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점수 인플레이션 ‘역설’… 돈 빌리기 더 어려워졌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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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점 넘는 사람 2150만 명 달해
앱 설문 참여·공과금 내역 등 도움
점수 올리기 일상화 평가 부정적
800점 대 중·저 신용자 대출 막아
높은 이자 2금융권 신청 불이익도
무용론 제기… 공평 기준 도입 여론

신용점수 인플레이션이 생기면서 중·저신용자들이 ‘상대적 저신용자’가 돼 제2금융권 등으로 내몰리고 있다. 한 은행 대출 창구 모습. 연합뉴스 신용점수 인플레이션이 생기면서 중·저신용자들이 ‘상대적 저신용자’가 돼 제2금융권 등으로 내몰리고 있다. 한 은행 대출 창구 모습. 연합뉴스

이달 초 대출 상품 비교 앱을 통해 7000만 원 한도의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하려던 직장인 윤 모(39·부산 수영구) 씨는 통장 개통에 실패했다. 윤 씨는 2년 전 집을 장만하면서 받은 3억 원의 주택담보대출이 전부였다. 이자 연체도 없었고 평소 신용점수도 915점(KCB 기준)으로 모바일 앱 등을 통해 틈틈이 관리했다. 하지만 대출의 벽은 높았다. 고금리를 감수하더라도 마땅한 마이너스 통장 상품은 없었다. 마이너스 통장 대신 일반 신용 대출도 알아봤지만 대출 한도도 적고 금리도 높아 이내 포기했다.

윤 씨는 “직장인이 마이너스 통장을 갖는 게 쉬운 일처럼 이야기가 되지만 현실적으로 신용점수가 900점을 넘어도 쉽지 않았다”며 “주변에도 마이너스 통장을 최근에 개설한 사람을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신용점수 900점이 넘는 고신용자도 대출이 어려워지고 있다. 신용점수를 모바일로 누구나 손쉽게 올릴 수 있게 되면서 ‘신용점수 인플레이션’이 빚어낸 역설이라는 분석이다. 800점 대의 중·저신용자들은 ‘상대적 저신용자’가 돼 제2금융권이나 사채, 불법 사금융으로 내몰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13일 은행연합회 공시에 따르면 개인 신용 대출(일반 신용 대출)을 받은 이들의 평균 신용점수는 926.2점(KCB 기준)이다. 1년 전(917.6점)보다 9점 가까이 상승했다. 5대 은행 신용 대출자의 평균 신용점수는 2022년 12월만 해도 903.8점이었는데 1년 4개월 만에 23점가량이 올랐다.

은행별로는 NH농협은행 신용 대출자의 평균 신용점수가 940점으로 가장 높았다. 이어 하나은행(933점), 우리은행(929점), KB국민은행(915점), 신한은행(914점) 순이었다. 중·저 신용자에 대출 공급이 설립 목적 중 하나인 인터넷은행 토스뱅크도 928점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지역은행인 BNK부산은행은 881점으로 가장 낮았다.

마이너스 통장의 벽은 더 높았다. 지난 4월 5대 시중은행의 마이너스 통장(신용 한도 대출) 개통 평균 신용점수는 956.6점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945.8점에서 1년 사이 8점가량이 올랐다.


대출 기준 상승 원인으로는 신용점수 올리기의 일상화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과거에는 자신의 신용점수를 파악하고 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모바일 은행 앱 등을 통해 신용점수가 일상에 들어왔다. 은행 앱에서 신용 성향 설문 조사에 참여하거나 국민연금·통신비·공과금 등의 납부 내역을 신용 평가사에 제출하는 등의 방법으로 점수를 올릴 수 있다.

실제로 KCB에 따르면 신용점수 950점 이상 초고신용자는 2022년 말 1167만 5675명에서 지난해 말 1314만 6532명으로 147만 명 이상 늘어났다. 신용점수 900점을 넘은 비중은 43.4%(2149만 3046명)에 달했다.

신용점수 인플레이션은 중·저 신용자들의 대출도 가로막고 있다. 신용점수 800점 후반~900점 초반은 금융 생활을 할 때 신용도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신용점수 상승으로 ‘상대적 저신용자’ 대우를 받으며 높은 이자를 부담해야 하는 2금융권을 찾아야한다. 850점 이하 저신용 취약계층은 사실상 대출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한 이들의 ‘급전 창구’로 불리는 카드론 잔액(9개 카드사 합산)은 지난 3월 말 기준 39조 4821억 원으로 역대 최대 수준으로 올라섰다. 지난해 말에 견줘 3개월 만에 7208억 원 증가했다.

은행권에서는 신용점수 ‘무용론’도 제기된다. 신용점수가 개인의 신용도를 평가하는 제대로 된 지표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역의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고객은 신용점수를 기준으로 대출 가능 여부를 생각하지만, 실제 은행에서는 신용점수는 참고 사항 정도로 소득 기준, 직업, 거래 이력 등 자체 기준으로 대출이 이뤄진다”고 말했다.

부경대 홍재범 경영학과 교수는 “신용점수가 제대로 기능을 하려면 신용점수가 지금처럼 이벤트성의 특정 서류 제출 유무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며 “국민 누구나 해당하는 기준으로 산출돼야 금융 생활에서 실제 유효한 지표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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