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퍼지는 영상물… 범인은 ‘그’ 아니라 ‘그들’”
딥페이크 피해자 인터뷰
경찰 “텔레그램 수사 어렵다” 뒷짐
직접 증거 수집 나서니 2차 가해
직장까지 전화 걸려 와 결국 퇴사
버전 바꿔 떠도는 영상에 무력감
‘텔레그램은 수사하기 어렵습니다.’ 딥페이크 성 착취물 피해자들이 경찰에 신고하면 듣는 한결같은 이야기다. 범죄 장소가 버젓이 있지만 잡지 못하는 상황에 피해자들은 또 다른 좌절감을 느낀다. 그래서 많은 피해자들은 직접 단서를 잡기 위해 SNS 속으로 뛰어든다. 딥페이크 성 착취물 피해자 A 씨도 그중 한 명이다. A 씨와 인터뷰 내용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혹시 그?
집 앞 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열린다. 순간 온몸이 굳고, 심장 박동은 빨라진다. 혹시 주소를 알아낸 ‘그들’이 집 앞으로 찾아오지는 않을까? 다행히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다. 심호흡을 하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외출할 때마다 엘리베이터 타는 것이 힘들다. 몇 달 전 텔레그램 게시물을 본 이후부터다. 내 얼굴과 음란물이 합쳐진 딥페이크 영상과 인적 사항이 표시된 게시물들.
처음에는 가짜 인스타그램 계정부터 시작했다. 올해 4월 말 지인이 내 인스타그램이 이상하다고 했다. 내 계정으로 초대 메시지가 와서 들어가 봤더니 나를 비방하는 내용이더라는 것이다. 직접 들어가 본 게시물에는 내 사진과 인적 사항 그리고 내가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었다.
그즈음 내 진짜 인스타그램에는 다른 이들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조건 만남을 하자거나, 성관계를 몇 번 해봤냐는 등의 성희롱 메시지들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한 사람이 떠올랐다. 지난해 한 달간 사귀다 헤어졌던 B. 헤어지자는 말에 그는 격렬하게 반응했다. 그를 만나주지 않자 내 집에까지 몰래 들어올 정도로 집요했다. 그를 피해야 했고, 회사는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으로 이사한 후 경찰에 스토킹 신고를 했다.
신고 때문일까? 온라인에서 그가 다른 방식으로 괴롭히는 것 같았다. 심증은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경찰도 증거가 없으면 B에 대한 딥페이크 수사가 어렵다고 했다. 증거를 직접 찾아야 했다.
■텔레그램에 뛰어들다
처음으로 텔레그램이란 곳에 들어갔다. 내 신상 정보는 음란물을 공유하는 대화방에서 돌고 있었다. 그리고 내 얼굴과 음란 영상을 합성한 딥페이크 영상도 있었다.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영상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치심이 들었다.
그 게시물들은 신상 정보를 업데이트하며 계속 떠돌아다녔다. 거기에는 실제로 사용하는 전화번호도 있었다.
스토킹 이후 전화번호를 바꿨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새로운 전화번호가 게시물에 적혀 있었다. 범인은 B가 아니라 바뀐 번호를 아는 가까운 사람인가? 아니면 B가 예전 번호와 내 정보를 이용해 새 전화번호를 아는 건가? 머릿속이 복잡하고 도대체 범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모르는 이들에게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SNS를 보고 전화를 했다. 진짜 000이 맞냐? 한번 만날 수 있냐?’
몇 번 그런 전화를 받고는 전화벨만 울려도 심장이 뛰었다. 전화번호를 바꿀 수도 없었다. 스토킹 수사 중 전화번호를 바꿨더니 수사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경험 때문이었다.
한동안 모르는 전화번호는 받지 않았다. 카카오톡 친구 맺기도 거부 신청을 했다. 새로 구한 직장에서는 카카오톡으로 왜 연락이 되지 않냐고 물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구구절절 이야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나 회사 동료들이 SNS에 떠도는 이야기를 안다면?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러던 차에 누군가 회사에 전화를 했다. 거기에 딥페이크 피해자가 다니는 것 같다고.
선의였을까? 악의였을까? 새로 구한 직장도 그만둬야 했다.
■범인은 그가 아닌 그들?
범인을 잡으려면 적극적으로 정보를 모아야 했다. 마음을 다잡고 모르는 전화도 받기 시작했다. 텔레그램이나 인스타그램을 보고 연락했다는 전화가 하루에도 대여섯 통이 왔다. 그중에는 중학생 아이들도 있었다. 나중에 부모가 그 사실을 알고 사과를 하기도 했다.
피해를 알려주겠다고 연락한 이들도 있다. 그런 전화도 어떤 것들은 달갑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원한 살 일을 하셨길래 이런 피해를 입으시는 거에요?’ 위로가 아니라 또 다른 가해였다. 내 잘못이 아닌데….
나에게 연락이 오는 이들을 통해 나와 관련된 정보를 모았다. 나처럼 직접 가해자를 잡으려는 피해자가 많은 것 같았다. 텔레그램에는 피해자들과 나눈 대화를 캡처해 조롱하며 올려놓기도 했다. ‘급한가 보네 ㅋㅋㅋ’
누군가 내 정보가 텔레그램에서 10만~20만 원에 거래된다는 이야기도 해줬다. 여러 버전의 게시물을 보며 범인은 B만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유포된 영상과 사진으로 누군가 계속 새로운 딥페이크 영상을 만드는 것 같다. 버전을 달리해 계속 퍼지는 온라인상의 ‘가짜 나’를 찾아다니며 지친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식으로 범인을 찾을 수 있을까?
정부가 딥페이크 영상 처벌을 강화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린 학생들도 피해를 많이 당하고 있다고 했다. 한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지난날들이 생각났다. 어른인 나도 이렇게 힘든데, 민감한 시기의 어린아이들은 얼마나 힘들까? 가여웠다.
몇 년 전 N번방 사건으로 세상이 시끄러웠는데도 여전히 텔레그램은 법의 사각지대이고, 어린아이들마저도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되는 지금 상황을 이해하긴 힘들다. 혹시나 다른 피해자를 만나면 말해주고 싶다. ‘우리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 견디고 일어나 웃을 수 있는 일상을 되찾자’고.
송지연 기자 sjy@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