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고 돈 나온들 무슨 소용!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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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바스(Crevasse)는 빙하의 표면에 생긴 균열을 뜻한다. 여기서 착안한 ‘소득 크레바스(Income Crevasse)’는 직장에서 은퇴해 국민연금을 받을 때까지 소득이 없는 기간을 말하는데, 흔히 은퇴 크레바스라고도 불린다. 국가데이터처의 ‘2025 고령자 부가조사’에 따르면 주된 일자리의 평균 퇴직 연령은 52.9세다. 반면 현재 국민연금 수령 개시 나이는 63세인데 2033년부터 65세로 더 늦춰진다. 이럴 경우 최소 10년 안팎의 소득 크레바스가 생긴다. 법적 정년인 60세까지 근무하더라도 몇 년간의 소득 단절은 피하기 어렵다. 국민연금을 55세부터 조기 수령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 지급액이 줄어들게 된다. 결국 은퇴 이후 연금 개시 전까지의 공백기를 어떻게 메울지가 노후 설계의 핵심 과제다.

퇴직을 2~3년 앞둔 50대 후반의 A 씨 역시 이 공백이 걱정이었다. 그러던 중 A 씨는 지인을 통해 종신보험의 사망보험금을 노후 자금으로 미리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바로 ‘사망보험금 유동화’ 제도다. 이는 종신보험의 해약환급금을 활용해 사망보험금을 생전에 연금처럼 수령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A 씨처럼 최근 퇴직을 앞둔 직장인들 사이에 새로운 노후 자금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같은 관심은 지난 10월 말, 금융당국 주도로 5대 주요 생명보험사가 사망보험금 유동화 서비스를 본격 도입하면서 더 확산됐다. 과연 사망보험금 유동화가 퇴직 후 국민연금 수령 전까지 소득 공백기를 메우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억원 금융위원장이 10월 30일 서울 중구 한화생명 시청 고객센터에서 사망보험금 유동화 출시일에 맞춰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억원 금융위원장이 10월 30일 서울 중구 한화생명 시청 고객센터에서 사망보험금 유동화 출시일에 맞춰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연합뉴스

■ 왜 지금, 유동화에 관심이 쏠릴까

사망보험금은 오랫동안 ‘사후에 남겨지는 돈’으로 인식돼 왔다. 보험의 본래 목적이 유가족 보호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기대수명은 늘어나고 은퇴 이후의 삶이 길어지면서, 그동안 묶여 있던 자산을 생전에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사망보험금 유동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 제도다.

이 제도가 주목받는 배경에는 구조적인 노후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평균 수명은 계속 늘어나는데, 은퇴 이후 매달 들어오는 고정소득은 충분하지 않다. 국민연금만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고물가와 인플레이션은 중장년층의 지갑을 더욱 얇게 만들고 있다. 국민연금연구원이 2023년 8~11월 전국 5331가구, 8736명을 대상으로 ‘제10차 국민 노후보장패널조사’를 진행한 결과, 50대 이상 중고령자가 생각하는 적정노후생활비는 부부 기준 월 297만 원, 개인 기준 192만 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2년 전 조사보다 각각 20만 원, 15만 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올해 국민연금 월평균 수급액은 67만 원에 불과해 적정노후생활비의 3분의 1 수준에 머문다.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앞으로도 고령층을 중심으로 유동화 신청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주택을 담보로 연금을 받는 주택연금 수령액이 최근 급증하고 있는 현상과도 맥을 같이한다.


한국의 노인들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늦게까지, 가장 많이 일하고 있는 것으로 최근 나타났다. 통계청 조사 결과, 한국의 고령층이 희망하는 근로 연령은 평균 73.4세에 달했다. 이들이 일을 계속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생활비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54.4%)'였다. 국민연금만으로는 기본적인 생활조차 영위하기 힘든 현실과 은퇴 후 연금 수령까지 이어지는 소득 공백기가 고령층을 다시 노동시장으로 내몰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11월 26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 모습. 연합뉴스 한국의 노인들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늦게까지, 가장 많이 일하고 있는 것으로 최근 나타났다. 통계청 조사 결과, 한국의 고령층이 희망하는 근로 연령은 평균 73.4세에 달했다. 이들이 일을 계속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생활비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54.4%)'였다. 국민연금만으로는 기본적인 생활조차 영위하기 힘든 현실과 은퇴 후 연금 수령까지 이어지는 소득 공백기가 고령층을 다시 노동시장으로 내몰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11월 26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 모습. 연합뉴스

■ 사망보험금 유동화 상품 잇따라 출시

2025년 10월 말 삼성생명, 한화생명, 교보생명, 신한라이프, KB라이프 등 5개 생명보험사가 처음으로 사망보험금 유동화 상품을 출시했다. 최근에는 동양생명도 사망보험금 유동화 특약을 출시하며 이 대열에 합류했다. 금융당국은 내년 1월부터 전 생명보험사로 이 제도를 확대할 계획이다. 종신보험이 더 이상 손대지 못하는 사후 자산이 아니라, 생애 전반에 활용 가능한 자산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로 생명보험협회는 사망보험금 유동화 제도가 도입된 후 10월 30일부터 11월 10일까지 8영업일 동안 605건, 28억 9000만 원 수준을 지급했다고 밝힌 바 있다. 유동화를 시작한 계약자들은 월평균 39만 8000원가량을 수령했다. 평균 신청 연령은 65.6세였다.

사망보험금 유동화 제도는 해외에서도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생명보험의 생활혜택특약 제도가 빠르게 확산 중이다. 이 특약은 피보험자가 사망 이전에 중대한 건강 악화 상황에 처했을 때 사망보험금을 조기에 지급하도록 설계된 상품이다. 홍콩에서는 가속사망보험금 제도가 대표적이다. 질병·요양 등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사망보험금 일부 또는 전부를 선지급 받거나 일정 기간에 걸쳐 정기적 연금 형태로 나누어 수령할 수 있다.

국민연금 제도가 시행된 1988년 이후 처음으로 조기노령연금 수급자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 정해진 시기보다 일찍 연금을 받는 대신 수령액이 평생 깎이는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당장의 생계를 해결하려는 은퇴자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신호다. 이는 은퇴 후 연금을 받기 전까지 소득이 없는 이른바 '소득 크레바스'를 견디지 못한 장년층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진은 9일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서울북부지역본부 종합상담실 모습. 연합뉴스 국민연금 제도가 시행된 1988년 이후 처음으로 조기노령연금 수급자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 정해진 시기보다 일찍 연금을 받는 대신 수령액이 평생 깎이는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당장의 생계를 해결하려는 은퇴자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신호다. 이는 은퇴 후 연금을 받기 전까지 소득이 없는 이른바 '소득 크레바스'를 견디지 못한 장년층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진은 9일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서울북부지역본부 종합상담실 모습. 연합뉴스

■ 유동화 대상인지 확인하는 법

사망보험금 유동화는 모든 종신보험에 자동 적용되는 제도는 아니다. 보험료를 10년 이상 납입 완료한 월 적립식 종신보험으로, 신청 시점에 보험계약대출 잔액이 없고 계약자와 피보험자가 동일해야 한다. 해약환급금이 충분히 쌓인 고연령 계약자일수록 수령 가능 금액이 커지며, 개인 상황에 따라 유동화 개시 시점과 수령 기간을 선택할 수 있다.

대상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비교적 명확하다. 금리확정형 종신보험이어야 하며, 변액종신보험이나 CI보험은 대부분 제외된다. 가입 연령은 만 55세 이상, 계약 기간과 보험료 납입 기간은 각각 10년 이상, 그리고 보험료 완납 상태여야 한다. 손해보험사에서 판매한 사망담보 상품은 사망보험금 유동화 대상이 아니다.

확인은 생명보험협회의 ‘내보험찾아줌’ 서비스로 가입 내역을 조회한 뒤, 해당 보험사 고객센터나 영업점을 방문해 유동화 가능 여부와 예상 수령액 시뮬레이션을 요청하면 된다. 설계사를 통한 신청은 불가하며, 반드시 계약자 본인이 직접 대면 신청해야 한다. 유동화는 계약자의 몫으로 수익자 동의가 없어도 유동화 신청은 가능하다.

유동화를 선택하면 수령한 연금과 잔여 사망보험금의 합계가 최초 사망보험금보다 줄어든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는 보험사가 유동화에 대한 이자나 수수료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더 받는 선택이 아니라 앞당겨 사용하는 선택에 가깝다. 현재의 생활비 필요와 향후 유가족을 위한 재원 사이에서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 사망보험금 유동화, 적용해 보면

사망보험금 유동화 가입자는 유동화 비율을 최대 90%까지 선택할 수 있고, 수령 시작 시점과 지급기간 역시 본인이 결정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정답은 아니지만, 노후 자금 설계의 한 수단으로는 전략적 활용이 가능하다.

여기서 사망보험금 유동화 가입자가 알아야 할 것은 보험상품의 이율, 위험률, 신청 시 나이, 유동화 비율, 지급기간 등에 따라 지급금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지급기간 선택이다. 기간을 짧게 잡으면 월 수령액은 커지지만, 길게 설정하면 금액은 줄어드는 대신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 이는 ‘얼마를 받을 것인가’보다 ‘언제, 얼마나 필요할 것인가’를 먼저 따져야 하는 문제다. 은퇴 직후 소득 공백을 메울지, 장기적인 생활비 보완이 목적일지에 따라 선택은 달라진다.

실제 사례를 보면, 60대 B 씨는 사망보험금 3000만 원의 종신보험을 유동화 비율 90%, 지급 기간 5년으로 설정해 총 1314만 원, 월평균 21만 9000원을 수령한다. 반면 사망보험금 7000만 원의 보험에 가입한 60대 C 씨는 같은 비율에 지급 기간을 7년으로 잡아 총 3436만 원, 월평균 40만 9000원을 받는다.

내년에는 사망보험금을 현금 대신 요양·간병 서비스로 제공하는 서비스형 상품도 출시될 전망이다. 예컨대 C 씨가 70세부터 10년간 80% 유동화를 선택하면, 연평균 512만 원(총 5116만 원) 상당의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사망보험금 유동화 개요. 연합뉴스 사망보험금 유동화 개요. 연합뉴스

■ 유동화 비율 나눠서 시뮬레이션해야

사망보험금 유동화 시뮬레이션에서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유동화 구조가 내 삶의 흐름에 맞는지다. 우선 유동화의 기준은 사망보험금이 아니라 해약환급금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같은 사망보험금이라도 가입 시기와 예정이율에 따라 실제 연금 재원은 크게 달라진다. 다음으로는 지급기간 대비 총수령액을 봐야 한다. 월 금액이 커 보여도 지급기간이 짧다면 노후 전반을 버티기 어렵다. 또한 유동화 종료 후 남는 잔여 사망보험금도 중요하다. 이는 유가족에게 남는 사실상 유일한 보장 자산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유동화 비율을 바꿨을 때 월 수령액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반드시 비교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유동화 비율 70%와 90%를 나눠 시뮬레이션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70%는 비교적 보수적인 선택으로, 월 수령액은 줄어들지만 종료 후 남는 사망보험금이 커 유가족을 위한 최소한의 상속 재원을 지킬 수 있다. 다른 연금 소득이 있거나 의료·간병비 부담이 아직 크지 않은 경우에 적합하다. 반면 90%는 현금 흐름을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은퇴 직후 소득 공백이 크거나 국민연금만으로 생활이 빠듯한 경우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사망보장이 최소 수준으로 줄어든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상속 필요성이 크지 않은 경우에 한해 고려할 선택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사망보험의 본래 목적이 유가족 보호인 만큼, 이를 줄이도록 유도하는 구조 자체가 모순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 이제는 나를 위한 노후 설계 시작할 때

은퇴 이후 연금 개시 전까지의 공백기를 메우는 방법으로는 주택연금도 활용할 수 있다. 사망보험금 유동화와 주택연금은 성격이 다른 자산을 연금형 현금흐름으로 전환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제도를 함께 활용하면 노후 소득의 안정성이 높아진다. 국민연금 위에 주택연금으로 생활비를 마련하고, 사망보험금 유동화로 의료비나 간병비 같은 변동 지출을 보완하는 방식이다. 소득원이 분산되면 예상치 못한 지출에도 대응력이 커진다.

반면 단점도 분명하다. 두 제도 모두 자산을 앞당겨 사용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향후 상속 자산은 줄어든다. 주택연금은 주택 처분의 자유를 제한하고, 사망보험금 유동화는 유가족에게 남는 보험금을 감소시킨다. 따라서 현재의 생활 안정과 미래의 상속 사이에서 가족 간 충분한 합의가 필요하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을 중심으로 개인연금과 퇴직연금을 갖추고, 필요에 따라 주택연금이나 사망보험금 유동화를 활용하면 노후 생활비 부족을 효과적으로 보완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사망보험금 유동화는 종신보험의 본질을 부정하는 제도가 아니다. 오히려 보험을 삶의 전 과정에서 활용할 수 있게 확장한 장치다. 중요한 것은 제도 자체보다 활용 방식이다. 새로운 보험을 추가하기보다, 이미 보유한 보험과 자산이 현재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점검하는 것이 우선이다. 종신보험을 유지하는 것도, 일부를 유동화해 노후의 숨통을 트는 것도 모두 선택이다. 핵심은 그 선택이 ‘남을 위한 보험’이 아니라 ‘나를 위한 노후’로 이어지느냐에 있다.


정달식 부산일보 논설위원. 부산일보DB 정달식 부산일보 논설위원. 부산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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