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션 뷰] '미라클', 기적은 시작됐다
백현충 해양산업국장·한국해양산업협회 사무총장
대선조선·팬스타, 두 향토 기업
국내 첫 크루즈선 건조 의기투합
지역 해운·조선 상생 모델로 주목
부산 모항의 크루즈 산업도 기대
예나 지금이나 선박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건축물 중 하나다. 그만큼 공정이 복잡하고 완공까지의 난관도 많다. 바다를 죽음의 공간으로 생각하며 두려워한 옛날에는 더 그랬다. 그러다 보니 공정 단계별로 고비를 넘길 때마다 안전을 기원하는 제례와 의식이 필요했을 것 같다.
그 전통이 지금도 조선업계에 이어지고 있다. 선주와 조선소의 계약식으로 시작하는 ‘조선(造船) 의식’은 철판 절단식, 용골 거치식, 진수식을 거쳐서 인도식에 이르러 갈무리된다. 철판 절단식은 배를 만들 재료가 준비됐다는 의례이고, 용골 거치식은 선주가 원하는 배의 틀을 첫선 보이는 의식이다. 용골(龍骨)은 용의 뼈, 즉 용에 비유된 배의 뼈대다. 선주는 단계마다 귀한 손님을 모셔서 배의 안전을 기원한다.
지난 10일 부산 해운기업인 팬스타그룹이 ‘팬스타 미라클호’ 진수식을 가졌다. 진수(進水)식은 배가 정말 물 위에 뜰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로 다른 교통수단에서는 볼 수 없는 의례다. 팬스타그룹은 내부 인테리어 공사와 시운전을 거쳐서 내년 3월 마지막 의례인 인도식만 남겨 놓았다.
초대형 선박이 하루가 멀게 수없이 지어지는 시대에, 미라클호 건조에 주목하는 첫 이유는 이 선박이 우리나라 최초의 크루즈선으로 기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크루즈선이 바로 ‘부산’에서, 부산 선사와 부산 중형 조선소의 의기투합으로 지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대선조선은 1945년 대선철공소로 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조선소다. 내년이면 창립 80년을 맞는다. 팬스타그룹도 창립 34년의 향토 기업이다. 두 향토 기업이 우리나라 최초의 크루즈선 건조라는 역사를 쓰고 있다는 얘기다.
‘최초’라는 수식어에는 위험 부담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계약 당시 대선조선은 워크아웃을 앞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팬스타는 국내외 대형 조선소의 손짓을 뿌리치고 대선조선을 선택했다. 가격과 같은 실리 문제를 간과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향토 기업 간의 연대’라는 의미가 빛바래지는 것은 아니다.
고비는 또 있었다. 대선조선은 영도와 다대포에 조선소를 두고 있다. 다대포에서 선수와 선미로 나눠서 선체를 만들었고, 이를 부선에 실어서 영도로 옮겨 두 동강의 선체를 결합했다. 선체가 합쳐지면 배 무게만 9000t에 이르는데, 다대포 조선소 앞바다는 수심이 얕아서 미라클호를 띄울 수 없었다. 이런 핸디캡을 두 향토 기업은 신뢰와 협력으로 이겨냈다. 그래서 미라클호 건조에서는 다른 선박과 달리 ‘로드 아웃(Load Out)’이라는 특별한 의식이 하나 더 열렸다.
대선조선은 워크아웃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국내 최초의 크루즈선을 짓는 역사의 주인공이 됐다. 팬스타그룹도 ‘향토 기업 협력과 연대’라는 새 이정표를 세웠다. 두 기업의 상생 모델은 의미가 크다. 그 가치를 지역 사회가 제대로 평가하고 널리 알려야 한다.
대한민국은 세계 1위의 조선 강국이지만 크루즈선 건조에서만큼은 내로라하는 실적이 없다. 세계 크루즈선 시장은 핀칸티에리, 마이어 베르프트 등 일반인은 잘 모르는 유럽 조선소가 독과점하고 있다. 그러나 크루즈선도 금단의 열매는 아니다. 크루즈 여행에 대한 욕구가 국내에서도 커지고 있고 선상 카지노 허용과 같은 정부 조치가 뒤따른다면 국내 조선소의 크루즈선 건조 붐을 기대할 수 있다.
크루즈 시장은 유럽처럼 중소형 조선소가 더 유리할지 모른다. 특히 부산은 중소 조선소와 기자재 업체, 의장 기업 등의 집적도가 높고, 턱밑까지 쫓아온 중국을 따돌리기 위해서라도 기술 고도화를 통한 크루즈선 건조에 더 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더 절실해야 더 큰 기회가 생긴다고 했다. 다행히 선박 금융도 부산에서 최근 활성화하고 있다. 이를 어떻게 조합하고 제휴하느냐에 따라 부산 해양산업의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 이를 위해 행정이 나서야 한다. 행정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법률이라는 잣대로 가르는 행위가 아니다. 대전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효율적인 자원 배분과 제휴, 연대 시스템을 구축해서 지역 경제의 성장을 지속시키는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 권한 없음을 탓하기보다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를 먼저 생각하면 좋겠다. 없으면 찾고, 찾으면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절실하다.
대선조선과 팬스타의 연대처럼 부산 경제는 어쩌면 새로운 도전에 이미 나선 것인지 모른다. 부산 해양산업의 ‘기적’은 그렇게 조용히, 조심스럽게 시작되고 있다. 부산 모항 크루즈 산업의 기적도 함께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백현충 기자 choo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