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클래리티 법안, 한국에 주어진 마지막 골든타임
류홍열 비댁스 대표·변호사
미국, 디지털 자산 제도화 임박
디지털 화폐 발행·관할 명문화
제도권 내 자유로운 유통 앞둬
한국선 '디지털자산법' 입법 표류
자본 국외 유출 등 피해 현실화
더 늦으면 '원화 코인' 시대 요원
6월 1일, 미국 상원 본회의 의사일정에 ‘디지털 자산 시장구조법’(CLARITY Act)이 정식 등재됐다. 지난달 14일 상원 은행위원회를 초당적 표결로 통과한 데 이은 후속 절차다. 의회가 8월 휴회에 들어가기 전 본회의 표결이 이뤄진다면, 미국은 2025년 7월 시행에 들어간 스테이블코인 규율법(GENIUS Act)에 이어 두 번째 디지털 자산 입법을 완성하게 된다. 시장구조법과 스테이블코인법을 분리해 단계적으로 통과시키는 미국의 입법 전략은, 십수 년간 모호한 권한 다툼 속에 갇혀 있던 디지털 자산 시장을 마침내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결정타로 평가받는다.
두 법안의 의미는 분명하다. GENIUS법이 ‘디지털 화폐’의 발행과 유통에 관한 연방 차원의 통일된 규칙을 세웠다면, CLARITY법은 디지털 자산을 디지털 상품과 투자 계약 자산으로 나누어 각각 CFTC와 SEC의 관할로 분명히 정리한다. 그동안 발행 기업과 거래소, 투자자 모두를 괴롭히던 ‘이것이 증권인가 상품인가’의 회색지대가 해소되는 것이다. 코인베이스, 서클, 리플 같은 산업계는 물론, 그동안 신중한 태도를 보이던 월가의 자산운용사들까지 이 법안 통과를 일제히 기다리는 이유다. 규칙이 분명해지면 자본은 빠르게 들어온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디에 서 있는가. 지난해 출범한 새 정부의 강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원화 스테이블코인과 시장구조를 함께 다루겠다던 ‘디지털자산기본법’은 1년 가까이 국회에 머물러 있다. 지방선거가 끝나고 정치 일정이 다소 정리됐지만, 입법의 동력은 여전히 약하다. 한 번에 모든 쟁점을 풀려는 ‘통합 입법’ 방식이 오히려 발목을 잡고 있다는 인상마저 든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미국이 이 어려운 작업을 ‘분리 입법’으로 풀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스테이블코인은 결제 인프라, 시장구조는 자본시장 질서라는 서로 다른 성격을 인정하고, 합의가 가능한 영역부터 차례로 매듭지은 것이다. 반면 한국은 모든 쟁점을 하나의 법안에 담으려다 보니, 어느 한 쟁점에 합의가 늦어지면 전체가 멈춰 서는 구조다. 입법의 속도가 곧 산업의 속도이고, 그 속도의 격차가 결국 시장의 격차로 굳어진다.
지체의 비용은 이미 눈에 보인다. 한 블록체인 보안 업체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스테이블코인 거래 규모는 최근 1년간 640억 달러에 달했다. 거래의 대부분은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매개로 한 해외 자산 진입이다. 한국 투자자의 자본이, 한국의 결제·송금 인프라가, 한국이 만들지 못한 디지털 화폐를 통해 빠져나가고 있는 셈이다. 한 번 자리 잡은 결제 표준은 규제가 정비된 뒤에도 쉽게 되돌아오지 않는다. 미국의 CLARITY법이 통과되어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연방 인증’이라는 법적 옷까지 입게 되면, 그 흐름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완벽한 입법이 아니라 ‘우선 가능한 입법’이다. 첫째, 원화 스테이블코인부터 먼저 매듭지어야 한다. 발행 주체에 대한 이견은 시행령과 인가 심사 단계의 유연성으로도 풀 수 있다. 큰 틀의 법적 정의와 준비자산 요건, 이용자 보호 장치만 갖춰진다면 시장은 그 위에서 자라난다. 둘째, 시장구조법은 디지털 자산의 분류와 감독 권한의 분배에 집중해 별도 트랙으로 추진해야 한다. 자본시장법과의 정합성이라는 무거운 숙제는 분리해서 다뤄야 일정을 지킬 수 있다. 셋째, 커스터디·청산·결제 같은 인프라 영역의 인허가 체계를 선제적으로 정비해, 법안 통과와 동시에 시장이 움직일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
특히 이 변화는 부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해양수산부와 HMM의 부산 이전으로 ‘해양 금융 도시’로의 도약 기반이 마련됐지만, 그 위에 얹힐 디지털 금융 인프라가 없다면 절반의 성공에 그친다. 미국의 CLARITY 체제가 자리 잡으면 글로벌 디지털 자산 자본은 빠르게 재편될 것이고, 그 흐름을 부산이라는 도시가 받아내기 위해서는 중앙의 입법과 별개로 지역 단위의 규제 샌드박스, 시범 사업, 인재 양성 채널이 동시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다른 도시가 아닌 부산이어야 하는 이유는, 결국 ‘준비된 도시’만이 그 자본을 끌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의회가 디지털 자산 시장구조법을 본회의에 올린 이 시점은, 한국에도 주어진 마지막 골든타임이다. 미국이 입법을 마치고 시행령과 감독 규정을 다듬는 데 들어가는 1~2년의 공백기야말로, 한국이 따라잡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창이다. 이 시기를 놓치면 디지털 화폐 시대의 결제·자본 흐름은 우리 손에 닿지 않는 곳에서 굳어질 것이고, 그때 가서 만들어 낸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선택지’가 아니라 ‘대안’으로 남게 된다. 입법은 정치이지만, 동시에 산업이고 또 시간의 문제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만들어진 표준’을 받아쓰는 자리에 머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