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해뜰날’은 오는가
1975년 말 한국 대중가요는 국가권력에 의해 일거에 처형됐다. 이른바 연예계 대마초 사건. 가수들이 줄줄이 잡혀들어가고 음반사들은 영업 정지의 철퇴를 맞았다. ‘시끄럽고 불건전하다’는 록 음악이 대표적인 탄압 대상이었다. 잘 나가던 통기타 음악도 화를 피해 가지 못했다. 라디오와 TV의 음악 관련 프로들이 자취를 감춘 때도 그즈음이다. 사실상 대중음악의 뿌리가 흔들렸고 가요계는 사상 최악의 공백기에 빠진다.
이 무주공산에 극적인 입성을 알린 가수가 바로 송대관이다.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1975년에 나온 ‘해뜰날’의 주인공이다. 그는 이미 데뷔 8년 차의 중고 신인, 그러나 배고픈 무명 가수였다.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신문 배달, 이발사 보조 같은 일로 힘겹게 보낸 청소년기를 어찌 잊을 수 있나. 그에게 노래는 고달픈 삶을 희망으로 바꾸려는 자기최면과 같았다. 청년의 희망가는 결국 산업화 시대 온 국민의 희망가가 된다. 같은 앨범에 실린 ‘세월이 약이겠지요’도 동반 히트. 바느질로 가족을 부양하다 병을 얻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만든 애달픈 심사가 듣는 이를 울렸다. 그렇게 그는 1976년 말 MBC 10대 가수 시상식에서 ‘가수왕’으로 우뚝 선다.
‘해뜰날’의 에피소드는 여럿이다. 무명 시절 송대관은 어느 날 느닷없는 영감에 휩싸여 아무 종이에 미친 듯 가사를 썼다고 한다. ‘운명아 비켜라 내가 나간다/ 떠도는 놈이라고 괄시를 말아라.’ 원래의 가사가 너무 거칠다는 심의를 받고 가사 일부를 수정해야 하는 아픔도 겪는다. 다른 한편으로, 유신정권이 발탁한 노래였다는 시각도 있다. “하면 된다!” 순종과 근면을 강요하는 체제 선전 이데올로기와 관련 있다는 것.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그래, 노래는 이렇게 신이 나야지”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카더라’ 통신이다.
미국 밴드의 ‘해뜰날’ 표절 의혹에 관한 일화도 유명하다. 제이 가일스 밴드의 1982년 빌보드 1위 곡 ‘센터폴드’ 첫대목을 들으면 ‘해뜰날’의 멜로디와 영판 똑같다. 표절 여부는 가려지지 않았다.
고인이 된 가수 송대관이 9일 영결식을 끝으로 세상과의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국민가요 ‘해뜰날’이 나온 지 꼭 50년 만이다. 가수는 가도 노래는 남는다. 위로의 메시지로 대중의 마음을 다독인 ‘해뜰날’의 상징성 역시 영원하다. 미래의 희망을 찾아 ‘해뜰날’을 꿈꾸는 삶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날은 오고 있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