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소환된 '캐런' [키워드로 트렌드 읽기]
'필리스 캐런' 사건이 일어난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마이애미 말린스의 경기 당시 중계화면. 엑스 갈무리
지난 5일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에서 벌어진 미국판 '아주라(아이 줘라) 사건'이 뜻밖의 단어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당시 관중석으로 날아온 홈런볼을 한 중년 남성이 경쟁을 뚫고 먼저 잡아 아들의 글러브에 공을 넣어줬는데, 갑자기 근처에 있던 한 중년 여성이 그들에게 다가와 "그 공은 내 거였어"라며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격렬한 항의에 당황한 남성은 공을 글러브에서 꺼내 '더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는 손짓과 함께 다시 여성에게 넘겨줬다. 하지만 사실상 공을 강탈당한 아이 얼굴에는 실망한 모습이 역력했고,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자리로 간 여성을 향해 주변에서는 야유를 쏟아냈다.
관중석에 떨어진 공을 주운 어른들이 자발적으로 어린이를 위해 건네주던 사직구장의 '아주라' 문화가 미국 야구장에서도 너무나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매너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상황을 알아챈 홈팀 마이애미 말린스의 여성 구단 직원이 공을 뺏긴 아이를 위한 기념품 꾸러미를 챙겨와 전달하면서 관중들로부터 뜨거운 지지의 박수를 받았다. 여기에 이들 가족이 응원을 왔던 방문팀 필라델피아 필리스 구단도 경기 후 홈런을 친 선수와의 만남을 주선해 사인 배트를 선물하며 훈훈한 결말을 맞았다. 반면 당시 생중계 영상이 소셜미디어에서도 확산되면서 억지로 공을 가져간 여성은 자신이 입었던 유니폼과 묶여 '필리스 캐런'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 구단 공식 SNS
여기서 '캐런(Karen)'은 2000년대 초반부터 사용되기 시작해 2020년 인종차별 사건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진 용어다.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백인 중년 여성을 상징하는 말로, 단순히 개인의 성격을 조롱하는 수준을 넘어 특권의식에 기반한 사회적 갑질을 상징하는 개념이 됐다. 특히 자신을 피해자로 포장하면서도 타인에 대한 공감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으로 꼽힌다. 이 '필리스 캐런' 백인 여성 역시 자신의 욕구를 위해 상대적 약자의 기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모습, 공을 직접 잡지 못했음에도 타인에게 소리 지르며 위협하는 공격성이 지적됐다. 거기에 야구장에서 홈런볼을 아이에게 주는 불문율을 무시한 점이 미국 내 여론의 큰 공분을 샀다.
일각에서는 '캐런'이라는 표현이 인종차별주의를 비판하려는 목적에서 벗어나 여성 혐오의 포괄적 용어로 변질됐다는 비판도 받는다. 다만 최근에는 정치적, 사회적 강자를 향한 풍자에 쓰이는 사례도 종종 목격된다. 공교롭게도 미국 조지아주에서 한국인 300여 명의 구금을 초래한 지역 정치인 역시 "기분이 좋다"며 영상을 올려 자랑했는데, 타인의 삶을 파괴하고도 당당한 '캐런'이라는 비난을 듣자 이를 삭제하기도 했다.
당시 홈런을 친 필라델피아 필리스 선수인 해리슨 베이더. AFP연합뉴스
성규환 부산닷컴 기자 bastio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