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음악적 전성기 경제적 황금기…빈 최고소득자 대열 합류 [세상에이런여행] ㉔
<모차르트in오스트리아 ⑥ 날개를 달다>
‘후궁탈출’ 성공 성슈테판대성당서 결혼
암호프 인근 비플링거슈트라세에 신혼집
첫 아들 낳았지만 두 달 만에 세상 떠나
1784~87년 해마다 큰돈 벌며 인기몰이
돔가세 고급주택으로 이사 황금기 만끽
2006년 재단장 모차르트하우스로 개관
빈 첫 방문 때 쇤브룬궁전에서도 연주회
황실 가족 모두 참석해 멋진 연주에 매혹
오랑제리에서는 살리에리와 맞대결 열려
빈에 정착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자신감에 넘쳤다. 음악을 사랑한 도시였던 빈은 그에게 음악적으로 경제적으로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매일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바쁘게 살았다. 그래도 힘들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게 즐겁고 행복했다. 작곡해서 연주하는 작품마다 대성공을 거둬 명성을 얻었고, 적지 않은 돈을 벌었고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낳았다.
성슈테판대성당에서 결혼해 조촐한 셋집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지만 성공을 거둬 큰돈을 번 뒤에는 화려한 저택으로 이사를 갔다. 빈 곳곳을 돌아다니며 각종 공연장에서 많은 작품을 연주했던 무대도 돌아본다. 모차르트의 전성기를 돌아보는 코스의 시작은 그가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했던 성슈테판대성당이다. 다행히 첫 하숙집 바로 인근이어서 멀지는 않다.
■성슈테판대성당
오페라 ‘후궁탈출’의 성공으로 적지 않은 돈을 벌어 자신감을 얻은 모차르트는 체칠리아 부인에게 딸과 결혼하겠다고 밝혔다. 체칠리아 부인은 사윗감의 밝은 미래를 기대하며 결혼을 허락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결혼에 반대했지만 정작 아들은 여기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모차르트가 1782년 8월 4일 결혼식을 거행한 곳은 체칠리아 부인의 집이 있던 밀히가세 1번지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성슈테판대성당이었다. 모차르트는 원래 장모의 집 근처에 있던 장크트페터교회에서 결혼하려 했지만 주변 지인의 도움으로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때 모차르트는 스물여섯 살, 콘스탄체는 스무 살이었다. 결혼을 승낙한다는 아버지의 편지가 도착한 것은 결혼식 다음날이었다.
갓 결혼한 모차르트 부부의 뒤를 따라 성슈테판대성당 앞의 로텐투름슈트라세를 걷는다. 리히텐슈테그 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조금만 가면 호허마르크트가 나타난다. 여기서 4~5분 정도 더 이동하면 비플링거슈트라세가 보인다. 모차르트가 신혼살림을 차린 곳은 이 거리의 19번지였다. 그는 이곳에서 ‘대미사곡 C단조’를 작곡해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초연했다. 결혼에 반대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른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려는 뜻이 담긴 곡이었다.
모차르트의 신혼집인 비플링거슈트라세는 그가 여섯 살 때 첫 빈 연주회를 열었던 암호프광장 인근이다. 그는 이 집에서 결혼 이듬해 6월에 첫 아들 라이문트 레오폴트를 낳았다. 부부는 첫 아들을 암호프교회에 데려가 세례를 받게 했다. 하지만 아들은 불과 두 달 만에 눈을 감고 말았다. 부부는 결혼하고 첫 8년 사이에 아이를 여섯이나 낳았다. 그중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아이는 둘이었다.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와 프란츠 자베르 볼프강 모차르트였다.
비플링거슈트라세 19번지에서 다시 거꾸로 호허마르크트 쪽으로 1분 정도 걸어가면 조그만 골목길 사이로 유덴플라츠가 나타난다. 과거에는 유대인 밀집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홀로코스트 위령탑’이 있다. 모차르트는 1783년 4월 유덴플라츠 3번지 건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1784년 1월까지 9개월 정도 살았다. 그는 여기서 유명한 ‘터키 행진곡’이 들어간 ‘피아노 소나타 11번 A장조 K331’를 작곡했다. 이 건물은 지금은 학교 등으로 사용된다.
■모차르트하우스
유덴플라츠에서 호허마르크르트를 지나 다시 성슈테판대성당으로 간다. 북쪽 탑 앞을 지나 슐러스트라세로 들어간 뒤 곧바로 돔가세 쪽으로 우회전한다.
모차르트는 1784년 9월 29일 돔가세 5번지 2층으로 이사했다. 둘째 아이 카를 토마스가 태어나고 8일 뒤였다. 이곳은 당시에는 빈에서 가장 좋은 건물 중 하나였다. 그가 입주할 때 내기로 한 집세는 3개월에 230굴덴, 연간 960굴덴이었다. 직전에 살았던 곳의 집세는 3개월에 65굴덴, 연간 260굴덴이었다. 결국 새 집의 집세는 이전 집과 비교해서 3.7배 정도였다. 그가 잘츠부르크에서 받았던 연봉의 배 이상 수준이었다.
모차르트가 빈에서 가장 멋진 저택에 들어가게 된 것은 수입이 엄청나게 늘어난 덕분이었다. 1784~1787년은 그의 음악적 전성기였고 경제적 황금기였다. 당시 그는 빈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다. 저명한 사회 지도층 인사 중에서 친구도 많았다. 저택에서 연주회를 열어달라고 초청장을 보낸 귀족이 줄을 설 정도였다.
모차르트는 돔가세에서 살 때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물론 피아노 협주곡 20~25번을 작곡했다. 이 기간 중에 그가 번 돈은 해마다 5000~1만 굴덴이었다. 잘츠부르크에서 받던 연봉 400굴덴과 비교하면 12~24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당시 빈의 유명 병원의사가 받는 연봉은 600굴덴이었다. 상류층이라도 1년에 1000굴덴을 벌면 소득이 높은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따라서 그가 번 돈은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거액이었을 게 분명하다.
모차르트가 살았던 돔가세 5번지 주택 2층에는 큰 방 4개, 작은 방 두 개, 그리고 부엌이 있었다. 그의 가족이 살기에는 지나치게 큰 집이었다. 그는 평생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집뿐 아니라 옷, 신발도 마찬가지였다. 낡은 집에서 살거나 옷, 신발이 추레하게 보이는 걸 무척 부끄럽게 여겼다. 모차르트는 이곳에 친구를 초청해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가 사람 만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랬던 측면도 있었지만 과시욕이 더 강했다고 볼 수도 있다.
빈 시청은 2004년 모차르트하우스를 대대적으로 재단장했다. 공사는 2006년에 마무리됐다.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후 이 건물은 모차르트의 인생과 예술세계를 소개하는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은 성슈테판대성당 인근에 자리를 잡은 데다 ‘피가로의 결혼’이 작곡된 곳이라는 상징성도 가져 관광객의 관심을 끌기에 훌륭한 장소다.
세계적 팝스타 마돈나는 2012년 6월 30일 딸 로드, 그리고 밴드 멤버 일부를 데리고 모차르트하우스를 방문했다. 마돈나가 20세기 최고 여성 팝스타라면 모차르트는 18세기 최고의 음악가였다. 마돈나는 방명록에 ‘늘 영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적었다.
■쇤브룬궁전
빈 여행을 하면서, 특히 모차르트가 빈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하면서 쇤브룬궁전을 안 가볼 수는 없다. 빈 여행의 하이라이트일 뿐 아니라 그의 음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잘츠부르크에서 온 소년이 놀라운 연주 실력을 발휘한다는 소식을 들은 프란츠 슈테판-마리아 테레지아 황제 부부는 지체하지 않고 그들을 쇤부른궁전으로 초청했다. 모차르트 가족이 궁전에 들어간 것은 1762년 10월 13일이었다.
쇤브룬궁전 ‘거울의 방’에서는 황제 부부 외에 황태자였던 요제프 2세 그리고 나중에 프랑스 파리로 시집을 가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는 마리아 앙투안 공주 등 황실 가족이 모두 모여 있었다. 모차르트와 누나 난네를은 궁정 작곡가 게오르그 크리스토프 바겐세일이 작곡한 콘체르트 전곡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부부는 두 아이의 연주에 매혹당하고 말았다.
일화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연주를 마치고 걸어가다 미끄러져 넘어졌다. 이때 마리아 앙투안이 달려가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모차르트는 공주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나중에 나랑 결혼하자”고 말해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지어낸 이야기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모차르트보다 다섯 살 많았던 공주 요제파는 모차르트의 손을 잡고 궁전의 여러 방을 구경시켜 주었다.
이틀 뒤 궁전의 시종이 모차르트 가족이 묵고 있던 숙소로 찾아가 황실의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모차르트와 누나 난네를에게 준 선물은 옷이었다. 모차르트에게는 대공 막시밀리안 프란츠가 입었던 실크 드레스가 주어졌다.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의 막내아들인 막시밀리안은 모차르트와 동갑이었다. 난네를도 드레스를 선물로 받았다. 레오폴트는 금화 100듀캇을 챙겼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요제프 2세 황제에게서 우대를 받았던 모차르트는 1786년 쇤브룬궁전의 오랑제리에서 이색적인 연주회를 가졌다. 1985년 체코 출신의 밀로스 포만 감독이 만든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그를 암살한 것으로 묘사되는 궁정음악가 살리에리와 작곡 대결을 벌인 것이었다.
요제프 2세는 1766년 결혼해 브뤼셀로 건너간 여동생 마리아 크리스텐이 결혼 20년 만에 친정을 방문하자 여동생을 환영하기 위해 여러 행사를 진행했다. 그중 하나로 모차르트-살리에리 음악 대결을 기획한 게 계기였다.
오랑제리는 초대형 온실이었다. 유리로 만든 아치형 천장의 길이는 무려 189m였다. 황실은 오랑제리를 단순히 열대식물의 온실로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추운 겨울에는 따뜻하게 연주회나 파티를 여는 장소로도 이용했다. 규모가 컸기 때문에 대규모 파티를 열기에 제격이었다.
두 작곡가의 대결은 빈의 겨울 추위가 가장 매서운 시기인 2월 7일에 벌어졌다. 참석자는 황제 부부는 물론 귀족 등 80명이었다. 모두 부인을 데리고 갔으니 총 참석 인원은 160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랑제리에는 양쪽 끝에 하나씩 두 개의 무대가 설치됐다. 모차르트가 먼저 자작 오페라 ‘극장 감독’을 공연했고, 이어 맞은편에서 살리에리가 자작 오페라 ‘처음에는 음악, 나중에는 말’을 공연했다. 두 무대의 가운데에는 초대된 손님들이 앉아 심판 역할을 맡았다. 한쪽의 오페라가 끝나면 의자를 뒤로 돌려 반대쪽의 오페라를 봤다. 손님 박수가 큰 오페라가 이기는 게 규칙이었다. 결과는 살리에리의 완승이었다.
모차르트가 쇤브룬궁전에서 연주한 걸 기념하기 위해 해마다 여름에는 비엔나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서머 나이트 콘서트 쇤브룬’이라는 음악회가 열린다. 또 모차르트-살리에리의 맞대결 행사가 열린 걸 기념하기 위해 지금도 오랑제리에서는 매년 여름에 모차르트 콘서트가 진행된다. 물론 두 작곡가의 맞대결 형식은 아니다. 단순히 모차르트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연주하는 콘서트일 뿐이다.
남태우 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