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화의 크로노토프] 예술가의 상상력과 첨단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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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음악 칼럼니스트

벚꽃 망울이 터지기 시작하던 어느 봄날, 음대 출신이지만 이제는 공대 교수가 다 되어버린 벗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그는 마침 출시도 안 된 앱을 테스트 중이었다. 반가운 얼굴은 잠시였고, 생전 처음 보는 고가의 VR(가상현실) 기기를 바로 착용시켜 주었다. 순간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은 단순한 기술 체험이 아니라, 공간을 가르며 살아 움직이는 듯한 기적 같았다.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음악을 ‘보았다’. 이는 단순히 신기한 경험을 넘어 공연예술의 패러다임이 흔들리는 전환의 순간이었다. 악기 사이를 거닐면서 감각 그 자체로 음악을 느끼는 새로운 형태의 무대였다. VR 현장에서 느낀 진동, 위치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음향의 밀도, 연주자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긴장감은 전통적인 콘서트홀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던 입체적인 몰입을 선사했다.

포스텍 AI·확장현실 콘텐츠 수업 활용

부산 대학 예술과 기술 접목 교육 절실

과감한 실험으로 혁신적 미래 만들어야

클래식 음악은 기술 도입에 있어 가장 보수적인 예술 분야 중 하나다. 시각예술이나 다른 공연예술이 첨단 IT 기술을 통해 새로운 형식을 빠르게 실험하는 동안, 클래식 음악은 오랫동안 기존의 창작·재현 방식을 주로 선호했다. 시각예술에서는 미디어파사드가 이미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클래식 장르도 더 이상 수동적인 음악 감상 형식이라는 전통적인 공연 방식에만 머무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몰입형 체험은 그 가능성을 여실히 증명했다. 관객이 객석에 앉아 공연을 경험하는 수동적인 감상자가 아니라, 공연 내부로 직접 들어가 자신만의 시선과 위치에 따라 감각을 재구성하는 상호작용의 주체가 되게 하였다.

공간 음향 시스템은 연주자의 위치에 따라 음향의 밀도를 조정하여, 실제 공연장에서 연주자 바로 옆에 있는 듯한 감각을 제공한다. 관객은 공연 중에 인터랙티브 컨트롤을 통해 다양한 시점과 지점으로 이동하며, 각 악기의 음향을 360도로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시각적 몰입을 넘어 청각적 요소까지 공연의 일부로 만드는 혁신적 기술이다. 2019년부터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협업한 도이칠란트의 사운드 디자이너 헨리크 오퍼만은 해당 프로젝트에서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었다. 기존 VR 공연과는 차별화하여 관객이 능동적으로 공연을 감상할 수 있게 설계했다.

이 콘텐츠는 예술가의 상상력에서 나왔다. 바이올리니스트 팀 서머스가 자신이 연주할 때 느끼는 몰입감을 관객도 연주자처럼 직접 듣고 경험할 수 있게 신박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포스텍은 이러한 몰입형 체험을 교양 음악 수업에 도입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음악대학도 없는 공과대학에서 양은영 교수가 AI와 XR(확장현실) 기술을 활용한 교육콘텐츠를 4년 전부터 직접 제작해 강의에 활용하고 있었다. 메타버시티 교육추진단장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포스텍의 과감하고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라고 한다.

김석준 교육감은 다수의 언론 인터뷰에서 AI를 활용한 교육을 강조했다. 예술교육에도 AI를 도입한다면 학생 수준에 맞게 상호작용이 가능한 창의적인 음악 감상, 연주, 창작 교육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이 감각을 다듬는 일이라면, 기술은 그 감각을 새로운 방향으로 확장하는 언어가 된다. 부산이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일상과 공교육으로 끌어들여 실현하는 첫걸음을 내딛는다면, 그 가능성을 가장 먼저 창조하는 풍요로운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해양수도 부산은 새로운 클래식 전용극장을 갖춰가고 있다. 하지만 첨단 기술을 이해하고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융합형 전문가 양성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이제는 교육과 예술 그리고 기술을 연결하는 중간 지대가 절실하다. 지금이라도 지역 예술대학이 학과 간 협력으로 아트 & 테크놀로지 과정을 운영한다면, 대학 교육도 창의적 감각 중심으로 재편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관련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다. 예술 관련 학과 교육이 AI 기반 교육 시스템과 연계되어야 한다. 실감형 콘텐츠의 제작과 실습을 위한 제도적 지원이 여느 때보다 절실하다.

창의적인 생각이 예술을 만든다. 창의적인 기술도 예술이 걸어갈 다음 차원을 뒷받침하는 문을 열어준다. 기술은 이제 단순한 도구를 넘어 감각의 경계를 확장하고 인식을 바꾸는 새로운 언어다. 그 언어를 가장 먼저 익히고 구현하는 예술 도시야말로 내일의 문화 중심지가 될 것이다. 미래는 ‘모방의 시대’를 벗어나 먼저 경험하고 과감히 실험하는 도시만이 창조적인 흐름에서 앞장설 수 있다. 아울러 지속적이고 혁신적인 지원은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새로운 감각의 장이 될 것이다. ‘21세기 크로노토프’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그 문을 누군가 먼저 열고 당당히 나가는 일만 남았다.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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