.”

왓데와 제이니는 니우에 사람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들은 니우에에 자리를 잡았지만, 원래는 통가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걸 바로 알아본 그들이 신기했다. 나를 재워줬다는 것을 은근히 설명하며 그런 기회를 여기서도 잡아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드러냈지만 눈치를 못 챈 건지, 말을 돌리는 건지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언어가 잘됐으면 조금 더 다가갈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호의를 베풀어주는 사람에게 너무 과한 기대를 하는 것도 실례가 될 수 있고 아직 만남의 기회는 많았기 때문에 가는 곳까지만 같이 가기로 했다.

그들 집 앞에서 내렸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집에 들어갔다.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기다리자 돈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가 건네준 돈은 10호주달러. 왜 돈을 주느냐고 묻자 마을에 도착하면 은행 문이 이미 닫혔을 수도 있다면서 이 돈으로 차비를 내고 남으면 식사하라고 했다.

처음 보는 이방인에게 왜 이렇게 호의를 베풀까? 아까 그 장관과는 다르게 가족 수에 비해 작은 집, 형편이 좋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런 도움을 주는 게 너무 감사했다. 그가 보여준 호의에 감사하며 돌아섰다. 그리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는데 가족들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레미 잘 가요! 좋은 여행이 되길 바라요.”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버스정류장은 따로 정해진 게 아니었다. 그냥 길가에 나무둥치가 놓여 앉을 수 있게 되어 있으면 그게 버스정류장이었다. 나무둥치에 앉아 기다리는데 내 앞에 회색 밴이 멈췄다. 2.3달러 버스비를 지불하고 탔다. 2.5달러인 줄 알았는데, 2.3달러만 받는 게 의아했다. 그 눈치를 읽었는지 뒤에서 돈을 받는 친구가 말했다.

“여기서 목적지까지 거리를 생각해서 돈을 덜 받은 거예요.”

정이 있는 나라, 버스비도 거리에 따라 차등해서 받는다는 게 재미있다. 우리도 버스 안내양이 있었을 때가 있었다. 그 시절이 생각나서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수년 안에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자연 경치도 그 어디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하고 아름답지만, 사람이 아름다운 나라다. 자신보다 남을 보듬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나라, 키리바시가 가라앉고 있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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