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멈춰 선 블록체인 특구, 골목에서 답을 찾다
심준식 비온미디어 대표
부산 특구 416억 투입 불구 '개점휴업'
실증과제 중단·외국인 직접투자 전무
부산 방문 외국인 관광객 매년 급증
대중교통 이용·식당 예약 어려움 많아
대학, 블록체인 기반 '캠퍼스 지갑' 추진
생활 불편 해결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최근 부산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보도가 있었다. 국내 유일의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출발했던 부산 특구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에 놓였다는 내용이다. 6년간 416억 원이 투입됐지만 2022년 이후 신규 실증과제는 끊겼고,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 실적은 없으며, 입주 기업 수도 4년째 17개사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었다. 더 아픈 대목은 숫자가 아니라 존재감이다. 업계 사람들조차 “부산에 블록체인 특구가 있었느냐”고 되묻는 상황이라면, 성과를 따지기 이전에 특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부터 다시 물어야 한다.
그런데 같은 시기, 부산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지난해 부산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364만 명을 넘었고, 관광 지출액도 1조 원을 돌파했다. 해운대와 광안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감천문화마을, 전포카페거리, 깡통야시장, 골목 맛집과 축제 현장까지 외국인들은 부산 구석구석을 걷고, 먹고, 찍고, 공유한다. 한쪽에서는 수백억 원을 들인 기술 특구가 멈춰 섰고, 다른 한쪽에서는 돈 들이지 않은 도시의 매력이 세계인을 불러들이고 있다. 부산 블록체인이 풀어야 할 다음 과제는, 바로 이 대비 속에 있다.
관광객의 설렘은 의외로 사소한 장면에서 멈춘다. 버스에 오른 외국인이 해외 카드를 꺼내지만 단말기는 반응이 없다. 교통카드는 없고, 충전하려면 현금이 필요하다. 식당 예약 앱은 국내 휴대전화 번호를 요구하고, 공연 예매는 본인 인증 앞에서 막힌다. 택시도, 숙소도, 골목 가게도 사정은 비슷하다. 손님은 돈을 쓰고 싶어 찾아왔는데, 도시는 그 돈을 받는 절차에서 멈칫한다. 실패한 결제 하나는 포기한 커피 한 잔이 되고, 못 탄 택시 한 번이 되고, 취소된 공연 표 한 장으로 남는다. 작은 불편처럼 보이지만, 쌓이면 결국 도시가 흘려보낸 매출이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이 눈에 띈다. 부산은 6년간 블록체인 특구에 적지 않은 돈을 쏟고도, 정작 블록체인으로 풀 수 있는 이 작은 불편 하나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니 질문을 바꿔볼 만하다. “특구가 잘했나 못했나”가 아니라 “부산의 블록체인은 그동안 누구의 불편을 풀어줬는가”다. 전문가들이 가장 큰 패착으로 꼽는 건, 블록체인을 마치 공장 짓듯 다루려 했다는 점이다. 본래 여러 서비스와 연결되며 함께 자라는 기술을, 부산은 정해진 울타리 안에서만 키우려 했다. 진짜 불편에서 출발하는 대신 ‘기술을 키울 공간’부터 그린 것이다. 지난 일을 탓하자는 게 아니다. 출발점을 바꿔보자는 이야기다.
다행히 그 작은 실험은 이미 부산에서 싹트고 있다. 부산의 한 대학은 외국인 유학생들의 불편에 주목했다. 학생증 발급과 재학 증명, 그리고 무엇보다 해외에서 한국으로 학비를 보낼 때의 번거로움이었다. 송금 한 번에 수수료가 붙고 며칠씩 걸리는 일이 예사다. 이 대학은 블록체인 기반의 ‘캠퍼스 지갑’을 준비하고 있다. 휴대전화 속 학생증과 디지털 증명서에서 시작해, 외국인 학생의 학비 납부, 나아가 지역 은행과 손잡은 교내 결제까지 한 걸음씩 넓혀가는 그림이다. 거대한 정부 사업이 아니라, 학생이 매일 부딪히는 불편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미 서울의 한 대학은 블록체인 학생증으로 건물 출입과 도서관, 전자 출결을 하나로 묶어 검증을 마쳤다. 부산이라고 못 할 이유가 없고, 외국인 비중이 높은 만큼 오히려 더 절실하다.
상상을 한 뼘만 넓혀보자. 학생의 지갑이 도시의 지갑이 된다면 어떨까. 외국인 관광객의 결제와 교통, 예약, 관광 패스, 세금 환급, 안전 인증까지 하나로 묶는 ‘부산월렛’ 말이다. 국적과 상관없이 휴대전화만 있으면 바로 만들고, 카드 없이도 골목 가게에서 결제되는 지갑. 부산이 그토록 바라던 ‘더 오래 머물고, 더 많이 쓰게 하기’는 결국 이런 작은 마찰을 지우는 데서 시작된다.
이 흐름은 머지않은 미래와도 맞닿는다. 곧 AI 비서가 사람을 대신해 식당을 예약하고, 택시를 부르고, 입장권을 사주는 시대가 온다. 그런데 AI에게 내 신용카드 번호를 통째로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얼마까지, 언제, 어디에만 쓸 수 있다’고 미리 한도를 걸어둔 지갑이 필요해진다. 세계적 기업들이 올해 잇따라 선보인 AI 결제 기술이 하나같이 블록체인 지갑 위에 세워진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부산이 데이터센터를 미래 먹거리로 키우겠다면, 그 위에서 돈이 오갈 통로 역시 지금부터 그려둬야 한다.
부산은 지난 6년간 블록체인 도시의 토대를 다지는 데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 다만 그 위에 무엇을 올릴지에 대한 답은, 이제 현실의 불편에서 찾을 때가 됐다. 외국인 관광객이 골목에서 지갑을 열다 멈칫하는 순간, 유학생이 학비 송금과 구내식당 결제 앞에서 헤매는 순간. 이런 생활 속 작은 불편을 푸는 데서 다시 출발하면 된다. 멈춰 선 특구라는 평가도, 부산이라면 충분히 다른 이야기로 바꿔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