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파레시아, 내 안의 아이를 마주할 용기
이국환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어린 시절 상처·결핍 오래 지속
내면의 아이 마주하고 위로해야
상처를 직접 대면하는 용기 필요
글쓰기는 가장 안전한 고백 공간
인상 깊은 영화와 드라마를 반복해 감상하곤 한다. 영화 ‘굿 윌 헌팅’과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다시 볼 때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한 사람의 삶 전반에 얼마나 깊은 흔적을 남기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과거의 상처로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윌’과 세상에 대한 냉소로 자신을 무장한 ‘지안’의 모습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다행히 그들 곁에는 얼어붙은 상처를 녹여 줄 심리학 교수 ‘숀’과, 삶의 무게를 말없이 함께 견뎌 줄 ‘나의 아저씨’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상처와 결핍은 시간이 흐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무의식 깊숙이 자리 잡은 채, 성인이 된 우리 삶을 끊임없이 흔든다. 사소한 일에도 감정이 요동치고, 별것 아닌 일에도 깊은 우울에 잠기는 이면에는 대개 돌보지 못한 ‘내면아이’가 있다. 지나치게 방어적인 태도, 인정받고 싶은 갈망으로 자신을 소진하는 행동, 타인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새로운 도전을 회피하는 모습 역시, 어쩌면 돌보지 못한 내면아이가 보내는 신호일지 모른다.
프로이트는 “한때 우리 자신이었던 어린아이는 일생 동안 우리 내면에서 살아 있다”고 말했다. 이 아이를 내버려두고 산다는 것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어린 시절의 나를 외면하고 유기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아이를 마주하고 위로할 수 있을까.
이 치유의 여정에서 중요한 태도가 바로 푸코가 말한 ‘파레시아’(parrhesia)다. 파레시아는 고대 그리스어로 ‘모든 것을 말하다’라는 뜻이지만, 푸코는 이를 단순한 솔직함을 넘어선 용기 있는 진실 말하기로 재해석했다. 자신의 상처와 수치심, 취약함을 두려움 없이 인정하고 발화하는 용기, 그것이 파레시아다. ‘굿 윌 헌팅’에서 윌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 앞에서 무너지며 학대의 기억을 고백한 순간, ‘나의 아저씨’에서 지안이 침묵을 깨고 아저씨에게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삶을 드러낸 순간이 바로 그러하다.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실천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상처가 규정한 대로 반응하는 존재에서 벗어나, 현재의 선택으로 자기 삶을 재구성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상처의 책임을 누구에게 묻느냐가 아니라, 현재의 성인 자아가 그 상처를 어떻게 다루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태도다. 과거가 오늘의 나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그 과거가 지금의 나를 규정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파레시아는 바로 그 지점에서 과거와 현재 사이에 거리를 두는 용기 있는 결단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안의 아이는 무의식의 한편에서 울고 있을지 모른다. 이제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 주고, 왜 우는지 물어야 할 때다. 우리를 길러낸 부모 역시 서툴렀기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처를 외면하거나 억지로 미화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상처를 정직하게 응시하는 용기다.
만약 우리 곁에 숀 교수나 ‘나의 아저씨’ 같은 존재가 없다면, 우리는 ‘글쓰기’라는 파레시아를 시작할 수 있다. 글쓰기는 가장 안전하고도 정직한 고백의 공간이다. 독서치료나 문학치료, 이야기치료에서 글쓰기를 중요하게 활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때 어린 나는 무엇을 원했는가?” “그때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검열 없이 써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치유는 시작된다. 과거의 상처 입은 내면아이를 현재의 성인 자아가 바라보고 기록할 때, 우리는 비로소 과거로부터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푸코가 말한 ‘자기 돌봄’(care of the self)의 핵심이다. 내면의 진실을 글로 기록하는 행위는 나를 가둔 과거의 감옥에서 자신을 스스로 구출하는 치유의 의식이다. 파레시아의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더 이상 울고 있는 아이를 방치하지 않고,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당당히 현재의 삶으로 걸어 나올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