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부산의 '관계인구'를 늘리자
장제국 동서대 총장
일본 국내유학 촉진 사업 성과 주목
청년과 지역 연결해 '관계인구' 촉진
에스토니아 세계 첫 '디지털 신분증'
수십만 명 참여, 수만 개 기업 설립해
수도권 집중 풀 해법, 한국에도 도입
부울경은 규슈 대학들과 연계도 가능
최근 일본을 방문하던 중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도쿄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 청년이 수도권 대학 재학 중 오키나와의 지방대학에서 한 학기를 보내게 되었고, 졸업 후 그 지역에 정착했다는 이야기였다. 수도권 대학과 지방대학 간 학점 교류 프로그램 덕분에 기숙사에 머물며 공부하고 지역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그 경험이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고 했다.
이러한 사례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 정부는 2026년도 예산에 ‘도시와 지방의 연계를 통한 국내유학 촉진 사업’ 예산 10억 엔을 새로 편성했다. 수도권 대학에 재학하고 있는 대학생들이 지방대학에서 공부하고 지역 기업과 연계한 인턴십과 프로젝트에 참여하도록 지원할 수 있는 사업을 만들어 예산을 배정한 것이다. 단순한 학점교류 차원에서 만든 사업은 아니었다. 청년들에게 “지방에 살아보니 괜찮다”는 경험을 제공하려는 국가 전략이다.
최근 일본의 지방소멸 대응 정책에서 가장 주목받는 개념이 바로 이러한 ‘관계인구’(關係人口)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자리 잡고 있는 ‘생활인구’와 유사한 개념으로, 해당 지역에 거주하지는 않지만 지속적으로 방문하고 배우고 일하며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이주하지 않는다. 먼저 경험하고 애정을 갖게 된 뒤 정착을 고민한다. 정주인구는 관계인구의 결과물인 셈이다.
발트해의 작은 나라 에스토니아는 이 개념을 국가 차원에서 실천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에스토니아는 2014년 세계 최초로 전자거주권(e-Residency)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시민권이나 영주권은 아니지만 전 세계 누구나 디지털 신분증을 부여받아 에스토니아의 행정·금융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이런 시스템 덕분에 디지털 신분증을 가진 사람들은 기업 설립과 운영, 세무 처리 등을 온라인으로 수행할 수 있으며 유럽연합(EU) 시장에도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전 세계 기업가와 디지털 노마드들이 에스토니아와 연결되기 시작했고, 뒤이어 놀라운 성과로 이어졌다. 현재 180여 개국에서 수십만 명이 전자거주권을 취득했고, 이를 통해 수만 개 기업이 설립됐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이 제도가 수억 유로 이상의 경제효과를 창출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람을 물리적으로 이주시킨 것이 아니라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새로운 경제공동체를 만들어낸 것이다.
부산 역시 관계인구 확대라는 관점에서 미래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수도권 집중을 단순히 막아야 할 위기로만 볼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부산과 연결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예를 들어 서울에 있는 대학 학생들이 졸업 전에 지방대학에서 한 학기 이상 생활할 경우 국가가 장학금을 지원하는 제도를 도입한다면 어떨까. 학생들은 학업은 차질없이 이어가면서도 관광객이 아닌 주민의 시선으로 지역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산·울산·경남과 일본 규슈를 연결하는 구상도 가능하다. 부울경과 규슈 지역 대학들이 연합해 학생들이 국경을 넘어 서로의 도시에서 한 학기씩 생활하도록 하는 것이다. 유럽의 에라스무스(Erasmus) 프로그램처럼 ‘부울경-규슈판 에라스무스’를 만든다면 두 나라 젊은 세대의 이동과 교류는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활발해질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87년 시작된 유럽의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은 지금까지 수백만 명의 학생들이 유럽 각국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도록 지원하며 국가 간 관계인구를 확대하고 유럽 통합의 토대를 다진 성공적인 정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부산은 또 에스토니아 사례를 참고해 외국인과 외지인 창업가들이 부산과 지속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부산형 디지털 거주제도’를 검토해 볼 수도 있다. 부산은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 법적 제약이 있겠지만, 중앙정부의 제도 틀 안에서도 창업·금융·행정 서비스를 패키지로 제공하는 모델은 충분히 가능한다는 판단이다. 더 나아가 부산만의 특례를 과감하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중앙정부와 정치권이 힘을 모아 지원에 나선다면 그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다.
오는 10월 말 부산에서 ‘제19회 부산-후쿠오카 포럼’이 개최된다. 부산과 후쿠오카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연결하자는 취지로 출범한 이 포럼은 이번에 ‘관계인구 확대’를 핵심 의제로 다룰 예정이다.
인구 감소 시대에 도시는 사람을 붙잡는 것만으로 더는 성장할 수 없다. 더 많은 사람과 자본, 아이디어를 끌어들이는 도시가 경쟁력을 갖는 시대다. 앞으로 부산은 수도권과 일본 규슈를 넘어 아시아와 세계를 연결하는 개방형 플랫폼으로 거듭나야 한다. 지경(地境)을 넓혀야 부산의 미래도 넓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