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정치적 불쾌감에 얼룩진 한일해저터널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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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열 정치부장

'통일교 의혹' 정국 흔들면서
한일해저터널도 함께 '낙인'

'북극항로 기점' 꿈꾸는 시대에
되레 부산에 필요한 사업일수도

'누가 주장했나' 사상 검증 대신
'정말 필요한가' 재논의 절실

지난해는 ‘다사다난’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조차 버겁게 느껴질 만큼 격랑의 시간이었다. 정치판은 더욱 그랬다. 불법 계엄의 후유증과 어수선함으로 한 해를 시작해 1년 내내 대통령 탄핵 등으로 시끌벅적하더니, 연말에는 통일교 의혹이 다시 정국을 흔들었다.

연말에 만난 한 국회의원은 평소 즐겨 마시던 이른바 ‘보리콜라’조차 마시려니 눈치가 보여 손이 가질 않는다고 했다. 제조사가 통일교 산하 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괜한 정치적 오해를 살까 두렵다는 것. 물론 농(弄)으로 한 말이었지만, 마냥 농으로만 웃어넘기기엔 이 시절이 하수상하다. 통일교로부터 부정한 정치자금을 받은 것도 아닌데(일단 다들 아니라고 주장하시니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해 그렇다고 치고), 그저 통일교 행사에 얼굴을 내민 것만으로도 뭇매를 맞는 세상이다. 그러니 통일교 기업이 만든 음료 사랑을 숨기는 것도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렇게 ‘통일교’는 낙인이 됐고, 해가 바뀌었어도 그 ‘주홍글씨’는 여전히 선명하다.

그렇게 좋아하는 ‘보리콜라’를 양껏 마시지 못한다는 모 의원의 사정도 딱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 공포가 개인의 기호를 넘어 지역의 백년대계까지 집어삼키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인의 입을 막은 그 음료처럼, 부산의 미래를 논할 때 더 이상 언급해서는 안 될 단어가 생겼다. 바로 통일교단이 그토록 원한다는 ‘한일해저터널’이다.

통일교가 이슈의 중심에 서기 전에도 한일해저터널은 ‘뜨거운 감자’였다. 부산과 규슈를 잇는 이 거대한 구상은 부산 선거판의 단골 소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해저터널이 필요한가’라는 논의는 없고 ‘누가 해저터널 이야기를 꺼냈는가’라는 질문만 남았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곧 ‘누가 통일교와 연관되어 있는가’라는 사상 검증과 다르지 않다. 정치적 불쾌감이 정책적 판단을 압도해 버린 셈이다.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전제하자면, 나는 통일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다만, 한일해저터널이 가진 잠재력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다. 수도권 일극 체제에서 부산이 살아남기 위해선 바다 건너 부산과 근접한 일본 규슈와 손잡고 새로운 경제권역을 창출해야 한다고 믿어 왔다. 이는 지난 20년간 ‘부산-후쿠오카 포럼’을 지켜온 두 도시의 학계·경제계 인사들의 공통된 견해이기도 하다. 물론 한일해저터널을 바라보는 그들의 입장은 제각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일해저터널은 부산과 규슈가 만들 새로운 경제권역의 혈맥을 잇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터널이 뚫리면 부산의 부품·조선기자재 산업은 일본이라는 거대 시장에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닿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기술직·서비스직·연구개발직 등의 일자리도 늘 것이다. 일본으로부터의 단기 부산 방문이 늘면서 의료, 뷰티 산업의 시장이 확대될 수도 있다.

반대 논리도 만만치 않다. 핵심은 ‘부산 패싱’이다. 일본의 자본과 사람이 부산을 건너뛰고 서울로 직행할 것이라는 우려다. 물류가 부산항을 거치지 않고 철도로 빠져나가고, 부산 시민들은 접근성이 좋아진 일본에서의 소비가 잦아지면서 부산 상권이 위축될 수도 있다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냉정히 따져보자. ‘패싱’은 지금도 일어날 수 있다. 후쿠오카나 오사카에서 비행기를 타면 서울은 지척이다. 부산과 비교해 비행시간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서울행 항공편이 더 많아 오히려 부산보다 가깝게 느껴질 정도다. 해저터널 유무와 상관없이, 서울로 갈 사람은 이미 가고 있다. 그나마 육로(정확하게는 육로가 아니라 바다 밑길이지만)가 생기면 오히려 부산이 가깝게 느껴질 수 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터널 그 자체가 아니라, 터널이 뚫렸을 때 ‘그저 스쳐 지나가는 정거장’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우리의 패배주의다. 더욱 답답한 점은 대개

지난해는 ‘다사다난’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조차 버겁게 느껴질 만큼 격랑의 시간이었다. 정치판은 더욱 그랬다. 불법 계엄의 후유증과 어수선함으로 한 해를 시작해 1년 내내 대통령 탄핵 등으로 시끌벅적하더니, 연말에는 통일교 의혹이 다시 정국을 흔들었다.


연말에 만난 한 국회의원은 평소 즐겨 마시던 이른바 ‘보리콜라’조차 마시려니 눈치가 보여 손이 가질 않는다고 했다. 제조사가 통일교 산하 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괜한 정치적 오해를 살까 두렵다는 것. 물론 농(弄)으로 한 말이었지만, 마냥 농으로만 웃어넘기기엔 이 시절이 하수상하다. 통일교로부터 부정한 정치자금을 받은 것도 아닌데(일단 다들 아니라고 주장하시니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해 그렇다고 치고), 그저 통일교 행사에 얼굴을 내민 것만으로도 뭇매를 맞는 세상이다. 그러니 통일교 기업이 만든 음료 사랑을 숨기는 것도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렇게 ‘통일교’는 낙인이 됐고, 해가 바뀌었어도 그 ‘주홍글씨’는 여전히 선명하다.


그렇게 좋아하는 ‘보리콜라’를 양껏 마시지 못한다는 모 의원의 사정도 딱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 공포가 개인의 기호를 넘어 지역의 백년대계까지 집어삼키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인의 입을 막은 그 음료처럼, 부산의 미래를 논할 때 더 이상 언급해서는 안 될 단어가 생겼다. 바로 통일교단이 그토록 원한다는 ‘한일해저터널’이다.


통일교가 이슈의 중심에 서기 전에도 한일해저터널은 ‘뜨거운 감자’였다. 부산과 규슈를 잇는 이 거대한 구상은 부산 선거판의 단골 소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해저터널이 필요한가’라는 논의는 없고 ‘누가 해저터널 이야기를 꺼냈는가’라는 질문만 남았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곧 ‘누가 통일교와 연관되어 있는가’라는 사상 검증과 다르지 않다. 정치적 불쾌감이 정책적 판단을 압도해 버린 셈이다.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전제하자면, 나는 통일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다만, 한일해저터널이 가진 잠재력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다. 수도권 일극 체제에서 부산이 살아남기 위해선 바다 건너 부산과 근접한 일본 규슈와 손잡고 새로운 경제권역을 창출해야 한다고 믿어 왔다. 이는 지난 20년간 ‘부산-후쿠오카 포럼’을 지켜온 두 도시의 학계·경제계 인사들의 공통된 견해이기도 하다. 물론 한일해저터널을 바라보는 그들의 입장은 제각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일해저터널은 부산과 규슈가 만들 새로운 경제권역의 혈맥을 잇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터널이 뚫리면 부산의 부품·조선기자재 산업은 일본이라는 거대 시장에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닿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기술직·서비스직·연구개발직 등의 일자리도 늘 것이다. 일본으로부터의 단기 부산 방문이 늘면서 의료, 뷰티 산업의 시장이 확대될 수도 있다.


반대 논리도 만만치 않다. 핵심은 ‘부산 패싱’이다. 일본의 자본과 사람이 부산을 건너뛰고 서울로 직행할 것이라는 우려다. 물류가 부산항을 거치지 않고 철도로 빠져나가고, 부산 시민들은 접근성이 좋아진 일본에서의 소비가 잦아지면서 부산 상권이 위축될 수도 있다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냉정히 따져보자. ‘패싱’은 지금도 일어날 수 있다. 후쿠오카나 오사카에서 비행기를 타면 서울은 지척이다. 부산과 비교해 비행시간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서울행 항공편이 더 많아 오히려 부산보다 가깝게 느껴질 정도다. 해저터널 유무와 상관없이, 서울로 갈 사람은 이미 가고 있다. 그나마 육로(정확하게는 육로가 아니라 바다 밑길이지만)가 생기면 오히려 부산이 가깝게 느껴질 수 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터널 그 자체가 아니라, 터널이 뚫렸을 때 ‘그저 스쳐 지나가는 정거장’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우리의 패배주의다. 더욱 답답한 점은 대개 그것이 부산이 아닌 중앙의 목소리라는 점이다. 언제 연결될지도 모를 ‘유라시아 교통망의 종착지’라는 개념에 너무 연연할 필요도 없다. 대륙의 종착지 역시 그 이후로 뻗어나갈 수 없다면 그저 변방의 막다른 골목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종착지’가 아니라 ‘허브’가 되는 것이다.

과거에도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성과가 없지 않았냐,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고 있다. 부산은 지금 북극항로의 기점을 꿈꾸고, ‘글로벌 허브 도시’를 지향한다. 그러면서 고작 해저터널 하나에 경쟁력을 잃을까 전전긍긍한다면, 이는 어불성설이다. 대한민국의 선박이 일본 화물까지 가득 싣고 북극을 지나려면, 오히려 해저터널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이 글이 반드시 터널이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떤 식으로든 부산에는 반전이 필요하고, 혹 그중 하나가 될 수 있는 카드를 단순히 ‘누가 추진했느냐’라는 꼬리표 때문에 제대로 된 논의 없이 폐기해선 안 된다는 거다. ‘실사구시의 재검토’가 필요하다. 비용과 경제적 기대 효과에 대해, 과거의 데이터가 아니라 변화한 현재와 미래의 비전에 맞춰 다시 계산기를 두드려야 한다.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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