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제2의 '보수 괴멸' 초래할 진짜 이유는
계엄 이후에도 국민 분노 외면하는 여권
“이재명만은 안 돼” 차기 권력에만 급급
탄핵 아닌 공감력 부재 제2의 괴멸 부를 것
충격과 공포가 휩쓴 ‘비상계엄의 밤’, 군과 경찰에 막힌 국회 앞에서 불 켜진 본회의장을 바라보면서 오직 한 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유혈사태만은 안 된다’. 혹여 총성이라도 울리면 어쩌나 싶어 극도로 마음을 졸였다. 놀란 가슴을 안고 그 곳에 모인 1000여 명의 시민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혼돈은 빠르게 정리됐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무모했던 계엄 세력들의 허술함, 불의한 명령에 동원됐음을 자각한 ‘MZ 군인’들의 성숙함, 여기에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며 추운 겨울밤을 지새운 시민들의 간절함이 만든 결과였다.
‘6시간’ 만에 사태는 종결됐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나라의 운명을 가를 고비가 수 차례 지나갔다. 만약 그날 용산 상공의 비행 허가가 빨리 떨어져 특전사 헬기가 40분 일찍 국회에 도착했다면, 경찰의 출입 봉쇄가 더 빨랐다면, 대치 과정에서 계엄군과 보좌진·당직자 간 유혈 충돌이 일어났다면…, 이 가정 중 하나라도 작동했다면 그 밤을 지새운 국민들은 그 이전과 전혀 다른 세상에서 아침을 맞이했을지 모른다.
분명히 해두자. 이건 ‘친위 쿠데타’다. 전시도, 사변도, 국가 비상사태도 아닌,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이 지속되던 평화롭던 밤에 대통령이 야당이, 반대 세력이 마음에 안 든다고 군을 동원했다. 대통령은 이번 계엄으로 과연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려 했을까. 국회에 진입한 계엄군들은 “의원들 모두 끌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 야당 중진들을 체포하려고 했다. 선거관리위원회 시설을 점령한 계엄군들은 부정선거 증거를 찾아다녔다. 정권에 비판적인 방송인과 시민활동가를 잡아들이려 했다. 부정선거를 기정사실화해 야당을 일거에 무력화하고, 비판 언론의 입을 틀어막아 정권의 입맛대로 권력을 휘두르려던 것 아닌가? 검열과 체포, 구금이 난무했던 군사정권 시대가 2024년 대한민국에 재연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하다.
대통령이 국정에서 즉시 손을 떼야 한다는 건 자명하다. 그러나 가장 빠른 길인 탄핵소추안은 국민의힘의 표결 불참으로 폐기됐다. ‘탄핵은 이재명에게 정권을 헌납하는 자폭 행위’라는 말이 모든 명분과 논리를 앞섰다. 15가지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이 대표가 의혹을 주렁주렁 몸에 단 채 재판과 대선의 시차를 이용해 손쉽게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는 건 누구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민주당이 이 대표 ‘방탄’을 위해 오랫동안 지켜왔던 입법·사법 시스템을 얼마나 흔들었는지 수 년 간 진저리 나게 지켜봤다.
그러나 비상계엄이라는 초대형 ‘자살폭탄’이 터진 이 시점에서 여당 인사들이 “이재명만은 안 돼”부터 외치는 건 염치가 없는 일이다. 계엄 이후 여당 내 반응을 보면 민심의 극한 분노가 좀체 와 닿지 않는 것 같다. “대통령이 오죽하면 그랬을까”라는 의원이 있는가 하면 “민주당이 얼마나 무도한지 제대로 알리지 못해서 발생한 일”이라며 울먹인 최고위원도 있었다. 오죽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아무리 미워도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 국민이 계엄 해제 표결만 초조하게 기다리는 그 밤, 국민의힘 당사에 머무른 50여명의 의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 긴박한 순간 ‘빨리 해제해야 한다’는 것 외에 어떤 고려가 필요했을까. 설마 윤 대통령의 망상이 이뤄진 세상에서 얻을 정치적 이익을 셈한 것일까. 그 정도로 바닥은 아니라고 보지만, 혹시라도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들었다면 ‘괴물’이 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봤으면 한다.
계엄 이후 여당 인사들은 한결같이 ‘탄핵 트라우마’를 주문처럼 되뇐다. ‘박근혜 탄핵’으로 보수가 괴멸됐다고 한다. 지금 비판 여론은 1년만 지나면 수그러들 것이라고 한다. 사실이 그렇더라도 이 시점에서 그런 얘기를 버젓이 할 수 있는 그 무신경이 무섭다. 이번 사태 이후 보수가 몰락하다면 그건 ‘이재명 때문’이 아니라 보수세력의 ‘공감력 제로’가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 탄핵 때문에 보수가 괴멸된 게 아니다. 국정농단 때문이었다. 이번 사태는 누구의 표현대로 국정농단보다 10배는 중한 일이다.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괴멸했다는 보수는 5년 만에 대선 승리로 부활했다. 민심은 가변적이고, 또 현명하다. 섣부른 정치공학으로 분노한 민심을 함부로 재단하려다 한 뼘 남은 보수의 존립 근거마저 상실할 수 있다. ‘탄핵=보수 괴멸’을 외치는 인사들의 진짜 걱정은 보수의 미래가 아니라 자신의 미래 아닌가.
지금 국민의힘이 집중해야 하는 건 하나다. 신속하게 윤 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완전히 손을 떼도록 하는 일이다. 다른 건 그 이후 얘기다. 윤 대통령의 어처구니없는 계엄 폭탄으로 여당은 이미 국민 마음 속에서 심판 됐다. 그 폐허 위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각오 없이 그 어떤 수습책도 그저 어설픈 권력 연장 시도일 뿐이다. 그러면 보수의 ‘2차 괴멸’은 예고된 수순이다.
전창훈 서울정치부장 jch@busan.com
전창훈 기자 jc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