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마 아프 클린트를 소환하며] 완결에 실패한 화면인가? 형식에 대한 실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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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대한 화가라는 말 앞에서

'추상화의 선구자'로 꼽히지만
기존 미술사적 범주 맞지 않아
"미완의 실험" 평가절하 시선도

힐마 아프 클린트의 초상. 힐마 아프 클린트 재단 제공 힐마 아프 클린트의 초상. 힐마 아프 클린트 재단 제공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7월 19일~10월 26일)은 오랜 기간 잊혔던 한 화가의 이름을 다시 불러내는 자리다. 총 3회의 연재를 통해 힐마 아프 클린트라는 인물이 왜 지금 다시 이야기되어야 하는지를 차근히 짚어 보려 한다.

힐마 아프 클린트(1852~1944)는 스웨덴 출신의 화가로 지금은 추상화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의 회화가 처음으로 주목받았을 때 비평가들은 대체로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하나는 그를 추상의 선구자로 부각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회화를 미완의 실험이나 신비주의적 표상으로 간주하는 의견이었다. 전자는 그를 칸딘스키와 같은 계보 속에 세우려는 시도였으며, 후자는 그 계보에서 탈주한 주변적 사례로 보려는 태도였다. 이 양극의 평가가 공존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회화는 기존의 미술사적 범주에 쉽게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회화는 언제나 형식과 감각의 정확성을 요구해 왔다. 색과 선은 일정한 긴장을 통해 화면을 구성하며, 그 긴장 속에서 회화적 평면이 형성된다. 그러나 힐마 아프 클린트의 화면에는 종종 이 긴장이 희미하게 느껴진다. 반복되는 형태와 상징적 기호는 논리적 구성을 압도하지 않고 느슨하게 떠다니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특성이 일부 비평가로 하여금 그의 작업을 조형적 미성숙의 사례로 평가하도록 만든다. 이들은 그의 상징이 회화적 필연이 아니라 외부 사상-신지학이나 영성주의-의 도식적 번역에 머문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회화 내부의 논리로 그 세계를 성립한 게 아니라 회화 외부의 담론을 그림으로 옮겨 놓았다는 의혹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이 느슨함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만약 예술의 본질이 완결된 형식에 있지 않고 오히려 형식의 결핍과 파열을 통해 열리는 가능성에 있다면 힐마 아프 클린트의 회화는 바로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가 구축한 기호와 패턴은 명확한 이론의 언어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불안정한 질서의 흔적이다. 이는 단순한 미성숙이 아니라 회화가 감당할 수 있는 경계 너머를 감지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미술이 언제나 자율성과 형식적 정밀성으로 평가받아 왔다면 그의 작업은 그 자율성 자체를 문제 삼으며 회화를 영적 사유와 결합하려는 급진적 모험으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힐마 아프 클린트의 회화는 이중의 긴장을 품는다. 한편으로는 조형적 완결에 실패한 화면이라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형식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는 실험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긴장은 단순히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 긴장 속에서 우리는 한 화가가 얼마나 훌륭한가라는 질문을 새롭게 정식화하게 된다. 훌륭함이란 전통적 기준을 충족시키는 성취인가 아니면 그 기준을 흔드는 파열인가. 힐마 아프 클린트는 바로 이 질문의 문턱에 서 있는 화가다. 최상호·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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