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이에게]가난 속에서도 늘 자식 먼저였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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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12년이 지났다. 어머니는 17세에 결혼해 6남매를 낳아 힘들게 기르셨다. 아버지는 평생 땅만 팠던 순수 농부로 한 번도 고향을 떠난 적이 없었다.

농사 지어 다른 생필품을 샀던 물물교환 시대에 어머니는 일방적으로 가족에게 헌신했다. 아버지가 사다준 갈치나 채소로 끼니를 이었다. 그나마 맛있는 반찬은 아버지와 자식들 먹이느라 당신은 침만 삼키며 맛도 보지 못했다. 늘 자식들이 우선이었고, 의복이나 학용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식이 6명이다 보니 빈궁한 살림살이였다. 꽁보리밥에 반찬이래야 짜게 담근 김치와 양파, 마늘, 오이, 풋고추 등 채소가 주였다. 그래도 도시락만큼은 남에게 뒤질세라 최대한 차려 주셨다. 계란말이에 연뿌리, 오징어 무침 등 당시로는 아주 뛰어난 것들이었다. 남에게 궁색하게 보이기 싫었고 자식들 기 죽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평생을 농촌에서 홀로 지내셨다. 친구 사귀기도 힘들고 좁은 공간에 사는 게 답답하다며 한사코 반대하셨다. 억지로라도 모시지 못한 게 한이 되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어머니가 문맹이었다는 점이다. 자식들 다 출가시키고 그 많은 무료한 시간을 어찌 홀로 보내셨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글이라도 깨쳤으면 책이나 신문도 읽고 TV 자막도 보면서 훨씬 편하게 사셨을 텐데. 그래도 평생 어머니가 허튼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경위에 발랐고 일반 교양과 상식은 충분히 갖추셨다. 그래서 자식들을 타이를 때면 감히 아무도 대꾸조차 못했다.

말년에 갑작스레 고관절을 다쳐 돌아가시는 바람에 효도할 기회를 못 가져 한스러웠다. 해마다 기일이 되면 온 집안 식구들이 모여 어머니를 추모하고 산소에 간다. 간단히 차린 음식과 꽃을 놓고 절하면서 북받치는 눈물을 맘껏 흘린다. 비록 육신은 돌아가셨지만 어머니의 자태와 정신만은 가족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기억되고 살아 있을 것이다. -최남이의 아들 우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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