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티메프'와 그림자 금융
‘금융 자율화 시대의 새로운 여신 전문 금융회사.’ 파이낸스 업체들은 스스로를 ‘금융’으로 포장해 서민의 주머니를 노렸다. IMF 구제금융 시절인 1997년 말 부산에는 삼부파이낸스를 필두로 파이낸스 업체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연 30~40% 수익을 약속하며 지역 은행 퇴출 뒤의 금융 공백을 파고들었다. 부동산, 영화 투자를 수익 구조로 내세웠지만 실은 돌려막기일 뿐이었다. 유사 수신 사기극은 막대한 피해를 남긴 채 2년 만에 끝났다. 유사 수신이 불법화된 건 2000년. 결과적으로 사후 약방문이었다.
2021년 ‘머지포인트 사태’로 환불 대란이 일어났다. 업체가 ‘20% 무제한 할인’을 내세운 공격적 마케팅으로 현금을 끌어모은 뒤 서비스를 중단했다. 피해자들은 ‘폰지 사기’와 다름없다고 아우성을 쳤다. ‘폰지 사기’란 수익 사업이 없거나 고수익이 나지 않는데도 신규 투자자의 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높은 수익률을 주는 수법이다. 파이낸스 영업 구조와 오십보백보다.
‘티메프’(티몬·위메프) 사태가 유사 수신의 악몽을 소환했다. 판매금 정산 지연에 이어 해피머니 등 할인권까지 사용·환불이 중단되는 바람에 내부 자금 흐름이 드러나면서다. ‘티메프’는 소비자 결제 금액을 최장 70일까지 자체 보유하면서 무이자 자금 차입 효과를 누렸다. 대행 수수료만 떼면 되는 플랫폼 기업이 ‘이자 놀이’를 하는 구조였던 셈이다. 또 7~8% 할인한 상품권은 기업어음(CP)과 다름없었다. 이 돈을 모기업 큐텐이 제 돈처럼 쓰다가 결국 사고가 났다.
이 사태는 이커머스 기업의 도덕적 해이와 금융 당국의 부실한 관리·감독의 합작품이다. 결제 대금을 외부 금융기관에 예치했다가 지급하는 ‘에스크로(안전결제시스템)’는 의무가 아니고, 대금 정산 기한을 규정하는 법규도 없었다. 당국은 ‘티메프’의 자본 잠식을 알고도 방치했다. 언제 시한폭탄이 터져도 하나 이상할 게 없는 조건이었다.
금융기관이 아니면서 유사한 기능을 하는 ‘그림자 금융’은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이커머스와 빅테크에서 흔한 포인트나 선불충전금 시장 규모는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 집객력 덕분에 막대한 유동 자금을 운용하게 된 플랫폼 기업이 유동성 위기에 빠지지 말란 법이 없다. 포인트·상품권이 한순간에 휴지 조각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사고가 항상 규제의 빈틈에서 발생해 왔고 당국은 뒷북 대처를 반복했다는 점이다. 유사 수신의 망령이 아직 어른거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