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준 상처로 죽음까지 쓸쓸하다면 억울하잖아요" [연결: 다시 쓰는 무연고자의 결말]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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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유언으로 이어진 끈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이하 협의회) 손석주 대표가 회원의 연락처가 적힌 공책을 보고 있다. 손 대표는 이들 중 홀로 지내면서 건강이 좋지 않아 무연고 사망 등이 우려되는 30여 명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 생사 확인을 한다. 손혜림 기자 hyerimsn@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이하 협의회) 손석주 대표가 회원의 연락처가 적힌 공책을 보고 있다. 손 대표는 이들 중 홀로 지내면서 건강이 좋지 않아 무연고 사망 등이 우려되는 30여 명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 생사 확인을 한다. 손혜림 기자 hyerimsn@

박 모(가명) 씨가 연락이 두절된 건 지난해 한 주말 오후였다. 영화숙·재생원 피해자 중 한 사람인 박 씨는 홀로 살면서 평소 정신질환 약을 복용한다. 피해생존자협의회 손석주 대표는 박 씨에게 종종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곤 했다.

평소라면 귀찮은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을 그가, 20통 가까이 전화를 걸어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집 주소라도 알면 찾아갈텐데 전화번호와 동 이름만 알고 있는 탓에 손 대표는 무작정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박○○이고, △△동에 사는 사람 때문에 연락합니다. 지인인데요, 전화를 안 받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어 전화했습니다."

기억을 되짚어 대략적으로 그가 사는 동네를 설명했다. 경찰은 경찰대로 혹시나 사건이 있는지 확인했다.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박 씨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미칠 노릇이었다. 혹시 무언가 잘못됐을까, 혹시 어딘가에서 홀로 외롭게 남아있는 건 아닐까. 나쁜 상상이 손 대표의 머릿속을 휩쓸고 지나갔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는 채 발만 동동 구르다 3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중 수면제를 먹고 깊게 잠들었다는 박 씨의 연락을 받고서야 상황이 종료됐다.

아찔했던 해프닝 이후, 손 대표는 생사 확인이라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피해자들이 모두 사회에 나와 오롯한 가정을 꾸렸거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삶의 파도는 유독 피해생존자들에게 높게 굽이친 듯했다. 어릴 적 겪은 충격적인 인권침해로 신체적, 정신적 상처가 깊게 팬 탓인지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어려운 이들도 있다. 어렵게 가정을 꾸려도 오래가지 못해 다시 혼자가 되기도 한다.

만약 고독하게 마지막을 맞고도 늦게 발견된다면, 아무도 장례를 치르겠다고 나타나지 않아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면….

어릴 적 영문도 모르고 억울하게 집단 수용소로 잡혀가 온갖 인권침해를 받고도 겨우 각자의 인생을 살아냈다. 사회의 일원이 되고 나서도 남들과 같은 대접을 받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지인의 배웅도 없이 떠나가야 하는가. 울화가 치밀었다. 열악하게 살아왔다 한들, 마지막까지 그래선 안됐다.

“만약 또 누가 연락이 안 닿으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번 관공서에 수소문을 할 수밖에 없는지 막막한 걱정이 앞섭니다."


#유언으로 엮은 마지막 끈


협의회가 희망자에 한해 작성하는 공영장례 위임장 양식. 장사법에서는 망자가 사망하기 전 본인이 서명한 문서나, 민법상 유언에 따른 방식으로 지정한 사람이 희망하면 장례를 주관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위임장은 유언과 함께 작성하는 일종의 이중장치로, '본인이 서명한 문서'의 명확한 행정서식이 없어 임의로 제작한 양식이다. 손혜림 기자 hyerimsn@ 협의회가 희망자에 한해 작성하는 공영장례 위임장 양식. 장사법에서는 망자가 사망하기 전 본인이 서명한 문서나, 민법상 유언에 따른 방식으로 지정한 사람이 희망하면 장례를 주관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위임장은 유언과 함께 작성하는 일종의 이중장치로, '본인이 서명한 문서'의 명확한 행정서식이 없어 임의로 제작한 양식이다. 손혜림 기자 hyerimsn@

협의회는 지난해부터 무연고 피해자의 장례와 재산 처리에 관한 생전 의사를 보장하기 위해 유언과 공영장례 위임장 작성을 돕고 있다. 손 대표를 포함해 현재까지 6명이 유언장을, 8명이 공영장례 위임장을 썼다.

유언집행자로 협의회로 지정한 유언에는 자신들의 재산을 활용해 공영장례를 치르고, 사망 후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또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을 진행해 배상금을 받게 되었을 때, 무연고자라는 이유로 배상금마저 국가에 귀속시키지 않았으면 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유언에 대한 검인은 공익사건을 전담하는 이주언 변호사가 맡았다.

이렇게 죽기 전 미리 유언이나 계약 형태로 서류를 마련해 사후를 약속할 수 있는 건, 지난해 개정된 장사법 덕분이다. 망자가 사망하기 전 본인이 서명한 문서나, 민법이 정하는 규정에 맞춘 유언으로 지정한 사람이 희망한다면 무연고 사망자라고 하더라도 장례의식 주관자를 지정할 수 있게 됐다. 유언과 함께 작성하는 공영장례 위임장은 장사법에서 제시한 '본인이 서명한 문서'의 명확한 서식이 없어, 임의로라도 만들어 작성하는 서류다. 일종의 이중 장치인 것이다.

손 대표는 홀로 지내는 것으로 보이는 피해자가 있으면, 먼저 넌지시 의사를 물어본다. “‘형님 돌아가시고 나면 장례 치러줄 사람 있습니까'하면 없다고 해요. 그럼 ‘쓸쓸하게 가실 순 없지 않습니까. 전 형님 그렇게 보내기 싫습니다’고 이야기합니다. 배상금 등에 대해서도 국고로 환수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알려드리면 대부분 흔쾌히 자신도 쓰겠다고 하세요.”

부산 지역에서만 확인된 영화숙·재생원 피해자는 140여 명. 최근 이 사건을 직권조사하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가 확보한 소년의집 명부엔 영화숙에서 옮겨졌다는 600여 명의 기록이 확인됐다. 손 대표는 현재 피해생존자 중 최소 30명은 사망 후 무연고자로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앞으로도 유언장과 위임장 작성을 위한 설득을 이어갈 계획이다.


# 매일 안부 확인하는 이유

유언까지 쓰며 사후를 약속하는 가느다란 끈을 엮었지만 진짜 난관은 서로의 생사 확인이다. 유언에 남긴 대로 사후를 챙기려면, 무연고사망자 시신 처리 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구청에 가 시신에 대한 권한이나, 장례주관 의사를 주장해야 한다. 유언대로 이행하는 건 그 다음의 문제다.

이 지난한 과정을 시작이라도 하려면 사망소식을 최대한 빨리 알아채는 게 관건이다. 손 대표는 “사망 후 최소 24시간 안에 사망 사실을 알고, 유언장과 위임장을 챙겨 구청에 가야 어느 정도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 대표가 건넨 공책에는 피해자들의 이름과 사는 지역, 전화번호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피해자 중에서도 건강이 좋지 않거나, 홀로 사는 이들 30여 명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안부 전화를 건다. 혹시 생애 마지막 순간을 놓쳐 생전 의사대로 사후 정리를 못 할까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손 대표는 “점점 나이가 들며 몸이 아픈 사람들이 늘면 모닝콜 담당자를 채용해 안부를 물어야 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사후정리를 약속했지만, 법적으로 증명되는 관계로 묶여있지 않은 상황에선 연락을 자주 하는 것 말곤 방법이 없다. 사후 자기결정권 보장과 사회적 가족의 개입이 원활하게 작동하려면 행정의 역할이 필수라는 게 손 대표의 주장이다.

그는 “지금 행정은 ‘장례주관자 제도를 만들어놨으니 알아서 활용하시오’ 정도인데, 정말 사각지대를 해소할 의지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며 “무연고자와 이어진 현장 단체와 연계하면서, 개인정보에 접근이 수월한 행정기관이 통·반장 등 지역 자원을 활용하면 더 간단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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