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금, 국채, 화폐, 코인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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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가치의 교환에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은 금이었다. 하지만 전쟁과 같은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는 사태가 빈발하자 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어려워 하는 국가가 등장했다. 이런 국가를 대상으로 금융업자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화폐를 개발하기에 이른다.

대표적인 것이 1680년대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던 영국이 전쟁자금 마련을 위해 금융업자들에게 손을 벌리면서 만들어진 화폐다. 금융업자들은 당시 국왕에게 자신들이 가진 금을 기반으로 120만 파운드를 빌려주고는 국채를 받았다. 그들은 이자 외에는 영원히 원금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으로 국채 만큼 화폐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 처음엔 원금 상환을 안 해도 된다고 좋아하던 영국 정부는 곧 채무를 더 늘릴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화폐의 본격 유통으로 확립되기 시작한 금융자본주의 하에서 화폐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결국 영국 정부는 화폐를 늘리기 위해 은행에 더 많은 국채를 넘겨야 했다. 그렇게 현대까지 지속된 거래로 인해 영국 정부가 중앙은행에 진 채무는 수천억 파운드에 이른다. 20세기 초 태동한 미국의 연방준비제도 역시 미국 정부의 국채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달러화를 발행하고 있다.

이처럼 국채에 올라탄 화폐는 최근에 이르러서는 디지털로 모습을 바꿔 새로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 주도로 확산하고 있는 스테이블코인이다.

지난 18일 트럼프 미 대통령이 서명한 ‘지니어스 법안’은 민간의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 틀 안으로 가져왔다는 점에서 영국 국왕이 금융업자들에게 허용한 화폐와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법안의 핵심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발행액만큼 달러나 국채의 예치를 의무화한 것이다. 사실상 미국 정부는 국채에 방점을 두고 있으며 국채 이자를 줄이기 위해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의 국채 매입 능력에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테더(USDT)나 서클(USDC) 같은 발행사들도 이에 호응하듯 화폐 발행액의 80% 수준까지 미국 국채 매입을 늘릴 태세다.

금융기관에 국채를 넘기고 화폐를 발행하도록 해 줌으로써 정부가 예산을 확보하는 방식은 17세기 영국의 사례와 일치한다. 스테이블코인은 유통 화폐에 해당하고 금융업자 소유의 실물 달러는 실물 금에 해당할 뿐이다. 영국에서 국채를 매입하던 은행은 나중에 중앙은행이 됐다. 미국 코인 발행사는 어떻게 진화할지가 궁금하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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