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매혹한 6세 꼬마의 연주 “내가 바로 모차르트” [세상에이런여행] ㉓
<모차르트in오스트리아 ⑤ 빈 정착>
오스트리아 수도 역사 시작 암호프광장
콜랄토궁전에서 모차르트 데뷔 연주회
‘실력 대단’ 소문 퍼져 귀족 초청 이어져
1781년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갈등하다
독일기사단궁전에서 말다툼 끝 쫓겨나
아버지 반대 무릅쓰고 빈에서 독립 결심
체칠리아 부인 밀히가세 집에서 첫 하숙
잘츠부르크에서 출발한 기차는 채 3시간도 안 걸려 빈에 도착한다. 숙소에 짐을 푼 다음 곧바로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나가 빈대학교 앞의 쇼텐토르역에 내린다. 이 역은 빈 구시가지를 원형으로 둘러싼 도로 ‘링슈트라세’의 일부분인 쇼텐링과 유니버시타츠링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다. 링슈트라세 자리에는 원래 빈을 보호하던 성벽이 있었지만, 19세기 말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도시 발전을 앞당긴다며 허물어 빈을 에워싸는 도로를 건설했다.
빈에 와서 이곳을 가장 먼저 들른 것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빈의 인연이 시작된 곳에 가기 위해서다. 그가 여섯 살 때 빈을 처음 방문해 첫 연주회를 가진 곳과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에 정착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곳이다. 그의 이름이 잘츠부르크를 넘어 전 유럽에 퍼지는 계기가 된 두 곳인 만큼 가장 먼저 들르지 않을 수 없다.
■암호프광장 콜랄토궁전
쇼텐토르역에서 나와 남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쇼텐가세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베토벤이 1804~1815년에 살았으며, 지금은 ‘베토벤 기념의 방’이 운영되는 묄커바스타이 8번지 저택이 나온다.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어서 사진만 찍고 그냥 지나친다. 길을 따라 5~6분 더 내려가면 암호프광장이 나온다.
암호프광장은 관광객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다. 이곳에 모차르트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광장에 어떤 역사가 숨어 있는지 아는 사람도 드물다.
암호프광장은 ‘궁정에서’라는 뜻이다. 빈이 오스트리아의 수도가 되는 역사를 연 바벤베르크 가문이 12세기 빈에 정착한 뒤 최초로 궁전을 건설한 곳은 바로 여기였다. 그래서 이름이 암호프가 된 것이다.
모차르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이곳에 가장 먼저 간 이유는 광장에 있는 ‘암호프교회’ 왼쪽에 붙은 저택을 보기 위해서다. 저택의 이름은 ‘콜랄토궁전’이다.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모차르트가 여섯 살 때인 1762년 빈을 처음 방문해 첫 연주회를 가진 곳이 바로 여기였다. 모차르트가 빈에서 데뷔한 장소였고, 그가 유럽 최고의 음악가가 될 것이라는 걸 예고한 장소였다.
콜랄토궁전의 주인은 이탈리아계 귀족인 콜랄토 가문의 토마스 빈치게라 콜랄토 백작이었다. 그는 90년 전에 지어 낡은 저택 개축 공사를 마무리한 상태였다. 지인을 초청해 집들이 행사를 어떻게 진행할지 고민하다 마침 빈을 방문한 모차르트를 초대한 것이었다.
콜랄토궁전은 아쉽게도 관광객에게 개방되지는 않는다. 다만 문이 닫혀 있지는 않으므로 살짝 들어가 볼 수는 있다. 여기가 모차르트의 흔적이 남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모차르트기념협회가 1956년 6월에 설치한 동판을 1층에서 볼 수 있다. 동판 내용은 이러하다.
‘1762년 10월 둘째 주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빈에서 최초의 연주회를 개최한 곳은 바로 이 궁전이다.’
먼 훗날의 일이지만 암호프교회도 모차르트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21년 뒤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한 모차르트는 첫 아기인 라이문트 레오폴트 모차르트를 낳았다. 아기가 다음 날 유아 세례를 받은 곳은 암호프교회였다. 다섯째 딸 안나 마리아도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두 아기는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다.
모차르트 가족의 콜랄토궁전 연주회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던지 다음 날부터 빈의 여러 귀족이 이들을 먼저 초청하려고 난리를 피웠다. 이들은 빈에서 1년여 동안 머물며 여러 귀족 저택을 찾아다니면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아우어스페르크슈트라세 1번지인 아우어스페르크궁전에서는 군 최고사령관인 히트부르크하우젠 공작을 위해 연주했다. 마우니츠 백작의 저택인 발하우스광장 2번지와 방크가세 2번지인 쇤보른바티아니궁전 그리고 왕립도서관 앞의 요제프광장 6번지 팔피궁전에서도 연주했다. 각 궁전 안팎에는 ‘모차르트가 연주한 장소’라는 명패가 붙어 있다.
실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황실에까지 퍼진 덕에 나중에는 모차르트는 물론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 누나 난네를까지 쇤브룬궁전에 들어가 황실 가족 앞에서 음악을 연주했다.
■독일기사단궁전
암호프광장 한가운데 벤치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즐기며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21번’ 2악장 ‘엘비라 마디간’에 빠져든다. 광장의 분위기와 1967년 스웨덴의 영화 ‘엘비라 마디간’의 주제곡이었던 음악의 낭만적인 음률이 정말 조화롭다는 생각에 저절로 미소가 감돈다.
암호프광장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빈의 중심지인 그라벤거리와 콜마르크트거리가 나타난다. 이 중 그라벤거리를 따라 걸어 성슈테판대성당 쪽으로 향한다. 대성당에서 맞은편 골목, 즉 싱거슈트라세로 들어간다. 목표는 싱거슈트라세 7번지 건물이다. 건물의 이름은 도이치오던하우스, 즉 독일기사단궁전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독일기사단 단장이 관할하는 독일수도원교회와 독일기사단 보물관이 있다.
모차르트는 스물다섯 살인 1781년 뮌헨에서 오페라를 공연한 뒤 잘츠부르크의 1인자인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대공‧대주교에게서 빈으로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가 달려간 곳은 대주교가 빈에 갈 때마다 숙소로 삼던 싱거슈트라세 7번지였다.
성인이 된 모차르트는 재정적, 정치적 위기에 빠진 잘츠부르크의 개혁을 추진하던 콜로레도와 사이가 나빠졌다. 그는 궁정악단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었지만 콜로레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독일기사단궁전에서 콜로레도와 설전을 벌이다 잘츠부르크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화가 난 콜로레도는 마음대로 하라며 그를 내쫓고 말았다.
자료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엉덩이를 걷어차여’ 쫓겨났다고 한다. 그것이 ‘쫓겨났다’는 말의 상징적 표현인지, 정말 ‘엉덩이를 걷어차여’ 쫓겨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아들에게 ‘대주교에게 용서를 구하고 고향에 돌아오라’고 간청했지만 모차르트는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길을 걷기로 했다. 그는 속박에서 풀려나 원하던 ‘자유’를 얻게 됐다. 이 장면에서 가장 어울리는 음악은 모차르트가 18세 때 잘츠부르크에서 작곡했으며 영화 ‘아마데우스’에 등장하는 ‘교향곡 25번’ 1악장이다. 이 곡을 들으며 독일기사단궁전을 보노라면 의기양양한 모차르트가 콧노래에 발장단을 맞춰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오늘날 독일수도원교회인 독일기사단궁전에서는 모차르트 연주회가 정기적으로 열린다. 문이 늘 열려 있어 누구나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교회도 개방되기 때문에 둘러볼 수 있다. 궁전 입구 쪽 벽에는 ‘모차르트가 1781년 3월 18일부터 5월 2일까지 이곳에 살았다’는 명패가 붙어 있다.
■빈의 첫 하숙집
독일기사단궁전에서 나와 다시 그라벤거리로 돌아간다. 17세기 빈을 강타했던 역병이 사라진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성모 마리아에게 바친 기둥인 페스트조일레가 나타나고, 기둥 왼쪽으로 난 짧은 골목길 끝에는 작은 교회가 하나 보인다. 빈에서 가장 오래된 성소 중 하나인 장크트페터교회다.
교회 뒤쪽은 ‘우유 거리’라는 뜻인 밀히가세인데, 독일기사단궁전에서 쫓겨난 모차르트가 곧바로 찾아간 곳은 밀히가세 1번지 저택이었다. 그가 이곳으로 간 것은 집주인이 잘 알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집주인은 남편을 잃고 만하임에서 빈으로 이사를 가 혼자 네 딸을 키우던 체칠리아 베버였다. 모차르트는 여러 해 전 만하임에 연주여행을 갔을 때 베버 가족을 만나 이미 알던 사이였다.
모차르트는 이 집에서 1781년 5~9월 다섯 달 동안 머물렀다. 저택 벽에는 ‘모차르트가 1781년 이 집에 살면서 오페라 ‘후궁 탈출’을 작곡했다’는 내용을 새긴 명판이 붙어 있다. 모차르트에 대해 잘 알거나 관심이 많은 외국인 관광객은 일부러 이곳을 찾아가 기념사진을 찍는다.
스물다섯 살이었던 모차르트는 그 짧은 기간에 당시 열아홉 살이던 체칠리아 부인의 둘째딸 콘스탄체와 사랑에 빠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체칠리아 부인은 모차르트를 집에서 쫓아냈다. 모차르트가 과거 만하임에서 큰딸과 결혼하겠다고 난리를 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아직 제대로 돈을 못 버는 처지여서 딸을 먹여 살릴 수 있을지 걱정이 됐고, 염문이 퍼지면 딸이 혼처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체칠리아 부인의 등쌀에 못 이긴 모차르트는 그라벤거리 17번지 집의 3층으로 이사를 갔다. 새로 옮긴 하숙집은 그라벤거리에 있는 분수 요제프브루넨 맞은편이었는데, 밀히가세 1번지에서 걸어서 1~2분 거리였다. 지금 이집은 상점으로 변했다.
모차르트는 그라벤거리 17번지 집에서 살면서 첫 오페라 ‘후궁 탈출’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1782년 7월 16일 부르크극장에서 초연돼 대성공을 거뒀고, 모차르트는 단번에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 체칠리아 부인의 반응이 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남태우 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