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기록해야 할 빛나는 존재가 있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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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랄프 깁슨 어워드 수상자
권도연 작가 기념 개인전 개막
12월 6일까지 고은사진미술관
6년여 이어지는 여정의 기록들

제1회 랄프 깁슨 어워드 수상자인 권도연 작가의 신작 ‘파도를 기다려 (2024)’.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제1회 랄프 깁슨 어워드 수상자인 권도연 작가의 신작 ‘파도를 기다려 (2024)’.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부산에는 사진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가진 전문미술관이 2곳 있다. 고은사진미술관과 랄프 깁슨 사진미술관. 둘 다 부산 해운대구에 위치한다. 2014년 사진계 거장 랄프 깁슨의 회고전이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열리며 깁슨과 고은문화재단은 인연을 맺는다. 이후 랄프 깁슨의 이름을 딴 사진미술관 역시 고은사진미술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2022년 10월 문을 열었다.

출발부터 인연이 깊은 두 미술관은 2023년 한국 사진계를 위해 의미 있는 작업을 시작했다. 랄프 깁슨 사진미술관은 자신만의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한국의 사진가를 지원하기 위해 랄프 깁슨 어워드를 제정한다. 거장 랄프 깁슨이 직접 심사하며 최종 단계에 오른 후보자들은 랄프 깁슨과 1대 1 대면 인터뷰를 한 후 수상자가 결정된다. 유명 작가의 이름만 붙인 상이 아니라 거장이 직접 수상자 선정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큰 관심이 쏠렸다. 수상자는 고은 사진미술관에서 단독 전시와 사진집 출판을 지원받을 수 있다.

지난해 진행된 첫 번째 랄프 깁슨 어워드에는 500명 이상의 사진 작가가 후보에 올랐고, 권도연·정희승 사진 작가가 선정됐다. 최종 후보에 오른 2명의 작가 중 한 명을 도저히 선택할 수 없어 예상치 못하게 공동 수상자가 나오게 된 것이다.

랄프 깁슨 어워드 발표 후 1년 만에 수상자의 수상 기념전이 마련됐다. 권도연 작가의 ‘파도를 기다려’전이 12월 6일까지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열린다. 수상 후 1년이 지난 만큼, 수상자로 선정된 이후의 신작들도 함께 소개된다. 전시장에는 2019년 ‘북한산’, 2022년 ‘야간행’, 2023년 ‘반짝반짝 빛나는’, 2024년 ‘파도를 기다려’ 까지 권 작가의 연작 시리즈 대표 작품이 나왔다. 시리즈의 제목은 다르지만, 사실 전시장의 모든 작품이 하나의 결과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랄프 깁슨은 “오랜 기간 이어진 작업의 탄탄함과 밀도, 몰입감, 메시지의 힘이 대단하다. 고민의 깊이와 시간, 인내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다. 작업 서사에 대한 작가의 태도와 사진가로서의 자기 인식도 홀륭하다”고 소개했다. 랄프 깁슨의 설명처럼 권 작가의 사진에는 이야기가 넘쳐나고 찍는 이의 땀냄새가 가득하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권 작가는 글쓰기에서 사진으로 표현 매체가 변경됐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권도연 ‘북한산(2019)’.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권도연 ‘북한산(2019)’.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권도연 ‘북한산(2019)’.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권도연 ‘북한산(2019)’.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권도연 ‘야간행(2022)’.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권도연 ‘야간행(2022)’.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북한산’은 북한산에 사는 들개를 촬영한 시리즈이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 매일 조용히 그들을 관찰하며 자신을 자연의 일부처럼 받아주길 원했다. 마침내 개들은 작가를 나무 보듯, 산 속의 또 다른 친구로 받아들였고 작가는 들개에게 일일이 이름을 붙였다. 재개발로 주거지를 상실한 채 버려졌고 살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가 야생 동물이 된 개, 인간은 이제 그들을 유해 조수, 외래종이라는 이름으로 포획하고 있다. 작가를 향해 포즈를 취해주는 듯한 들개의 모습을 보며 권 작가의 발품이 느껴진다.

‘야간행’은 멸종 위기 야생생물 1급 여우를 따라가는 400km의 여정이다. 토종 여우 복원 사업을 벌이며 소백산에 방사된 여우 중 한 마리가 태백산을 건너 해운대까지 이동했다. 작가는 여우의 GPS를 보며 그 길을 따라 걸었다. 그 여정에서 울진과 삼척을 덮친 산불로 인해 새 터전을 찾는 산양을 만났고 울산에서는 기후 변화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떼까마귀도 보았다. 순천 도심에선 탈출해 번식한 타이완 꽃사슴도 만났다. 물론 작가를 이끈 붉은 여우를 직접 만나는 순간도 카메라에 담겼다.

권도연 ‘반짝반짝 빛나는(2023)’.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권도연 ‘반짝반짝 빛나는(2023)’.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반짝반짝 빛나는’ 시리즈는 한강 아래 인공시설녹지에서 서식하는 동물들을 촬영했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작가는 이곳으로 향했고 고라니, 너구리, 수달의 일상을 만났다. 작가는 동물을 일부러 작게 찍어 풍경의 일부처럼 보이게 했다. 풍경 사진처럼 보이는 이 시리즈에선 숨은 그림찾기처럼 야생동물을 찾는 재미가 있다. 이 시리즈는 의도치 않게 강제로 중단됐다. 한강과 아라뱃길을 유람선으로 잇는 공사가 시작됐고 단 며칠 만에 야생동물은 사라져버렸다.

랄프 깁슨 어워드 수상자로 발표된 후 권 작가는 새로운 시리즈 ‘파도를 기다려’를 시작했다. 제목은 달라졌지만, 이 시리즈는 2022년 야간행 작업에서 함께한 여우로부터 시작됐다. 400km를 걸어 소백산에서 해운대로 온 여우, 200여 일을 머물다 소백산으로 다시 돌아가다가 고향을 눈앞에 두고 숨진 채 발견된 그 여우가 보았을 풍경을 담은 사진들이다.


제1회 랄프 깁슨 어워드 수상자인 권도연 작가의 신작 ‘파도를 기다려(2024)’.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제1회 랄프 깁슨 어워드 수상자인 권도연 작가의 신작 ‘파도를 기다려(2024)’.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제1회 랄프 깁슨 어워드 수상자인 권도연 작가의 신작 ‘파도를 기다려(2024)’.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제1회 랄프 깁슨 어워드 수상자인 권도연 작가의 신작 ‘파도를 기다려(2024)’.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2023년 겨울부터 여우가 걸었던 400km의 길을 다시 걸었고 사람이 아니라 철저히 여우의 시각에서 본 풍경을 촬영했다. 전시 제목인 ‘파도를 기다려’는 여우가 머물렀던 부산 해운대 어느 지점에서 본 바다이다.

권 작가는 자신이 찍는 사진의 쓸모에 대한 고민을 오래 했다고 말했다. “세상에는 기록해야 할 빛나는 존재들이 분명히 있는데 내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여전히 난폭한 이 세계에 반짝이는 존재들이 있으므로 세계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폭력적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고민 끝에 권 작가가 내린 결론이라고 한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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