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열화와 굴욕의 시대, 어떻게 자아를 지킬 것인가
신간 <콘텐츠자본의 시대>
세태를 바꾸는 힘 가진 콘텐츠
스스로 창조하고 즐길 수 있어야
저출생·지역소멸의 해법 될 수도
‘바보 상자’라 불리던 텔레비전의 시대는 갔다. 이제는 ‘손 안의 스펙타클’ 스마트폰의 시대다. 바보 상자에서 벗어난 우리는 과연 더 ‘스마트’해졌을까.
<콘텐츠자본의 시대-그리고 인간과 비인간의 공생>은 콘텐츠가 바꾸고 있는 세태를 조목조목 짚는다. 강원대 영상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콘텐츠 리터러시(문해력)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좋은 콘텐츠를 즐기고 만드는 능력이 중요한 자본이 됐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욕구란 건 무의식의 영역이라 소비자 스스로도 자신의 욕망이 뭔지 잘 모른다. 당장 오늘의 점심 메뉴조차 고르기 어려운 것이 현대인 아닌가. 소비자의 욕망이 모호하다 보니, 역설적으로 콘텐츠산업에 있어서는 생산자의 자율성이 크게 보장된다. 제조 상품과 달리 콘텐츠에 대해 소비자는 소소한 결점이나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다. 속된 말로 재밌으면 ‘장땡’이다.
저자는 지난해 1000만 관객을 달성한 영화 ‘파묘’의 흥행을 예로 든다. 창작자들도 이 영화가 이렇게까지 흥행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소수 마니아에게만 통할 줄 알았던 오컬트 장르의 특성 탓에 감독은 오히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화끈한 영화 하나를 만들고자 했고, 그걸 끝까지 밀어붙인 것이 오히려 대중에게 통했다는 것이다.
반면, 통속·막장 드라마처럼 사회적 통념을 재생산하는 콘텐츠는 기존 권력과 위계를 강화한다. 거기서 배제된 집단에게 부러움과 질투의 감정을 끊임 없이 주입한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게 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기 어렵게 만든다. 저자는 이런 콘텐츠를 ‘제1 콘텐츠’라고 한다. 이런 ‘상향비교’ 대신 자신을 객관화하고, 자아를 확대할 수 있게 하는 콘텐츠는 ‘제2 콘텐츠’로 분류한다. 이 둘을 구분하고 선택하는 능력이 문해력의 새로운 요소로 떠올랐다.
대단한 자산이나 학력 없이 시골 동네에서 자란 사람도 음악 하나로 세계적 스타가 되고 제2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 예전에 비틀즈가 그랬고, 지금은 테일러 스위프트 같은 아티스트가 그렇다. 그는 스타가 되고 난 뒤에도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는 건물주’에 두지 않는다. 스위프트는 서열과 굴욕감의 시대에, 자신을 닮고 싶어하는 대중에게 자신의 세계와 자아를 어떻게 보호하는지 몸소 보여준다. 악플에도 의연하고 자존감을 잃지 않는다. 그는 “인터넷의 칭찬에 의존해서 자존감을 달래는 일이 적을수록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바로 세 줄만 내려가도 ‘트럭이 치고 지나간 족제비를 술 취한 박제사가 다시 꿰매 붙인 것 같은 면상을 한 X’이란 댓글을 보게 되는 상황에선”이라고 일갈한다.
게임 콘텐츠에 대한 고정관념을 꼬집기도 한다. 11년 동안 운둔형 외톨이로 살아온 ‘하나 씨’의 사례를 들어 오히려 게임을 통해 사람과 관계 맺는 법을 배우기도 하고 세상으로 나올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게임이 폐인을 양산할지,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 치료 수단이 될지 역시 콘텐츠 리터러시에 달린 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게임을 통해 주의 기능을 개선하도록 개발된 FDA(미국 식품의약국) 승인 ADHD 치료 게임도 있다. 기성세대는 요즘 젊은이들이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다고 걱정하는데, 어쩌면 그들은 방구석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유사 이래 가장 활발한 소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저출생과 수도권 집중의 해법을 콘텐츠산업에서 찾기도 한다. 취준생들이 가장 근무하고 싶은 곳으로 꼽히는 판교의 사례를 들어 20대 여성, 청년들이 선호하는 콘텐츠·IT 업종을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반도체산업의 취업유발계수가 2.1명 정도인 반면, 콘텐츠산업의 취업유발계수는 14명으로 약 7배에 달한다는 통계도 제시한다. ‘워라밸’과 근무 유연성, 탈권위주의적 조직 문화가 ‘괜찮은 일자리’의 기준이 된 만큼 청년의 지역 이탈을 막기 위해선 도시의 분위기도 이렇게 바꿔가야 한다. 제조업 전통의 가부장적 기업 문화가 남아있는 도시, 부산이 참고할 만한 대목이기도 하다. 유승호 지음/ 따비/ 304쪽/ 2만 원.
이자영 기자 2you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