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달식의 일필일침] "성찰하라" 헌재의 죽비
헌재,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선고 때
대통령과 국회에 ‘대화와 협치’ 등 강조
정치권 이런 충고에 귀 기울이지 않아
6월 3일 대통령 선거 중요 이슈 있어도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 꼭 가져야
기회 놓치면, 한국 정치 회복 요원해져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명 전원 일치로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했다. 이날 헌재는 윤 대통령의 잘못에 대해 엄중하게 책임을 묻는 동시에, 정치권을 향해 죽비를 내리쳤다. 헌재는 파면 선고와 함께 “대통령은 국회를 협치 대상으로 존중하고, 국회는 정부와의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헌재의 윤 대통령 탄핵 선고 결정 요지에는 비상계엄에 이르게 된 과정과 관련해 ‘그럼에도 정치로 풀었어야 했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담겨 있다. 국회에 대해서는 ‘소수 의견을 존중하고 정부와의 관계에서 관용과 자제를 전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결론을 도출했어야 한다’고 했다. 국회를 지칭했지만 거대 야당을 향해 협상과 타협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 말을 강조했을까? 헌재는 대통령에게 파면이라는 강력한 결정을 내렸지만, 국가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정치권의 대화와 협력, 즉 소통의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헌재는 대통령과 국회의 권한과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양측의 협력 부족이 ‘대한민국호의 위기’에 영향을 미쳤음을 지적한 셈이다.
헌재의 충고는 시의적절했다.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권이 깊이 새겨야 할 중요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헌재의 탄핵 선고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다소 엇갈리지만, 적어도 이 충고만큼은 대체로 적절했다는 평가가 많다. 그러나 정치권은 헌재의 이런 충고에 귀 기울이지 않는 듯하다. 다가오는 6월 3일 대통령 선거라는 중요한 이슈에 집중하느라, 헌재의 충고를 되새길 여유조차 없어 보인다. 오히려 종교계 일각에서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통해 대의민주주의를 복원하자”, “정치권은 갈라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회복하기 위해 진정성 있는 사과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올 뿐이다.
현재 정치권에서는 대화와 타협, 그리고 존중이라는 말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념과 정파적 입장만을 고수할 뿐, 소통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협력보다 자신들의 정치적 승리에 더 집중하는 것 같다.’ 이는 다수 국민이 우리 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이기도 하다. 특히 이념 중심의 극단적인 대립은 정치적 합의를 어렵게 만들고, 국민에게 분열과 갈등을 안겨주고 있다. 물론 정치인들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민주주의의 건강한 모습이다. 하지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소통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결국 갈등과 분열로 치닫게 될 뿐이다. 헌재는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대통령과 국회, 양측 모두에게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省察)의 시간을 요구한 것이다.
성찰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내면을 탐색하지만, 반드시 개인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흔히 “나는 나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이에 대해 “나는 나지만, 나 아닌 것도 나다”라고 답한다. ‘나’라는 존재는 ‘나 아닌 것’이 있어야 비로소 성립하기 때문이다. 밖이 없다면 안도 없고, 안이 없으면 밖도 없는 이치다. 이 개념을 정치에 적용해 보면, 국민의힘은 더불어민주당이 있기에 존재감을 갖고, 민주당 역시 국힘이 있어야 존재감을 갖는 것이다. 일찍이 장자는 “모든 사물을 봄과 같은 따뜻한 마음으로 포용하라(與物爲春)”고 말한 바 있다. 〈장자〉의 덕충부 편에는 “마음이 조화롭고 즐거워 타자와 연결되며, 그 즐거움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밤낮으로 끊임없이 타자와 더불어 ‘봄’이 되도록 해야 한다”라고 했다. 여기서 ‘봄’은 타인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공존의 상태를 말한다. 정치권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우리의 정치는 아직 상대를 존중하고 협력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이 나라를 이끌어갈 정치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지금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선이 끝나면 성찰할 타이밍도 놓치게 된다. 정치권이 진정으로 변화하고자 한다면, 지금이 바로 자기 성찰을 통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할 때다. 성찰 없이 대선에 임하고, 이념에 치우친 정치적 대립만을 반복한다면 이 나라는 또다시 슬픈 정치의 역사를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지나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친다면, 한국 정치의 회복은 한층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세종실록〉에는 성군 세종대왕조차 “잘못해서 후회한다”고 말한 기록이 10차례 이상 나온다. 그러나 세종은 단순한 후회에 그치지 않고, 철저한 자기 반성을 통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 정치권에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성찰의 자세다. 공자는 말했다. “잘못을 저지르고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짜 잘못이다(過而不改 是謂過矣)”라고. 제발 정치권이 반성의 시간을 갖고 과거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진정한 협치와 상생의 길을 걸어가길 바란다. 그게 대한민국이 사는 길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