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10만 달러 비자
미국 비자 발급 절차는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비자 인터뷰 노하우를 전하는 글과 동영상이 인터넷에 넘쳐난다. 미국 조지아주에 첨단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한국에서 건너간 전문 기술 인력들이 지난 4일 이민 단속 요원들에 의해 쇠사슬에 묶여 구금되는 일이 발생한 것도 비자 때문이었다. 전문 기술을 보유한 외국인이 미국에서 일하려면 비이민 전문직 취업 비자인 ‘H-1B’ 또는 주재원·투자자비자(L1·E1·E2) 등을 받아야 하는데 재수, 삼수를 해도 발급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 기술 인력들은 전자여행허가제(ESTA) 승인을 받아 미국에 입국해 70~80일 정도 일한 뒤 귀국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미국을 위해 현지 공장을 짓는데도 비자를 내주지 않는 것은 물론 인권을 유린하는 일까지 발생하면서 미국 비자 제도 개선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H-1B’ 비자에 매년 10만 달러(약 1억 4000만 원)의 수수료를 부과한다고 지난 19일 밝혔다. 기존 1000달러(약 140만 원)에서 100배 인상한 것이다. 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 전문 직종의 외국인이 ‘H-1B’ 비자를 받으면 미국 기업에서 최대 6년간 근무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H-1B’ 비자 수수료는 해당 외국인 인재 채용을 원하는 미국 기업들이 부담한다. 2014~2023년 ‘H-1B’ 비자를 받아 미국 실리콘밸리 등으로 건너간 AI·반도체 분야 등의 한국인 핵심 인재는 총 2만 168명에 달한다.
문제는 과도한 수수료로 인한 파장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1명이 해마다 6년간 부담해야 할 총 수수료는 60만 달러(8억 4000만 원)에 이른다. 발표 직후 미국 기업들이 패닉에 빠지자 백악관은 하루 뒤인 20일 해마다 내는 수수료가 아니라 비자 신청 때 일회성으로 부과하는 수수료라며 입장을 번복했다. 번복에도 불구하고 10만 달러는 너무 비현실적인 수수료라는 반발이 잇따른다. 한국에서도 100배나 오른 ‘H-1B’ 비자 수수료 부담과 오락가락하는 미국 비자 정책에 대한 불신 때문에 핵심 기술 인력들의 미국행이 주춤할 것이라는 분석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기회일 수 있다. 해외로 유출되는 한국 핵심 인재들을 국내로 영입할 좋은 환경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의 코미디 같은 ‘10만 달러짜리 비자’ 사태가 한국의 국가 기술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