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용·시간 험로 뚫고 입국하자 또 다시 '산 넘어 산' [귀향, 입양인이 돌아온다]

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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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뿌리찾기 귀향길 동행기

공항 지하철 개찰구부터 큰 장벽
경찰 유전자 검사도 언어에 막혀
주민센터 친절도 사전 파악 기본
그마저도 담당 바뀌면 불운 독박
천신만고 끝에 찾은 건 이름 하나

지난 7월 12일 오후 5시 서울 부암동 주민센터. 담당 공무원은 예전 호적을 찾아달라는 해외 입양인 지옥여(52) 씨의 요청에 전산시스템 검색창에 이름을 올렸지만 호적을 찾지 못했다. 양보원 기자 bogiza@ 지난 7월 12일 오후 5시 서울 부암동 주민센터. 담당 공무원은 예전 호적을 찾아달라는 해외 입양인 지옥여(52) 씨의 요청에 전산시스템 검색창에 이름을 올렸지만 호적을 찾지 못했다. 양보원 기자 bogiza@

지난 7월 11일 오전 7시 45분, 서울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자동문이 열렸다. 한 중년 여성이 큼지막한 캐리어 두 개를 끌고 들어섰다. 해외 입양인 지옥여(52) 씨다. 인파 속에서 잠시 멈춘 지 씨가 영어로 된 ‘Subway’(지하철) 이정표를 보고 한참 만에 발길을 옮겼다. 50년 만에 마음먹은 큰 걸음이다.

지 씨는 1972년 한국에서 태어나 덴마크에 보내져 현재 싱가포르에 거주한다. 50여 년 만에 부모를 찾아야겠다고 결심이 선 끝에 이번 방문길에 올랐다. 인천국제공항을 나서는 지 씨의 표정이 결연했다.

〈부산일보〉 취재진이 지 씨의 한국 방문에 동행했다.

본적지인 마포구청에 연락하니 그제야 지옥여(52) 씨의 호적이 발견됐다. 52년 만에 지 씨가 찾은 진짜 이름은 ‘지옥녀’였다. 부모 이름은 공란이었다. 본적지인 마포구청에 연락하니 그제야 지옥여(52) 씨의 호적이 발견됐다. 52년 만에 지 씨가 찾은 진짜 이름은 ‘지옥녀’였다. 부모 이름은 공란이었다.

■‘말문’ 막힌 해외 입양인

지 씨의 한국 방문은 인천공항을 나서는 지하철 개찰구부터 가로막혔다. 한국어가 전혀 안되기 때문이다. 개찰구를 드나드는 사람들을 바라만 보던 지 씨는 결국 안내원을 찾았다. 안내원에게 교통카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하는 데만 5분이 넘게 걸렸다. 우여곡절 끝에 고속터미널역에 내려 첫 목적지, 서울 서초경찰서에 도착했다.

“I am an adoptee. I am here to do a DNA test.”(저는 입양인이에요. 유전자 검사를 하러 왔어요.)

경찰서 1층 로비, 지 씨가 60대 경비원에게 재차 영어로 말을 걸었다. 경비원이 난감한 듯 탄식을 내뱉자 두 사람은 한동안 얼굴만 바라봤다. 이윽고 지 씨가 손에 쥔 ‘무연고 입양인 유전자 검사 대상 확인서’를 들이밀었다. 아동권리보장원이 발급한 서류였다.

무연고 해외 입양인 유전자 검사제도는 경찰청과 재외동포청, 아동권리보장원이 협업해 유전자 대조를 통해 실종자 가족을 찾아주는 사업이다. 친가족의 유전자 정보가 등록돼 있으면 입양인이 등록한 유전자 정보를 대조해 혈연관계를 확인한다.

경비원은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들썩 올려 보였다. 진이 빠진 지 씨는 로비 의자에 풀썩 앉았다.

언어 장벽에 막힌 지 씨가 해외 입양인 뿌리 찾기를 지원하는 민간 단체 ‘뿌리의집’에 도움을 청했다. 뿌리의집과는 싱가포르에 있을 때부터 연락을 이어왔다. 20분 후 뿌리의집 김창선 사무총장이 도착해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야 경찰서 출입문이 열렸다.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지만 또 다른 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전자 검사실의 쇠창살 앞에서 경찰은 “보안 때문에 동행 한 명만 출입이 가능하다”며 김 총장을 가로막았다.

통역 없이 소통이 안 된다는 사실을 한참 설명하고 나서야 겨우 김 사무총장과 지 씨가 안으로 들어섰다.

지난 7월 12일 오후 1시 30분 서울 서초경찰서 유전자 검사실 앞 쇠창살. 경찰은 보안 때문에 동행 한 명만 출입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양보원 기자 bogiza@ 지난 7월 12일 오후 1시 30분 서울 서초경찰서 유전자 검사실 앞 쇠창살. 경찰은 보안 때문에 동행 한 명만 출입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양보원 기자 bogiza@

■이역만리서 매겨지는 공무원 ‘친절도’

지 씨는 호적을 찾아보려고 방문한 주민센터에서도 난감한 상황을 맞닥뜨렸다. 지 씨가 찾은 종로구 부암동 주민센터는 서초경찰서에서 10km 넘게 떨어진 곳이다. 대중교통으로 1시간여가 걸렸다. 지 씨는 해외 입양인들이 매긴 ‘친절도’ 별점에 따라 부암동 주민센터를 선택했다. 무수한 입양인들이 전국 주민센터를 찾았는데 번번이 퇴짜를 맞았고 그런 뼈아픈 경험이 모여 부암동 주민센터를 찾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입양 기록은 너무 부족했다. 담당 공무원도 지 씨 같은 입양인 요청이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그는 한참 만에 전산시스템 검색창에 ‘지옥여’를 올렸지만 결과는 ‘검색 결과 없음’으로 나왔다. 공무원은 “주민등록 기록을 전산화하는 작업은 90년대에 이뤄져서 70년대에 작성된 서류는 전산화 과정에서 누락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미안해했다.

본적지인 마포구청에 연락을 하니, 지 씨의 호적이 나왔다. 한자와 한글이 혼용돼 호적을 손에 쥐고도 해독하지 못하던 지 씨에게 담당 공무원과 김 총장이 호적상 그의 본래 이름을 불러줘야 했다. 52년 만에 지 씨가 찾은 진짜 이름, ‘지옥녀’였다. 호적의 부모 이름은 공란이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지 씨 얼굴이 상기됐다. “50년 만에 호적을 얻었네요”. 지 씨는 한국 방문 10시간 만에 처음 웃음을 보였다.

김 사무총장은 “운이 좋은 경우”라고 말했다. 지 씨는 통역이 있었고, 퇴근 시간 직전에 1시간 동안 복잡한 사무 절차를 함께 해주는 공무원을 만났다. 김 사무총장은 “입양인 커뮤니티에서 평 좋은 곳을 찾아도 운에 따라 대응 서비스의 질이 달라진다. 최대한 확률을 높이기 위해 친절한 행정기관을 찾아가지만 적극적인 환대를 기대하고 방문했다가 언어 장벽과 불친절에 막혀 돌아가는 입양인들이 부지기수다”고 말했다.

지난 7월 12일 오후 8시 뿌리의집. 직원들이 지옥여(52) 씨가 각 기관으로부터 제공받은 서류를 번역하고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지난 7월 12일 오후 8시 뿌리의집. 직원들이 지옥여(52) 씨가 각 기관으로부터 제공받은 서류를 번역하고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소수에게만 허락된 ‘뿌리 찾기’

입양인들의 뿌리 찾기는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뒷받침돼야 시작될 수 있다. 통역을 찾고, 조력기관과 소통을 한 뒤 수개월에 걸쳐 각 기관 방문 약속을 잡는다. 한국 입국 후에 경찰과 주민센터, 입양기관 등을 다니려면 최소 일주일이 필요하다. 항공권과 숙박비, 교통비, 통역비 등 기본 비용은 수백만 원을 호가한다.

실제 지 씨가 한국에 머무는 4박 5일간 호텔 하루 비용은 20만 원가량이었다. 싱가포르~인천 왕복 항공권은 60만 원대였다. 식비와 교통비도 따로 들었다. 뿌리의집 지원으로 통역비가 줄었지만, 이 기간 지 씨가 쓴 비용은 200만 원이 넘었다. 주로 덴마크, 스웨덴, 미국, 네덜란드 등지에서 서울을 찾는 해외 입양인의 경우 그 액수는 배가 된다.

해외 입양인이자 덴마크한국인진상규명그룹(DKRG) 한분영 공동대표는 “뿌리 찾기 과정은 해외 입양인들에게 너무 힘들다. 각종 기관을 전전해서 겨우 기록을 찾아내도 한국법 때문에 친부모 신상 공개는 어렵다고 하고, 각종 정부기관에는 한국어밖에 통하지 않는다. 이메일을 보내면 답변을 받기까지 2~3달이 걸리고 담당자가 바뀌면 다시 원점이다. 해외 입양인들은 뿌리 찾기 시작부터 포기한다”고 말했다.

지 씨는 4박 5일 일정을 마치고 지난 7월 16일 오후 8시 인천공항을 통해 싱가포르로 돌아갔다. 이 기간 그가 이동한 거리는 177.6km. 경찰서와 주민센터, 뿌리의집과 국내 입양기관 홀트, 해외 입양인연대(GOAL)를 순회한 그의 여정에서 그가 얻어낸 정보는 그의 호적 이름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지 씨는 여전히 한국의 ‘집’으로 돌아갈 희망을 놓지 않았다. “부모님을 만나면 원망이 아니라 그리워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 말을 하려고 찾고 있는 겁니다. 또 와야죠. 계속 오면 달라지지 않겠어요?”

※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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