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재현한 신비로운 색선… 22일까지 맥화랑 강혜은 전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물감 직접 짜서 형태 표현
층층이 쌓여 입체 회화 탄생
경지 이른 대가 신작 반가워

강혜은 ‘Line-piece 2510’. 맥화랑 제공 강혜은 ‘Line-piece 2510’. 맥화랑 제공

“이 작품은 재료가 뭘까요? 실인가요? 물감은 아닌 것 같아서요.”

부산 해운대구 달맞이로 맥화랑에서 진행 중인 강혜은 작가 개인전. 강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는 갤러리뿐만 아니라 아트페어에서도 강 작가 작품을 두고 자주 나오는 질문이다. 언뜻 봐서는 실인지 물감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사실 작품 아래 ‘유화 물감’이라는 답이 버젓이 쓰여 있지만, 많은 사람이 이 같은 질문을 할 정도로 작가의 표현 기법은 특별하다.

강혜은 ‘Line-piece 2518’. 맥화랑 제공 강혜은 ‘Line-piece 2518’. 맥화랑 제공

작가는 10년의 시행착오 끝에 물감에서 실을 뽑아내는 기법을 완성했다. 마치 누에가 실을 뽑아 옷감을 만드는 것처럼, 작가가 만든 작은 주머니에 물감을 넣고 아주 작은 바늘로 구멍을 낸 후 손아귀의 힘으로 물감 선을 뽑아낸다. 실처럼 가늘고 긴 색선들이 층층이 쌓이고 겹쳐 화면을 가득 채운다. 선들이 쌓여가며 전체적인 색감이 조화되고 작가가 원하는 형태가 나온다. 가까이서 보면 수많은 색선이 중첩된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작품에서 멀어지면 연못, 산, 숲 등 자연 풍경이 드러난다. 평면의 캔버스지만 전체적으로 입체감이 느껴져 강혜은 작가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풍경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강혜은 ‘Line-piece 2514+2515’. 맥화랑 제공 강혜은 ‘Line-piece 2514+2515’. 맥화랑 제공

작가에게 나만 할 수 있는 표현 기법과 형태가 있다는 건 큰 축복이자 강력한 무기가 된다. 많은 작가가 평생 갖지 못할 수도 있다. 강 작가에게 이 같은 축복이 온 건 오랜 삶의 애환, 남들이 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1956년생 강혜은 작가는 서울로 대학을 가기 전 부산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서면에서 큰 의상실을 운영했고 옷을 만드는 어머니 옆에서 아주 어릴 때부터 실과 천을 가지고 놀았다. 작가에게 실과 천은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였고, 나이 70을 바라보는 지금도 여전히 실과 천을 만지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실처럼 느껴지는 작가의 기법은 아마도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강혜은 ‘Line-piece 2512+2513’. 맥화랑 제공 강혜은 ‘Line-piece 2512+2513’. 맥화랑 제공

서울의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신의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던 강 작가에게 인생의 큰 변화가 생긴다. 1세대 환경운동가 남편을 만나 도시와 뚝 떨어진 오지 산골에 살게 된 것이다. 집 앞으로 야생동물이 지나고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얼면 한참을 고생해야 했다. 도시 여자 강 작가에게 오지 생활은 눈물의 연속이었다. 모든 것이 갖춰진 도시와 달리 모든 걸 직접 해결하며 살림을 하며 아이를 키웠다. 낯설고 무섭고 힘든 그 생활을 버티게 해 준 건 그림이었다. 허름한 창고를 작업실 삼아 매일 밤 10시부터 새벽까지 그림에 매달렸다. 작가는 20년의 세월을 무림 산중에서 자연의 일부로 살아왔다.

강혜은 작가 전시 포스터. 맥화랑 제공 강혜은 작가 전시 포스터. 맥화랑 제공

“매일 밤 작업실에 있으면 산짐승 소리가 들려요. 어떤 동물이구나 다 알게 되죠. 시간에 따라 계절에 따라 자연이 얼마나 다양한 옷으로 갈아입는지 20년을 봤으니까요. 그래서 제 그림에는 자연의 빛과 소리, 향기와 습도까지 다 느낄 수 있어요.”

강혜은의 풍경은 기법도 특별하지만, 자연과 하나 된 작가 자체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남편이 자연으로 영영 떠나며 강 작가의 산골 생활은 막 내렸지만, 작가는 캔버스 위 자연을 그리며 여전히 자연 속에서 살고 있다.

물감을 짜내는 기법 탓에 작가의 손은 마디마다 휘었고 관절도 성한 곳이 없다. 직접 물감을 짜기 때문에 캔버스를 세워 작업할 수가 없다. 항상 캔버스를 눕힌 채 허리를 숙여 손으로 물감을 흩뿌린다. 작가의 작업을 본 미술 관계자들은 “무아지경에 빠져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해 물감을 뿌리고 있는 작가를 보면 마치 신내림을 받아 춤추는 무녀와 같다”고 표현한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허리를 구부린 채 원하는 두께의 색선을 정확히 원하는 위치에 떨구는 건 일종의 수련이자 고행이다.


강혜은 작가. 맥화랑 제공 강혜은 작가. 맥화랑 제공

“힘들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어요. 시골 살 때는 밤새 작업을 한 후 새벽녘 잠깐 자러 가면, 그사이 천장에서 지네랑 구더기가 떨어져 작품이 엉망이 된 적이 많아요. 근데 그림 그리는 그 자체가 행복했기 때문에 또 새롭게 시작했죠.”

이번 전시에선 구상의 형태를 무너뜨리며 색과 형태에서 좀 더 자유로워진 신작들이 많이 나왔다. 경지에 도달한 대가의 다음 단계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미술 팬이라면 꼭 가봐야 할 것 같다. 이 전시는 오는 22일까지 열린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