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6일 오륙도 승전보, 한국전쟁 운명 바꿨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무장 병력 600명 탄 북한 무장수송선 침투
해군 첫 전투함 백두산함이 발견해 격침
김일성도 훗날 남한 적화 좌절 원인 지목

일제가 몰래 장자산에 숨긴 16인치 화포
6·25 의료지원팀 파견 스웨덴과 인연 등
부산남구신문 창간 30주년 맞아 소개해

올해로 한국전쟁이 발생한 지 76주년이 되었다. 사람들이 세 세대 가까이 바뀌었으니, 전쟁이 멀리서 벌어지는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부산 남구청에서 발행하는 <부산남구신문>은 지난달 창간 30주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한 이야기를 골라 9개를 소개했다. 그중 한국전쟁이나 태평양전쟁과 관련된 이야기가 3개나 되었다. 우리 주변에서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꾼 사건까지도 너무 알려지지 않아 보였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일제의 한반도 침략 전초기지이자 피란 수도였던 부산에서 벌어진 숨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봤다.


백두산함에 3인치 함포를 장착하는 모습. 부산남구신문 제공 백두산함에 3인치 함포를 장착하는 모습. 부산남구신문 제공

■나라의 운명 바꾼 대한해협해전

대한해협해전은 6·25전쟁 발발 다음날 우리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PO-701)’이 북한의 무장 수송선을 오륙도 인근에서 격침한 전투다. 1950년 6월 25일 오후 3시. 진해에 정박해 있던 백두산함은 상부의 다급한 무전을 받고 동해로 이동한다. 승조원들은 이때까지도 전쟁 발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국민들까지 모금에 동참해 마련한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은 가진 포탄이 백여 발에 불과했고, 그때까지 실탄 사격도 해본 적이 없었다.

오후 8시 12분. 백두산함은 부산 동북방 10마일 해상에서 남하하던 괴선박을 발견했다. 선체가 온통 시커멓게 칠해진 국적 불명의 배였다. 오후 9시 30분. 백두산함이 접근해 서치라이트를 비추고 망원경을 들여다보니 괴선박에는 대포와 기관포가 장착되어 있었다. 또 갑판에는 국방색 차림의 무장 군인들이 움츠리고 있는 모습이 확인됐다. 백두산함은 해군본부에 상황을 보고한 뒤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다음날인 26일 0시30분. 3인치 함포의 위협 사격을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적함도 기관총으로 응사했지만 거리가 떨어져 총탄은 닿지 않았다. 백두산함은 포탄 100발 중 절반 정도를 포격했다. 1시 38분. 그중 일부가 명중해 마침내 적함이 침몰했다. 이때 교전으로 아군 2명이 목숨을 잃었다. 괴선박의 실체와 남침 의도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한참 뒤에 알려졌다. 김일성은 훗날 “3주 만에 남한을 적화하려던 계획이 대한해협해전의 패배로 좌절됐다”라고 털어놓았다.


대한해협해전에 참전했던 73명의 백두산함 승조원들. 부산남구신문 제공 대한해협해전에 참전했던 73명의 백두산함 승조원들. 부산남구신문 제공

괴선박에 타고 있던 후방 교란 목적의 무장 병력 600명은 전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가들은 “백두산함이 이 괴선박을 막지 못했다면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유엔군 인원 및 물자가 차단돼 전쟁 수행에 치명적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백두산함 승조원은 73명이다. 2007년에는 전국에 흩어져 있던 전우들을 수소문해 백두산함동지회가 결성됐다. 부산남구신문은 2015년 6월에 이등수병(탄약 운반수)으로 전투에 참가했던 백두산함동지회 황상영 회장을 인터뷰해 보도했다. 백두산함 마스트(돛대)는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 중인데, 2010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해군작전사령부는 매년 6월 26일 민주공원과 부산작전기지에서 대한해협해전 전승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태평양전쟁 비밀병기 장자등 포대

100년 전 지금의 오륙도해맞이공원 땅 밑에는 일제의 비밀병기가 숨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며 논란을 일으킨 일본의 군함도와 관련이 있다. 일제의 강제 동원 현장인 하시마섬은 1920년대 일본이 야심차게 건조하던 전함 도사(土左)호와 닮아서 군함도로 불리게 됐다.

당시 미국 등 5대 열강은 지금의 핵무기와 위상이 비슷했던 ‘거함거포’의 건조를 막기 위해 1922년 워싱턴군축협정을 체결해 주력함은 3만 5000톤 이하, 함포는 16인치 이하로 제한했다. 일본의 야심찬 계획으로 건조 막바지에 있던 도사호는 이 협정에 걸려 바다에 자침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폐기 대상인 도사호에 장착하려 했던 세계 최대 16인치 함포 2기를 극비리에 남구 오륙도에 옮겨 놓았다. 1924년에 시작한 포진지 공사는 6년이나 걸렸고, 장자산 아래에 있어서 이름이 장자등 포대가 되었다. 지금도 오륙도SK뷰아파트와 오륙도해맞이공원 사이 비탈에 포대 진입구가 남아 있다.


바다에 수침하기 위해 가는 일본 전함 도사호. 부산남구신문 제공 바다에 수침하기 위해 가는 일본 전함 도사호. 부산남구신문 제공

장자등 포대가 완공되고 4년 뒤에는 대마도에 같은 형태의 토요 포대를 구축하고 동일한 함포 2기를 설치했다. 부산 장자등 포대와 대마도 토요 포대 사이의 거리는 54㎞에 불과했다. 두 포대의 사거리는 30㎞여서 대한해협은 완벽한 포사격권에 들어왔다. 미국 등 연합군 함대는 대한해협을 무사히 통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제의 야욕은 1945년 8월 원자탄 투하로 보기 좋게 꺾이고 만다. 그해 7월부터 오륙도 상공에 나타나던 B29 폭격기가 장자등 포진지를 폭격해 대형 포신이 날아가고, 포진지 일부는 내려앉았다. 일본의 패망으로 포대는 미군에 의해 해체되고, 주민들이 내부 철근을 뜯어내면서 훼손되었다. 남구청이 한때 복원을 시도했지만 수십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재원에 발목이 걸려 지금까지 방치되고 있다. 부산남구신문은 2015년 구보 사상 처음으로 해외 취재에 나서서 대마도 토요 포대까지 기사화했다. 장자등 포대는 2021년 부산일보 취재진에 의해 다시 한번 조명되기도 했다.


장자등 포대 내부 설계도. 부산남구신문 제공 장자등 포대 내부 설계도. 부산남구신문 제공

■스웨덴이 사랑한 한국, 서전병원

6·25 당시 16개국이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그밖에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독일 등 6개국은 의료지원단을 파견했다. 총 대신 메스와 청진기를 든 이들 국가의 헌신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특히 스웨덴은 1950년 7월 14일 중립국으로서는 맨 먼저 UN에 인도주의적 지원 의사를 밝혔다. 스웨덴 의료자원봉사자로 구성된 스웨덴 적십자병원은 1950년 9월 23일부터 1957년 4월까지 부산에 체류하며 유엔군, 국군, 시민 외에도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군, 중공군까지 치료했다. 스웨덴 의료진들로부터 치료와 예방접종 등 의료혜택을 받은 사람은 200만 명에 이른다. 의료진들의 복무기간은 6개월이었지만 1~2년 이상 장기 지원자들이 많았고, 본국 귀국 후 다시 지원하는 사례도 상당수였다.


지금의 부경대 본관 자리에 있던 서전병원. 부산남구신문 제공 지금의 부경대 본관 자리에 있던 서전병원. 부산남구신문 제공

스웨덴은 원래 최전선 야전병원을 운영할 계획이었지만 인천 상륙작전으로 부상병들이 후송되면서 옛 부산상고(현 롯데백화점 부산본점)에 병원 건물을 세우고 부산에 잔류하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민간인 의료구호 사업을 위해 명칭을 아예 부산스웨덴병원(서전병원)으로 바꿨다. 1955년 5월에는 옛 수산대학(현 부경대)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민간인 진료에 전념했다. 정전 이후에도 계속 주둔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여론에 따라 서전병원은 1957년 3월 병원 문을 닫고 4월에 한국에서 철수했다. 철수 이후에도 스웨덴은 덴마크, 노르웨이와 공동으로 1958년 서울에 의료센터(국립중앙의료원의 전신)를 설립해 선진 의료 기술 보급 및 의료인 양성 등 한국의 의료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스웨덴 병원으로 쓰던 수산대 본부 건물은 1990년대에 허물어지고, 지금의 대학본부 건물이 들어섰다. 스웨덴은 일찍부터 가장 오랫동안 한국을 위해 의료지원을 했지만 이 같은 사실이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1971년에는 스웨덴 적십자병원이 있던 부산상고 교정에 참전비가 건립됐다. 이후 학교가 이전하고 롯데백화점 부산본점이 들어서면서 참전 기념비만 서면 포장마차 거리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부산이 자랑할 이야기들이

부산남구신문 김성한 편집장은 “만약 한국전쟁 초기에 북한군 600명이 부산으로 숨어 들어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한해협해전을 통해 북한이 후방 교란까지 생각하며 굉장히 치밀하게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대한해협해전은 역사적 의미가 크지만, 날짜가 6·25 하루 뒷날이 되어서 그동안 제대로 주목받지 못해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조선인과 영국인이 부산 용당포에서 최초로 만난 사건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한·영 첫 만남 기념비. 부산일보DB 조선인과 영국인이 부산 용당포에서 최초로 만난 사건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한·영 첫 만남 기념비. 부산일보DB

사실 부산 남구에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았다. 정조 때인 1797년 일본으로 향하던 영국 탐사선 ‘프린스 윌리엄 헨리호’가 남구 용당포로 떠밀려왔다. 부산남구신문은 이 배 선원들이 주민들과 만나 도움을 주고받다 8일 만에 떠난 일을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남구 이야기로 꼽았다. 또 근현대사 아픔을 품은 우암동 소막마을, 우암동의 성자 하 안토니오 신부, 비운의 독립운동가 안성녀 여사(안중근 의사 여동생으로 백운포에 묘가 있다), 한국 최초·최대 한센병 전문 병원 상애원, 남구 용호동 소금밭 이야기도 지역을 세계에 알릴 이야기로 소개했다. 김 편집장은 “영국 탐사선 프린스 윌리엄 헨리호 선원들이 250년 전 주민들한테 선물로 준 총과 망원경의 행방이 궁금하다. 그걸 찾으면서 이 이야기를 다시 한번 환기하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당신을 위한 추천 기사

    스마트폰 영상제

    당신을 위한 P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