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션 뷰] 컨테이너 해운, 제2의 '보릿고개'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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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혁 부산항만공사 국제물류지원실장

무역량 요동 운송 수요 줄면 운임 하락
전 세계 단일 시장 경쟁 선사 퇴출 예사
2014~2018년 인수·합병 절반 사라져
선복량 크게 늘어 수요·공급 주시해야

어릴 적 교과서에서 접했던 단어 가운데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보릿고개’라는 말이다. 직접 겪어 본 세대는 아니지만, 그 말은 곡식이 떨어지고 보리가 여물기 전까지 허기를 참아야 했던 농촌의 절박한 시간을 상징한다. 글로벌 컨테이너 해운업계에도 자신들만의 보릿고개가 있었다. 필자가 보기엔 2014년부터 2018년까지의 5년이 그 시기다. 이 기간 전 세계에 20개 가까이 있던 글로벌 컨테이너 선사 중 절반이 시장에서 사라졌다.

구체적으로 보면, 2014~2015년 칠레 선사 CSAV와 CCNI는 각각 독일 하파그로이드와 함부르크수드에 인수됐다. 2016년엔 중국 차이나쉬핑이 코스코와 합병했고, 싱가포르 APL은 프랑스 CMA CGM에, 한국의 한진해운은 파산했다. 2017년에는 홍콩 OOCL이 중국 코스코에, 아랍에미리트 UASC는 하파그로이드에 합쳐졌다. 함부르크수드도 덴마크 머스크에 흡수됐다. 이어 2018년 일본의 K-Line, MOL, NYK의 컨테이너 부문만 합쳐 ONE가 탄생했다.

그 결과 상위 10대 선사의 시장 점유율은 과거 65%에서 85%로 뛰었다. 구조 조정과 합종연횡의 소용돌이 속에서 몸집을 키운 자만 살아남을 수 있는 냉혹한 경쟁의 장으로 재편된 것이다.

왜 이런 보릿고개가 왔을까? 가장 큰 원인은 원가에도 못 미치는 낮은 운임이었다. 해상 운임은 수요와 공급으로 결정된다. 수요는 교역에서 비롯되는 화물 운송량, 공급은 전 세계 컨테이너 선박의 선복량이다.

먼저 수요 측면을 보면,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세계 해상 컨테이너 운송량이 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하기까지 지역별 편차는 있었지만 약 4~5년이 걸렸다. 그러나 회복 이후에도 이전과 같은 급격한 경제 성장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 결과 해상 운송 수요는 전반적으로 부진했다.

반대로 공급 측면에서는 상황이 정반대였다. 2001년 중국의 WTO 가입은 국제무역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고, 그 열매를 누린 컨테이너 선사들은 2008년 금융 위기 직전까지 호황을 만끽했다. 당시 쌓아둔 현금으로 선사들은 그해 무려 600만TEU에 달하는 신조선을 발주했는데, 이는 당시 전 세계 선복량(1100만TEU)의 60%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문제는 이 선박들이 3~5년 후 순차적으로 시장에 투입되면서 2013년부터 수요 대비 공급이 과도하게 늘어나 해상 운임은 곤두박칠쳤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해운업계의 보릿고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후 상황은 역설적으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2020년 팬데믹은 북미 소비 수요의 폭발적 증가를 불러왔고, 해상 운송 수요도 급증했다. 덴마크의 해운 조사 분석 기관 씨인텔리전스에 따르면, 팬데믹 2년 6개월 동안 컨테이너 선사들이 벌어들인 이익은 그 이전 60여 년간의 누적 이익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고 한다. 사상 유례없는 호황이었고, 선사들은 다시 대규모 신조 발주에 나섰다.

그 여파로 2023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연간 인도 선복량이 230만TEU(약 360척)를 넘어섰고, 2024년에는 300만TEU(약 480척)에 육박했다. 2027년 310만TEU, 2028년에는 380만TEU가 발주 선사에 인도될 전망이다. 이 때문에 현재 한국 조선소는 향후 3~4년 치의 일감은 확보된 것으로 보도되고 있으며, 시장에는 막대한 공급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업계 일각에서는 이를 ‘묻지 마 발주’라고 비판하며 스스로 무덤을 판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그러나 컨테이너 해운은 규모의 경제가 절대적인 자본집약적 산업이다. 다른 선사가 몸집을 키우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다가는 해운동맹 내에서 협상력이 떨어지고, 시장 점유율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또 경쟁사 신조계약으로 조선소 도크가 차면 발주가 어려워 내가 원하는 선박 인도 시점을 놓치게 된다.

다만 지금은 많은 글로벌 선사들이 팬데믹 호황기에 쌓아 둔 현금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어, 과거와 같은 심각한 수준의 보릿고개가 재현될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현재 전 세계 컨테이너 선복량은 3300만TEU로 2008년 당시의 세 배에 이르며, 여기에 이미 발주된 900만TEU가 추가될 예정이라는 점이다.

해운업은 전 세계를 단일 시장으로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자유시장 체제다. 과거 보릿고개 시절 수많은 선사가 시장 논리에 의해 쓰러져 갔듯, 앞으로도 선사의 운명은 세계경제의 흐름과 해상운임의 향방에 달려 있다.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세계경제가 다시 활황을 맞아 해상 운임이 상승할 때, 화주들이 선사들의 수익을 단순히 ‘바가지’로만 보지 않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버텨낸 이들의 존재를 조금은 너그럽게 바라봐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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