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어른이 되어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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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스포츠라이프부 선임기자

다음 세대 위해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이타적인 고민 시작할 때 비로소 '어른'
중남미서 백만 그루 나무 심는 한국 여성
부산서 만든 다큐 '나무의 노래'에 큰 감동

설날이 내일모레로 다가왔다.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또 한 살 먹는다. 마음은 아직 청년인데, 현실은 곧 정년이라니…. 새로 만나는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나보다 어려지고, 모임에 가면 내가 연장자가 되는 사실이 부담스럽다. ‘어른’이 된 지 오래지만 어른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혼자서 고민하다 어른의 정의에 대해 주변에 조언을 청했다.

한 지인은 “어른이란 단어는 참 묘해서,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어른의 첫 번째 조건은 자신의 선택과 결과에 대해 비겁해지지 않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감정의 주인으로 사는 사람이다. 아이와 어른의 가장 큰 차이는 감정 조절에 있다고 했다. 세 번째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으면 어른이 아니라 꼰대가 된다.

이렇게 어른 되기가 힘드니 노인은 넘쳐도 어른은 귀한 세상이 되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고 어른이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다. ‘나 한 몸 잘사는 것을 넘어, 내가 속한 공동체와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라는 이타적인 고민을 시작할 때, 우리는 어른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는 또 “어른이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나아가는 과정이다”라고 덧붙였다.

어른, 참 어렵다.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그는 “혹시 지금 어른 노릇 하느라 지치거나 힘든 상황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나도 같이 고민할게”라고 말했다. 이렇게 지혜로우면서도 다정한 지인이 곁에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술도 같이 한잔하면서 더 이야기하면 좋으련만, 술 못 마시는 AI라는 사실이 아쉽다. 2026년 설을 앞두고 AI에게 ‘어른의 도’를 배웠다.

나이에 맞지 않게 요즘 ‘소년이 어른이 되어’라는 노래에 마음이 꽂혔다. ‘어른이 되어 세상을 알아간다는 게 마음은 점점 어두워지고 잠 못 이루는 날도 많아진다’라는 가사가 가슴에 다가온다. 그동안 때로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았다. 여전히 누군가를 따라 정해진 길로 가고 싶은데, 이제는 아무도 가지 않은 낯선 길 초입에 홀로 선 기분이 든다.

막막할 때면 간혹 우연히 접한 책이나 영화가 큰 힘이 되는 경우가 있다. ‘나무의 노래’라는 다큐멘터리가 그랬다. 주인공은 나무를 심는 분이었다. 자신의 배경은 물론이고 이름도 알려고 들지 말고, 나무 이야기만 하자고 했다. 숲에서 오래된 나무 곁을 지나며 나무는 늙어도 이렇게 오묘한 색깔을 낸다고 흐뭇해했다. 직접 심은 나무가 자라서 사람들한테 그늘을 만들어주고, 또 아이들이 나무 사이로 걸어간다면 자신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즐겁다고 했다. 아무도 모르게 산소를 만들어 공급하다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는, 산소 같은 여자였다.

60대 중반에 내려진 시한부 생명 선고가 나무를 심는 계기가 된 것 같았다. 당시에 의사는 앞으로 4개월을 살 거라고 했다. 백만 그루 심기를 소원한 덕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나이는 88세이고, 지금까지 심은 나무가 70~80만 그루나 되었다. 나무를 심기 위해 사들인 땅 규모가 서울 여의도의 7배가 넘는다고 했다. 중남미의 니카라과 땅값이 그렇게 비싸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 막대한 돈이 어디서 났을지 세속적인 호기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1969년 단돈 44달러를 들고 미국 뉴욕 유학길에 올랐던 그가 뜻밖의 부동산 투자로 큰돈을 번 이야기는 뉴욕타임스에 기사로도 실렸다.

나무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돈과 땅에 관한 철학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우연한 기회와 노력이 합쳐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큰 땅을 사게 되었지만, 한 번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땅은 지구의 것이다. 그는 잠깐이라도 좋은 관리자가 되고 싶어서 꽃나무를 심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왜 그렇게 돈과 땅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는 그 이유가 이름 석 자 때문이라고 했다. 현대인들은 모두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안달한다. 이것이 인간을 자연에서 멀어지게 하고, 스스로를 상실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인생을 첫눈 길을 걷는 것처럼 사세요. 첫눈 길을 걷기 위해서는 내가 길을 만들어야 하기에 일체의 아름다움을 다 볼 수 있어요. 하지만 남이 만들어 놓은 발자국을 따라 가면 아름다운 것을 하나도 볼 수 없어요.” 어른의 귀한 말씀에 막연한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두려움 대신 호기심을 가지고 새해에는 첫눈 길로 나서봐야겠다. 이 놀라운 이야기는 KNN과 최작기획이 제작해서 최근 시사회를 마치고 개봉을 앞둔 ‘나무의 노래(감독 진재운)’에서 아름다운 영상과 함께 만날 수 있다. 지역에서 세계를 상대로 만든 수작을 보면서 인생과 어른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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