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초 같은 내 삶, 혼란·방황 속 뿌리 찾기에 한가닥 희망 [귀향, 입양인이 돌아온다]
4 - 입양 그 후 이야기
대표 입양국 네덜란드 안착 공통점
자라온 환경·사연 달라 ‘4인4색’
정체성 위기·이방인 현실에 절감
입양 사실 한순간도 잊은 적 없어
친부모 찾아 근원 문제 해소 기대
1970~80년대 한국이 떠나보낸 수많은 아이들이 친부모를 찾으려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입양인들은 왜 5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을 다시 찾아오는가.
긴 시간 타국 땅에서 살아온 입양인들은 한순간도 입양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노란 피부, 검은 눈의 한인 입양인들은 외모가 다른 현지인들 사이에 살며 항상 입양 사실을 떠올려야 했다. 당연히 자신과 닮았을 친부모 생각을 지울 순 없었다.
“아무도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없는 곳에서 자라는 건 참 이상한 일이에요.”(입양인 김윤희 씨) “나와 닮은 부모와 형제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하는 건 인간으로서 가지는 기본적인 질문입니다.”(입양인 우기순 씨)
수송기에 아이들을 태워 보낸 한국은 긴 시간 그들의 삶에 대해 묻지 않았다. 〈부산일보〉가 한국 입양인들을 대거 받아들인 네덜란드를 찾아 입양인들의 어린 시절과 청년, 중년 시절, 입양인 2세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어린 시절
서준희(49) 씨는 1975년 부산 서구 암남동 소년의 집 앞에서 발견돼 이듬해 네덜란드로 입양됐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돼지농장이 있는 네덜란드의 한 시골 마을이었다. 동양인이 흔치 않은 시절이기도 했지만 서 씨는 그곳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쉬운 삶이었지만 모든 마을에서 저는 유일한 동양인이었어요.” 부모님을 따라 10차례 넘게 이사를 다녔지만 닮은 얼굴은 찾지 못했다.
교실에서 서 씨는 혼자 동양인이었고 늘 주목 받았다. 눈에 안 띄려 하다 보니 자주 움츠러들었다. 부모님은 친절했지만 사춘기 시절 내내 외로웠다.
“어릴 때는 집에서도, 밖에서도 속하지 못한다는 느낌이었어요. 부모님과는 끝내 연결돼 있다는 감각을 느끼지 못했죠.”
진로를 정할 시기가 되자, 입양 문제는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왔다.
“뿌리를 모르니 내가 누군지 모르겠고, 어떤 학교에 가야 할지 어떤 학과를 택해야 할지 정할 수 없었어요.”
질문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딸이 ‘내 눈은 못생겼어’라고 하더군요. 나와 겪은 혼란이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고는 자식에게 내 운명을 물려주고 있는 것인지 두려웠어요.”
■“20대는 집을 찾아 헤매던 시기”
‘미영은 매우 예쁘고 사랑스럽다. 굉장히 활달하며 타고나기를 사랑받을 만한, 애교가 많은 아이다. 이제 막 두세 단어를 붙여 ‘엄마 간다’ 또는 ‘목이 마르다’ 같이 자기 의사를 드러내는 짧은 문장을 말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을 웃기는 것을 좋아한다. 인형과 동물 모형을 좋아하고 계속 그것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한국사회봉사회 입양 기록에 담긴 구미영(48) 씨 3살 때 설명이다.
1976년 11월, 3살 미영은 이 기록을 지니고 네덜란드로 향했다. 부산 중구 광복로에서 발견된 구 씨는 자갈치시장에서 발견된 구군란(당시 5세) 씨와 함께 자매로 묶여 네덜란드의 삶을 시작했다. 생김새도, 발견된 곳도 다르지만 두 사람의 인생은 내내 함께였다.
3살 미영은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설명문과 함께 네덜란드에서의 삶을 시작했지만 그의 청춘은 쉽지 않았다. 그는 “매우 고단하고 무거운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한국 기억이 없던 3살 미영과 달리 언니 군란은 한국에서의 기억을 낱낱이 가져갔다. 한국의 맛과 냄새, 사람들을 기억한 채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일은 군란에게 쉽지 않았다.
“언니는 어릴 때부터 모든 것에 화가 나 있었어요. 부모님이 하는 어떤 말도 듣지 않고 항상 분란을 일으켰어요.” 군란은 청소년 시절 자주 자해했고 어느 날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했다. 구 씨는 당시 상황을 여전히 기억한다.
“집은 항상 불안했어요. 부모님과 언니는 계속 싸웠고 저마저 분란을 만들면 안 될 것 같아 모든 말에 순응했어요. 언니는 그런 저를 항상 미워했어요. 10대는 숨죽여 살았던 기억뿐이에요.”
스무 살이 되자 구 씨는 집을 떠났다. 부모님은 언니를 따라갈지, 부모님과 살지 고르라고 했고 구 씨는 아무도 고르지 않았다.
“20대는 집을 찾아 헤매던 시기였어요. 집을 찾았지만 내내 부유하는 기분이었요.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거나 고요하면 견딜 수 없어서 소음과 일시적으로 정신을 쏟을 만한 걸 찾아다녔어요. 모두 해로운 것들로요.”
런던, 스페인, 파리,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오기까지 어디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내내 돌아다녔다. 국경을 넘나들고 마약과 파티, 불건강한 관계 사이에서 살았다. “나는 이미 너무 바닥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둘 수 있는 것들은 더 낮은 것, 더 나쁜 것들이었어요.”
그 과정에서 구 씨는 폭행을 당했고 강압적인 관계도 요구 당했다. 몸도 정신도 망가져 갔다. 언니와 양부모의 끊임없는 불화를 통과해 마음 놓을 ‘집’을 찾기 위한 고단한 20대를 보낸 구 씨는 이제 50대에 들어섰다.
구 씨는 “더 좋은 집으로 입양을 가라고 기관이 써 준 ‘밝고 사랑스러운 아이’ 표현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들어요. 나는 그해 이후로 밝고 사랑스럽게 지내지 못했으니까요. 나는 내내 외로웠어요.”
■중년에 찾아온 위기
4살에 네덜란드에 입양됐던 요한(48) 씨는 중년이 돼서야 입양을 마주했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그는 밝고 쾌활한 성격에 노조위원장도 맡을 만큼 리더십도 강했다. 동양인치고는 190cm로 큰 키와 체격에 상대적으로 인종차별도 적었다. 네덜란드 사회에 잘 적응했다고 믿었다.
첫 아이가 나오며 인생이 달라졌다. 딸은 4살이 되던 해, 말문이 트였고 또렷하게 의사 표현을 해나갔다. “이건 먹고 싶지 않아” “저 옷은 입고 싶지 않아.” 딸은 좋고 싫은 것을 분명하게 요구하고 거부했다. 4살 아이의 의사가 이토록 분명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4살 요한’을 떠올렸다. 그는 “딸과 같은 나이인 내가 보육원에서 ‘떠나고 싶지 않아, 여기에 있고 싶어’ 말했을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둘째인 아들이 자라 4살이 되고 셋째 딸이 4살이 되던 해 그의 문제는 폭발했다. 점차 잦아지던 일의 실수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일과 일상 어디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입양길에 오르던 ‘4살 요한’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아이를 볼 때마다 생각이 나서 집에 들어가지 않는 날도 늘어났다. 술에 빠져 알코올 중독을 얻었고, 그는 재활원에 들어갔다. 결국 가정은 붕괴됐다.
중년에 찾아온 위기 앞에서 휘청거리다 그는 최근에야 결론을 내렸다.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아이들에게 돌아가려면 아이들이 가진 한국인 DNA를 내가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뿌리 찾기를 시작하는 겁니다.” 내년 그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50년 만에 마주하는 뿌리다.
■대를 잇는 입양 문제
루스(26) 씨는 해외 입양인 2세다. 루스의 아버지는 1974년 5살의 나이로 네덜란드에 입양이 됐다. 호텔에서 웨이터로 일하다 주방 일을 하던 어머니와 만나 결혼을 했고 루스와 여동생을 낳았다. 루스가 아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친다. 그의 성장기에 아버지는 없었다. 아버지는 첫딸 루스가 태어나면서부터 밖으로 돌았다. 출산 전 가정적이었던 아버지는 이후 도박중독에 빠졌다. “‘아버지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들었어요.”
3살이던 동생이 아파 응급실에 가야 했을 때 아버지는 카지노 안에 있었다. 이모부가 아버지를 꺼내 왔지만 아버지는 다시 카지노로 돌아갔다. 그해 부모님은 이혼했다. 이후 루스는 어머니와 살았다. 아버지와는 1년에 1번 생일에만 연락하는 게 전부다.
“짧은 대화마저도 여기저기 튀어서 정상적인 대화라고 할 수 없어요. 아버지의 산만함은 매년 더 심각해져서 부서진 사람과 말하는 느낌이에요.”
성인이 된 루스는 직접 입양인 커뮤니티를 찾아 들어갔다. 동양인의 다갈색 머리와 눈동자를 한 루스는 반쪽 한국인이었고, 스스로 한국인과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나와 닮은 부모가 세계를 보여주는데 아버지가 뿌리를 찾지 못하니 나도 뿌리를 갖지 못한 기분으로 살았다”며 “아버지는 직면하기를 피했지만 내 혼란을 다음 세대까지 가져가지 않으려면 내가 뿌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입양 문제는 대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암스테르담(네덜란드)/글·사진=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
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