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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무엇이 그리도 두려운가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외무부장 김규식, 재무부장 조만식, 군사부장 김원봉, 사법부장 김병로, 체신부장 신익희…. 1945년 9월 8일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면면이다. 조선인민공화국은 해방 직후 자생적인 건국 운동이던 건국준비위원회를 확대·개편해 조직됐다. 이를 주도한 주체는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그런데 그 인적 구성이 의아하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 조만식, 김병로 등 주요 부처 수장 상당수가 우익 인사다. 더구나 박헌영은 내각에서 뺐다.
미군 진주가 임박한 상황에서 조선공산당은 다급했다. 좌익 인사만으로 정부를 구성할 경우 무엇보다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 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우익 인사를 전면에 내세우고 조선공산당은 배후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을 조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전형적인 통일전선전술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으나, 여하튼 조선공산당의 시도는 실패했다. 미군의 영향도 있었고 우익 인사들의 반발도 컸지만, 무엇보다 당시 민중의 정서가 조선공산당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78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가 이념 논쟁으로 시끄럽다. 광주광역시가 열려는 정율성 음악제를 두고 정부·여당이 비난을 쏟아붓더니, 곧이어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흉상 철거(또는 이전) 여부를 놓고 온 나라가 홍역을 앓고 있다. 정율성도 홍범도도 항일투쟁의 공로는 기림을 받기에 충분하지만, 각각 ‘중공’과 ‘소련’에 연관된 이력 때문에 찬반 논란의 소용돌이에 말려 들었다. 이들을 비난하는 측은 ‘국가에 해를 끼친 인물’로 낙인찍은 채 전문 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해석에는 눈과 귀를 닫는다.
작금의 이런 이념 논쟁이 전혀 뜬금없는 건 아니다. 윤석열 정부가 시작되면서 주요 직책에 임명된 인사들의 면면에서 이미 충분히 짐작됐다. 특히 국가 안보를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실과 내각 책임자들 중 상당수가 자유와 반공을 유달리 강조해 왔다. 이들 중 몇몇 인사들에 대해 일각에선 극우 또는 뉴라이트라는 타이틀을 붙여 비난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런 형편이니 윤석열 대통령이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는 반국가세력” 운운하며 이념 논쟁의 선두에 나서는 모습은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
자유와 반공을 외치는 심리의 근저에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보다 직접적으로는 북한에 대한 불안이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이는 한국전쟁이라는 참상을 겪은 이후 어쩔 수 없이 배태된 우리 국민의 본능적 감정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7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체제 경쟁의 승패는 확연히 드러났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나 국제적 위상 등 모든 면에서 지금 남한은 북한에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다. 우려하던 군사력에서도 남한의 우위가 확인된다. 비정부기구인 ‘글로벌 파이어 파워’(GFP)가 올해 6월 발표한 ‘2023년 세계 군사력 지수’를 보면 남한은 미국, 러시아, 중국, 인도, 영국에 이어 세계 6위다. 북한은 겨우 34위다.
이쯤이면 남한과 북한의 체제 경쟁은 이미 끝난 게임이다. 정율성이나 홍범도 같은 인물들을 남한 사회가 수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체제 경쟁에서 완승했다는 그런 자신감이 배경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이제는 달라졌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윤 대통령도 지난달 15일 광복절 축사에서 반국가세력을 언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한민국과 북한의 극명한 차이가 여실히 드러났다”고 강조하지 않았나.
이미 끝난 게임에 호들갑은 공연한 낭비일 뿐이다. 반국가세력? 혹시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 봐야 한 줌도 안 되는 그들의 주장과 행태 따위에 흔들릴 만치 우리 사회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정율성이든 홍범도든 그들의 행적을 애써 숨겨 가며 미화할 필요도 없고 막연한 의심과 두려움에 내칠 필요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다 밝혀 두면 된다. 그게 강자의 면모다. 78년 전 조선인민공화국을 거부했던 민중인데, 체제 경쟁에서 완승한 지금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압도적인 힘에 의한 평화”라고 하는데, 이미 남한의 국력은 북한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핵 도발? 원래 약한 이들이 공갈하는 법이다. 국제 사회에 “나 좀 봐 달라”며 부리는 북한의 투정일 따름이다. 실질적인 위협이 된다고? 걱정 마시라. 우리에겐 ‘굳건한’ 한미 동맹이 있다. 올해 4월엔 윤 대통령의 방미로 미국의 핵우산을 구체화한 ‘한미 핵협의그룹(NCG)’까지 만들어졌다. 여차하면 하늘에선 미국 전략폭격기가, 바다에선 미국 핵 항모가 전개될 것이다. 거기다 지난달 18일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의로 3국간 안보협력체가 공고화하면서 북핵 대응력은 한층 높아졌다. 도대체 두려울 게 무엇인가.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2023-09-0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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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방산 수출, 성과도 좋지만 최대한 은밀해야
윤석열 정부의 무기 등 방산 수출 성과가 눈부시다. 지난달 27일 들려온 소식은 하나의 작은 사례다. 국내 한 방산업체가 호주로부터 대규모의 장갑차 계약을 따냈다는 게다. 2027년부터 총 129대의 장갑차를 비롯해 각종 군사설비를 납품하게 됐다는 내용인데, 그 규모가 최소 60억 호주달러(약 5조 2000억 원)에 이른다.
해당 업체는 내친김에 루마니아 등 동유럽으로 수출 전선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번 계약 성공은 국산 장갑차 성능의 우수성과는 별도로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정부의 적극적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후문이다.
실제로 윤 대통령은 두 차례(올해 5월 일본 히로시마에서의 G7 정상회의와 지난달 리투아니아에서 열린 NATO 정상회의 때)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를 만나 방산 수출 관련 의견을 나누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윤석열 정부 들어 방산 수출이 급증했음은 올해 2월 발간된 〈국방백서〉에서 확인된다. 그에 따르면 지난해 대규모 수주 계약이 잇따라 체결돼 한국의 방산 수출이 역사상 최대 규모인 173억 달러(약 22조 원)의 실적을 올렸다. 백서는 또 방산 수출 대상 지역이 중동·아시아 위주에서 유럽까지 확장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방산 수출은 돈으로 환산되는 이득이 많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으로선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대규모 고용효과도 노릴 수 있다. 이 때문에 역대 정부는 방산 수출에 공을 많이 들였다.
이명박 정부 때 방산업을 국방 개념에서 수출 개념으로 전환했고,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 역시 같은 기조를 유지했다. 이 덕분에 2016년만 해도 세계 방산 수출 시장에서 1% 점유율에 그쳤던 한국은 5년 만인 2021년에는 2배 이상 증가한 2.8%의 점유율로 세계 8위를 기록했다.
윤석열 정부는 이런 추세를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지난해 7월 폴란드와 124억 달러(약 16조 원)에 해당하는 수출 계약을 체결한 것은 그 절정이었다. 단일 계약으로는 한국 역대 방산 수출 사상 최대 규모였던 것이다.
이는 윤 대통령이 지난해 6월 스페인에서 열린 NATO 정상회의에서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을 만나 방산 협력을 논의한 직후에 이루어진 성과였다.
어쩌면 윤 대통령의 최대 치적이 될 수도 있겠는데, 여하튼 정부는 이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2027년까지 방산 수출 시장점유율을 5%로 높여 미국, 러시아, 프랑스에 이어 세계 4위의 방산 수출국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즈음에서 돌아봐야 할 대목이 있다. 방산 수출은 살상 무기를 파는 행위인데, 이게 크게 늘었다고 해서 마냥 반길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무기를 수출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전쟁을 전제로 한다. 무기는 전쟁을 통해서만 가치를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거칠게 말하면, 한국도 무기를 많이 팔기 위해서 점점 전쟁이 필요한 나라가 돼 가고 있는 셈이다.
방산 수출은 동전의 양면 같은 성격을 갖는다. 무기를 수입하는 국가는 반기겠지만, 그 수입국과 갈등 중인 상대국은 무기를 파는 당사국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폴란드와 역대 최대 방산 수출 계약을 맺었지만, 러시아 입장에선 이게 상당히 위험하게 비칠 수 있다. 폴란드가 무기를 수입하는 건 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러시아를 상대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어디까지나 폴란드라는 개별 국가와의 비즈니스일 뿐”이라고 아무리 주장해 봐야 러시아에 통하기 어렵다. 입장을 바꿔, 러시아가 북한에 대규모 무기를 수출한다면 우리 기분은 어떻겠는가.
도의적 명분으로도 방산 수출은 자랑거리가 못 된다. 수출되는 무기는 기본적으로 인명을 해치는 상품이고 그래서 당하는 쪽에겐 공포의 대상이다.
문재인 정부를 비롯한 이전 정부는 겉으론 평화를 강조하면서도 뒤로는 방산 수출 확대에 주력했다. 부끄러운 이율배반이라는 비판이 나올 법도 하다. 요컨대 방산 수출은 드러내 놓고 알릴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마약 많이 팔았다고 자랑할 수 없는 것처럼.
방산 수출이 미래 성장 동력일 수는 있다. 특히 지금처럼 반도체를 비롯해 수출이 급감하는 현실에서 방산 수출 증대는 우리 경제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국가수반과 정부가 공개적으로 나서서 “세계 최대 무기 수출국 대열에 오르겠다”고 외칠 일은 아니다. 방산 수출은 최대한 은밀하게 진행해야 한다.
2023-08-01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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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170석, 그 달콤하고 치명적인 유혹
170석!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여권 관계자들이 모인 사적인 자리에서 제시한 내년 ‘국회의원 선거’(총선)에서의 목표 의석수라고 한다. 이를 두고 왈가왈부 말들이 많다. 22대 총선 예정일이 내년 4월 10일이니 앞으로 9개월 남짓 남았다. 170석이면 ‘거대 야당’이라고 불리는 더불어민주당이 현재 보유한 의석수와 맞먹는다.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해야만 가능한 의석인데, 윤 대통령의 ‘170석 목표’는 단순한 희망 사항일까 아니면 정밀한 계산의 결과일까.
공교롭게도 170석은 올해 초 국민의힘 전당대회 때 당 대표 후보로 나섰던 안철수 의원이 호언장담했던 목표 수치다. 안 의원은 당시 ‘170V’라는 이름으로 캠프 출정식도 가졌다. ‘170V’는 내년 총선에서 170석 승리를 따내겠다는 의미였다. 안 의원은 자신이 수도권에서 경쟁력을 갖고 있다면서 “수도권 121석의 과반인 70석을 차지하면 비수도권에서 확보할 수 있는 100석에 더해 170석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의 170석 확보는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19대 총선이 있었던 2012년. 지금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까지 심기일전해 총선을 치렀다. 그렇게 해서 얻은 의석수는 152석. 그전 2008년의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153석을 얻는 데 그쳤다. 당시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불과 2개월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도 국회 과반 의석을 가까스로 넘길 수 있었다. 170석을 얻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지금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30%대에서 정체 중이고, 국민의힘이 민주당에 지지율로 밀린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과 안 의원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170석을 콕 짚어 말한 걸까.
이와 관련해 정치분석가인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이 여러 언론을 통해 밝힌 내년 총선 전망이 화제가 되고 있다. 엄 소장은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 180석 압승’을 정확히 예측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지금 분위기라면 내년 총선에서 국민의힘은 170석을 얻는 반면 민주당은 120석 달성도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의 이런 예측치에 대해 온라인상에서는 갑론을박이 치열하다. 특히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는 엉터리 예측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엄 소장의 전망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가 있다.
엄 소장이 주목한 부분은 유권자 지형 변화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지난해 6월 지방선거 세대별 투표율 자료에 따르면 국민의힘 지지 성향이 강한 60대 이상은 40%로 이전 선거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4050 세대는 37%로 하락세였고, 2030 세대는 22.9%로 매우 낮았다. 2030 세대 중 특히 남성들의 정당 지지율에서 민주당은 국민의힘에 비해 열세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20대 남자에서 국민의힘 34% 민주당 19%, 30대 남자에서 국민의힘 38% 민주당 27%라는 것이다. 요컨대 2030 남성 유권자가 현재의 분석대로 투표하면 민주당의 대패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엄 소장은 그러면서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와 총선에서의 표심이 꼭 일치하는 건 아니라고 지적했다.
선거가 아직 9개월 이상 남은 시점에서 이런 전망이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는 무리지만, 여하튼 국민의힘은 윤 대통령이 제안한 170석을 향해 이미 총진군에 나선 듯하다. 당내에선 검사 출신을 비롯한 윤 대통령 측근 공천설 등 일부 반발과 균열의 모습이 보이고 야권에선 윤 대통령의 ‘170석 목표’ 언급이 선거 개입이라는 비판을 제기하지만, 국민의힘 지도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이다.
태생적으로 정권 획득이 목표일 수밖에 없는 정당으로서 선거에서의 승리, 이왕이면 압도적 승리는 더없이 중요한 가치일 테다. 윤 대통령으로서도 자신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을 갖는 내년 총선에서 국회 과반 의석 확보는 차후 국정 운영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윤 대통령의 170석 운운과 그에 발맞춘 여당의 총력 태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돌아봐야 할 게 있다. 170석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승리에 앞서 어디까지나 원칙과 정도를 지킨다는 의지를 갖고 실천해야 한다. 이기는 데 매몰돼 편법과 꼼수를 동원하고 심지어는 국민을 편 갈라 서로 적대하게 만듦으로써 이득을 취하는 행태는 없어야 한다. 원칙과 정도가 중요하다는 건 민주당의 현재 모습에서 새삼 확인할 수 있다. 21대 총선에서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민주당의 현재 모습은 초라하다. 170석 안팎의 의석을 갖고도 전혀 힘을 쓰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하고 비도덕적이며 무책임하다는 비난까지 듣는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국민의힘은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2023-06-2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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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윤석열 정부의 경제 정책 기조에 대해 “민생 안정을 위한 경제지표를 찾아볼 수 없고, 경제 정책이라는 게 그냥 무(無)의 상태”라고 비판했다. 지난 16일 CBS 라디오에 출연해서 그리 말했다. 그래도 한때는 “별의 순간” 운운하며 윤 대통령을 한껏 치켜세우던 김 전 위원장인데, 왜 이렇게 모진 말을 했을까.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곰곰 돌아보면 전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싶다.
김 전 위원장의 비판이 있기 하루 전인 지난 15일 대한상공회의소가 꽤 흥미로운 자료를 발표했다. 윤 대통령의 취임 후 1년간 연설문 190건을 분석했더니, ‘경제’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557번) 언급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한 경제는 그의 지난 국정 운영에서 얼마나 치중됐고 또 성과를 거뒀을까.
아쉽게도 경제 전문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박한 편이다. 윤석열 정부에게서 경제가 잘 안 보인다는 것이다. 그나마 눈에 띄는 건 한·일 관계 정상화에 따른 경제적 효과인데, 수출 등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실제 얼마나 큰 효과를 가져올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현재 각종 지표에서 위기 징후가 포착된다는 점이 문제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 11일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5%로 전망했다. 지난 2월 1.8%를 제시했는데, 3개월 만에 0.3% 포인트 낮췄다. 그전에 정부와 한국은행이 제시한 전망치는 1.6%였다. 여하튼 통계 작성 이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2%에도 미치지 못하는 건 오일쇼크의 1980년, 외환위기 때인 199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코로나19가 확산하던 2020년에나 볼 수 있었던 일이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으로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수출의 급격한 감소세가 지목된다. 수출은 지난해부터 계속 줄고 있고 올해 들어서도 추세는 바뀔 조짐이 없다. 이달 들어서만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16.1%나 줄었다. 이 탓에 무역적자는 15개월 연속 이어지고 있다.
수출이 안 되면 내수라도 살아나야 하는데 그마저도 비관적이다. 코로나19 이후 살아나는 듯했던 소비는 작년 말 이후 계속 내리막이다. 투자나 고용 등 다른 내수 전망도 어둡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물가는 고공행진이고 금리는 내릴 줄을 모른다. 수출도 안 되고 내수도 살아나지 않으니 경기는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거기다 우크라이나 사태 등 외부 환경에도 악재만 더해질 뿐이다.
정부는 국내 경기가 올해 하반기에는 나아질 거라고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일부 전문가들은 오히려 하반기에는 더 힘들어질 수 있다며 우리 경제가 전에 없는 혹한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국민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다. 무엇보다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전기 요금, 가스 요금, 식자재 요금, 교통비 등 시쳇말로 월급 빼고는 안 오르는 게 없다. 서민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전기와 가스 요금의 경우 올해 1분기에만 1년 전보다 30.5%나 올랐다. 이는 1988년 외환위기 이후 최고치라고 한다.
더 답답한 건 이런 사태가 지난해 이미 충분히 예상됐는데도 정부는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단지 국외 여건에 따른 형편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할 따름이다. 하지만 국민 눈에는 정부가 경제에 너무 신경을 안 쓰는 것으로 비친다. 서민들은 아우성일 수밖에 없다.
봇물처럼 이어지는 개인회생 신청이 좋은 예다. 개인회생은 경제적 파탄으로 빚 갚을 능력이 없는 채무자가 최저생계비라도 확보할 수 있게 빚을 줄여 달라고 법원에 요청하는 행위다. 개인회생 신청이 증가한다는 건 그만큼 궁지에 몰린 서민이 많다는 의미다. 통계에 따르면 올해 3월 법원에 신청된 개인회생은 1만 1200여 건이다. 월간 개인회생 신청 건수가 1만 건을 웃돈 것은 2014년 7월 이후 처음이다. 같은 이유로 자영업자도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지난해 말 자영업자 대출 잔액은 1019조 8000억 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윤 대통령은 그동안 외교·안보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로 인해 한·미 동맹의 틀에 일본까지 가세하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된다. 이제는 경제, 특히 서민 경제도 돌아봐야 한다. 이는 외교·안보보다 더 근원적이고 필수적인 국정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경영의 으뜸은 경제라는 사실이 강조됐다. 경제는 곧 민생이고 민생을 살리는 일이 국정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옛말에 “나라의 근본은 국민(백성)이고, 먹는 일은 국민이 하늘로 여기는 바다”(民惟邦本 食爲民天)라고 했다. 다른 모든 가치에 앞서는 게 먹는 것, 곧 경제라는 뜻이다.
2023-05-23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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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AI 규제는 남의 나라 이야기? 천만에!
AI(인공지능)가 내 통장 비밀번호를 해킹한다? 그런 일이 실제 가능하다는 소식이 최근 전해졌다. 미국의 한 보안 업체가 AI에게 사람들의 비밀번호 작성 패턴을 학습시킨 뒤 특정 계정의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실험을 진행했는데, 대부분의 비밀번호를 1분 이내에 풀어냈다는 것이다. 숫자에다 영어 대·소문자, 기호 등을 포함한 7자리 고난도의 비밀번호도 불과 6분 만에 알아냈다고 한다.
호주에서는 한 현직 시장이 챗GPT에 의해 범죄자로 몰렸다며 챗GPT 개발사인 오픈AI를 고소하는 일이 있었다. 2000년대 초 호주조폐공사(NPA) 뇌물 사건에 연루됐다는 건데, 해당 시장은 NPA와 관련해 어떤 혐의로도 기소된 바 없다고 한다. 미국에선 AI로 딸의 목소리와 말투를 복제한 뒤 부모에게 들려 주며 딸을 납치했으니 거액을 보내라고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AI는 딸이 SNS에 3초 간 올린 영상 속 목소리를 학습해 재현한 것으로 밝혀졌다.
AI로 인한 범죄 가능성이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우려는 개인을 넘어 기업이나 국가로까지 확대된다. 온라인상에서 이미 무불통지요 무소불위인 AI 아닌가. 특정 기업의 핵심 기술 소스에 무단으로 접근해 빼내거나 국민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국가 기밀을 적대국에 퍼뜨린다면? 그 피해는 상상을 넘어서는 것일 테다.
기업들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JP모건이나 씨티그룹, 골드만삭스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세계적 금융업체들은 벌써부터 챗GPT 등 AI의 무분별한 사용에 제동을 걸었다. 국내에서도 삼성전자가 지침을 만들어 사내 챗GPT 사용을 제한했고, SK하이닉스는 아예 사내망을 이용한 챗GPT 사용을 차단했다.
국가 차원에서 AI 사용을 규제하겠다는 움직임도 확연하다. 이탈리아는 지난 1일부터 개인의 챗GPT 접속을 한시적으로 금지했다. 현재로선 챗GPT가 개인이나 기업 등의 정보를 제대로 보호한다고 믿을 근거가 없으니, 그 근거가 확실해지면 접속을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이탈리아가 이처럼 강력한 제재 의지를 밝히자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등 유럽은 물론 미국과 캐나다 등 미주 국가들도 동조하고 나섰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챗GPT 등 AI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려는 이런 움직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오히려 여러 규제를 완화해 AI 산업의 덩치를 키우는 쪽으로 정책의 방향을 잡고 있다. 이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 14일 개최한 ‘디지털플랫폼정부 실현 계획 보고회’에서 거듭 확인됐다. 이날 보고회에선 최근 챗GPT 열풍에 부응해 AI 산업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초거대 AI 경쟁력 강화 방안’이 발표됐다. 올해에만 39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해 민간의 AI 개발과 고도화를 지원하는 인프라를 확충하고, 관련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한편, 혁신적인 AI 제도·문화 정착을 추진한다는 게 골자다. 그렇지만 AI 확대에 따른 정보 유출이나 권리 침해 등을 예방하기 위한 정책이나 대안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지난달 28일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미래생명연구소(FLI)가 현재의 ‘GPT-4’보다 더 강력한 AI 개발을 6개월 이상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세계 곳곳의 AI 연구소에 보냈다. 지금 AI 개발 속도가 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니 잠시만이라도 유예 기간을 두자는 것이다. 이 서한에는 5000명 이상이 지지서명을 했는데,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 애플 공동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 작가 유발 하라리 등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AI가 몰고 올 변화와 부작용에 대한 두려움이 그만큼 큰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우리나라도 AI 개발 및 사용에 대한 규제 논의가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서구 여러 나라에서 적극 대응에 나선 것에 비하면 다소 늦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들의 주장을 곰곰 들여다보면 현재 수준에서 AI에 대한 규제는 규제 자체보다는 신뢰성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AI로 인한 정보 유출이나 왜곡된 데이터 제공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혼란은 말할 것도 없고, AI에 대한 불신이 가중될수록 해당 산업 자체가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AI 산업 활성화를 위해서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제 막 성장 기로에 있는 AI 환경을 두고 지나친 걱정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AI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일 뿐이다. 지금은 초거대 AI 경쟁력 강화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인간과 AI가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 만사불여튼튼 아닌가.
2023-04-18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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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대통령의 여당? 여당의 대통령?
결국 국민의힘 당원들은 ‘윤심’을 택했다. 8일 전당대회에서 김기현 후보가 과반 득표로 결선 투표 없이 당 대표로 선출된 것이다. 이번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윤석열 대통령의 마음, 즉 윤심으로 시작해 윤심으로 끝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초 미미한 지지율을 기록했던 김 후보가 당선된 건 오롯이 윤심에 의존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번 전당대회는 국민의힘 앞날에 피할 수 없는 과제를 남겼다. 당정분리냐 당정일체냐,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이다.
기실 국민의힘은 이번 전당대회를 치르면서 대통령실 입장을 사실상 대부분 수용했다. 대통령의 당무 개입 논란과 정당 민주주의 원칙 훼손 비판에도 비대위 지도부는 ‘대통령의 뜻을 잘 살피는 후보가 대표가 돼야 윤석열 정부가 성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강요했다. 당정일체를 우선순위에 둔 것이다. 당 일각에서 윤 대통령을 명예 대표로 추대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반면 이른바 비윤계 쪽에서는 당이 대통령과 어느 정도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윤석열 정부의 성공에 더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폈다. 자칫 당이 대통령에 일방적으로 종속되면 결국 대통령의 독선으로 이어져 당과 윤석열 정부가 함께 몰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국민의힘 내부에선 당정분리 원칙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에 대한 논의가 급부상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 수립 후 대통령제를 유지하면서 오랜 기간 우리나라 여당과 대통령의 관계는 철저한 당정일체였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이 집권당 총재를 겸하면서 인사·공천·재정권을 장악해 ‘제왕적 대통령’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당연히 삼권분립이라는 헌법적 원칙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를 타파하자고 나선 이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그는 “대통령이 당을 장악해 의회를 지배하는 것은 유신 잔재”라며 당정분리를 선언했다. 대통령이 당 총재로서 당을 지배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하향식 당 운영을 막고 대통령의 당직 임명권과 공천권을 확실하게 배제하는 것이 당정분리라고 밝혔다. 이후 당시 집권여당이던 민주당은 당헌에 대통령 당원의 지위와 역할을 규정하면서 당정분리 원칙을 명시했고, 그 영향을 받아 현 국민의힘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한나라당도 당정분리를 지향하는 당헌 개정을 단행했다. 이후 우리 정치에서 당정분리는 하나의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여당과 대통령의 관계를 칼로 무 베듯 확연히 자르는 건 불가능하다.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대통령을 배제하는 정치를 한다는 건 처음부터 어불성설인 것이다.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고 협조하는 게 집권여당으로서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다. 실제로 여당이 당정분리 원칙을 고수하면서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 주지 않을 때 국정 운영이 무기력증에 빠지는 사례를 과거 여러 정권에서 보아 온 터다.
이를 절실하게 느낀 이가 문재인 전 대통령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 전 대통령이 보여 준 국정 운영은 ‘당정은 원팀’이라는 노선 위에서 진행됐다는 것이다. 사실상 당정일체를 강조한 셈으로, 문 전 대통령은 당정분리 원칙 때문에 참여정부가 실패했으며, 나아가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 결말을 초래한 것으로 본 듯하다. 문 전 대통령의 이러한 노선은 그러나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함으로써 당위성을 잃었다고 하겠다.
정당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의 중심은 개인이 아니라 정당이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무소속으로 출마하지 않은 이상 대통령의 정권은 당으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국민의힘 당헌·당규에는 ‘당정은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하여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때 강조된 건 ‘협조’ 체제다. 협조는 상명하복과는 다르다. 수평적이고 대등한 관계로서 서로 힘을 모으는 게 협조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당도 입법부의 일원이다.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이다. 삼권분립을 원칙으로 하는 우리나라에서 입법부는 행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집권여당으로서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해야 한다는 뜻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전당대회가 끝난 지금 국민의힘은 당정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최대의 당면 과제가 됐다. 당정 간 적절한 힘의 균형에 대해 국민의힘이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어느 경우든 분명한 건 과거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답습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김기현 대표는 8일 당선 직후 JTBC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뜻과 국민의 뜻이 다를 경우 당연히 국민이 우선”이라고 발언했다. 윤 대통령도 당무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수차례 공언했다. 그럼에도 지금 국민은 묻는다. 윤 대통령의 국민의힘인가, 국민의힘의 윤 대통령인가.
2023-03-0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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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산업은행 부산 이전과 부산 사람
찜찜하고 불쾌했다. 부산 이전을 추진 중인 산업은행(산은)의 임직원들을 달래기 위해 부산시가 준비하고 있는 여러 지원 방안을 접하고서 그랬다.
산은의 새 건물 지을 땅을 제공한단다. 부산 오는 임직원에 대해선 각종 지방세도 감면해 주고, 아이들이 다닐 학교도 원하는 곳에 배정할 방침이다. 행여나 아플까 종합검진 서비스도 제공하고, 뮤지컬 등 문화공연 관람료나 체육시설 사용료도 깎아 주겠다고 한다. 살기 좋은 입지에 아파트를 지어 산은 임직원들에게만 특별히 공급하는 방안도 모색 중이다.
그 정도로는 어렵사리 부산에 오는 그들에겐 오히려 부족하며, 그래서 더한 보상안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도 있다. 지난해 10월 ‘산은 부산 이전 지원단’을 꾸린 부산시는 최근 산은을 직접 찾아 이런 내용을 전달했다고 한다.
부산시의 고충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지금 부산 형편에 산은 이전은 그 얼마나 감지덕지할 일인가. 그러나 뭔가 어긋나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저들을 극진히 대하는 건 좋으나, 숱한 차별과 곤경에도 지금껏 부산을 지켜 온 부산 사람들의 자존감은 어쩔 것이며 그들이 갖게 될 박탈감은 또 어떻게 메울 것인가. 어쩔 수 없이 지방 사는 설움을 새삼 깨닫게 되니 그 마음이 좋을 리 없다.
무엇보다, 그런 배려가 산은 임직원들에게 통할 것인가, 의문을 갖게 된다. 지금 돌아가는 사정이 부산시의 기대와는 명백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산은은 최근 정기 인사를 통해 50여 명에게 부산으로 전보 명령을 내렸다. 산은 노조가 거세게 반발한다. 이번 인사는 무리한 결정이며,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이달 초 법원에 내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노조는 이미 강석훈 산은 회장의 부산 이전 추진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지난달 12일 감사원에 국민감사를 청구했다. 노조는 향후 추이를 봐 가며 파업도 불사한다는 입장이다. 산은 임직원들은 그 어떤 유인책에도 부산으로 올 생각이 조금도 없음을 이 지점에서 확실히 깨닫게 된다.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과 관련해 부산을 비롯한 지방의 사람들은 오래전에 이미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른바 ‘특공 먹튀’ 논란이 그런 상처의 하나다. 한 국회의원이 2010~2021년 사이 지방으로 이전한 공공기관 종사자를 조사했다. 그런데 이전한 지방의 혁신도시 아파트를 특별 공급받은 임직원 3명 가운데 1명 꼴로 실제 거주지나 근무지가 다른 지역인 것으로 나타났다. 부산에서는 ‘특공’ 아파트를 받은 뒤 불과 10일 만에 퇴사한 이가 있었고, 한 기관에선 ‘특공’ 아파트를 받은 64명 중 무려 40명이 전매로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은 사례도 있었다. 지방에 오래 살라며 특별히 각종 혜택을 부여하며 아파트를 공급했는데, 혜택만 챙기고 지역을 떠나버리는, 얌체 짓을 벌였던 것이다. 지방이라고 해서 제집 마련이 수월한 건 아닌데, 이런 행위가 지역민에게 얼마나 불공정하고 괘씸하게 여겨졌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테다.
서울에서 잠깐 살다 부산으로 와서 수십 년을 살아도 자신은 언제나 서울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들을 종종 본다. 이들은 지방민으로 있기를 거부한다. 기회만 되면 언제든 서울로 돌아가려 한다.
이런 형편에선 산은 같은 공공기관을 부산에 유치해도 진정으로 지역에 보탬이 되긴 어렵다. 한국거래소가 부산으로 본사를 이전한 게 2005년 1월이다. 그 외에도 여러 기관이 현재 부산으로 이전한 상태다. 이들은 이전 후 지역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고 내세우지만, 실제로 그런지는 세밀히 따져 볼 일이다.
이들 덕분에 부산이 나아진 게 무엇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부산은 여전히 일자리에 허덕이고 청년이 떠나고 도시 소멸의 징후는 점점 심해질 뿐이다. 공공기관 이전은 실패작이라고까지는 말 못한다 해도, “지역경제 활성화와 지역민과의 상생” 운운하는 건 역시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기에 산은 임직원을 위해 부산시가 준비하고 있는 지원책들은 포인트를 잘못짚고 있는 게 아닌가 묻게 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요, 이쪽만의 짝사랑에 그칠 공산이 크다.
상상해 본다. 안 오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오게 해서 쓰는 것보다 차라리 이전하는 산은에 부산 인재를 데려다 쓰는 것을. 부산에도 산은 업무 따위 감당할 능력 갖춘 인재는 얼마든지 있다. 본사가 부산에 있는데 굳이 서울 사람 데려다 쓸 이유가 없다. 그냥 부산 사람을 쓰면 된다. 황당한 객기요 발칙한 상상이라고? 그리 말해도 어쩔 수 없다. 쓸데없는 넋두리라고 해도 좋다. 여하튼 서울 사람들이 부산에서 상전 노릇 하는 꼴을 더는 보기 싫으니까.
2023-01-3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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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계묘년 토끼해, 청년이 돌아오는 원년 되길…
행정안전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주민등록부 주민통계를 들여다본다. 지난 10년(2011~2021)간 부산의 청년(20~29세) 인구 추이. 역시나, 익히 짐작하던 걸 수치로 새삼 확인하게 된다. 2011년 12월 말 기준 부산 거주자 350만 9308명 중 청년 거주자는 47만 8099명. 2021년, 전체 거주자 333만 119명에 청년 거주자는 41만 4434명. 그 10년간 부산 인구가 크게 줄었는데, 청년 감소율이 특히 현저하다. 전체 부산 거주자는 5.1% 준 데 그친 반면 청년 거주자는 13.3%나 줄었다. 감소폭이 3배에 가깝다!
서울 것도 본다. 같은 기간 전체 거주자는 1008만 8867명에서 940만 1888명으로 6.8% 줄었고, 청년 거주자는 151만 9741명에서 141만 4854명으로 6.9% 줄었다. 서울에선 청년 인구 감소폭이 전체 인구 감소폭과 별 차이가 없다!
부산시는 오랫동안 청년정책을 펴 왔다. 과거 오거돈 시장 때에는 청년 분야 종합정책이 발표됐고, 박형준 시장 체제로 들어선 이후엔 ‘청년이 머무르고 돌아오는 도시, 다시 태어나도 살고 싶은 부산’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워 청년들을 부산으로 끌어들이려 노력 중이다. ‘청년G대’라는 브랜드를 내세운 청년정책 통합플랫폼도 운영하고 있다. 부산권 반도체 인재를 양성하겠다며 지역 대학들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다른 지역의 클라우드·블록체인 업체 유치 비전도 제시했다. 창업 청년을 돕기 위한 부산창업청 설립도 목하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처럼 ‘화려한’ 부산시의 노력이 제대로 효과를 보고 있는지 의문이다. 행안부 주민통계만이 아니라 다른 각종 연구 조사들도 널리 알려 주듯, 청년들의 ‘탈부산’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런 어긋남은 무엇에 기인하는가. 원인이야 워낙에 복합적일 테고, 부산시 차원의 대책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따지자면, 부산시의 여러 정책들이 청년들의 마음에 닿지 않는 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겠다. 얼마 전 동아대 다우미디어센터가 부산시의 청년정책 관련 설문조사를 벌였다. 그런데 조사에 응한 청년들 중 86.1%가 부산시의 청년정책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청년정책에 대한 부산시의 홍보가 부족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여러 청년정책이 청년들이 실질적으로 원하는 바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은 아닐까.
묻고 따지고 할 것 없이 해답은 누구나 알고 있다. 바로 일자리다. 부산에 살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청년들은 부산을 떠나는 것이다.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코로나19 이후 부산지역 고용의 질 평가’에서 부산은 전국 17개 시·도 중 12위였다. ‘대한민국 제2 도시’라는 명색이 부끄럽다. 있는 일자리나마 급여가 형편없다. 부산상공회의소가 조사한 바, 청년들은 최소 3000만 원 안팎의 연봉을 원하는데 2600만 원 이상의 연봉을 감당할 부산 기업은 드문 것으로 나타났다. 앞으로는 나아질까. 역시 암울하다. 지역소득을 짐작할 수 있는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의 경우 지난해 부산은 2965만 원으로 집계됐다. 전국 평균이 4012만 원이다. 부산 전체 GRDP는 99조 원 규모다. 경기도(527조 원)나 서울(472조 원)에 비할 바가 아니다. 부산 경제는 끝을 모른 채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부산에는 전국을 이끌었던 조선업을 비롯해 일자리가 많았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엔 사정이 달라졌다. 나라 경제는 첨단 산업으로 급격히 체질이 바뀌는데 부산은 그에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경제 역량은 갈수록 떨어지고 청년들이 원하는 양질의 일자리는 찾기 힘들게 됐다. 기업과 청년을 연결해 주고 집 구할 돈을 지원해 주는 따위 단편적인 정책이 아니라 부산 산업의 체질을 바꾸는 포괄적이면서도 원대한 계책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는 정권 차원을 넘어서는 과제다. 시장 한 사람 바뀐다고 해서 달라질 정책은 애당초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박 시장은 늘 ‘다시 태어나도 살고 싶은 부산’을 외친다. 그러면서 ‘시민 행복 15분 도시’ ‘영어 하기 편한 도시’ ‘저탄소 그린도시’ ‘문화관광 매력도시’를 내세운다. “내년은 글로벌 허브도시 부산을 향한 대도약의 원년이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선언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국내는 물론 세계 곳곳을 누빈다. 말 그대로 동분서주다. 그 노력이 가상함은 물론이다.
다 좋다! 하지만 동시에 “부산에서 살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부산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떠난다”는 청년들의 절규도 가슴에 새기길 당부한다. ‘글로벌 허브도시로의 도약’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내년 계묘년 토끼해가 ‘청년이 부산에 돌아오는 원년’이 되길 더 소망한다.
2022-12-2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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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오페라하우스, 짓겠다는 건가 말겠다는 건가
인천시가 오페라하우스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최근 전해졌다. 송도국제도시에 1400여 석 규모로 짓는다는데, 2027년 개관할 모양이다. 총 2200억 원 정도의 사업비를 인천시 재정사업으로 충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 국제적 수준의 공연이 가능한 오페라하우스는 현재 두 곳이다. 하나는 서울에 있다. 1988년 건립된 예술의전당 안에 있는 오페라하우스다. 오페라 전용 공연장만 2200여 석 규모다. 다른 하나는 대구오페라하우스다. 삼성그룹이 지어 대구시에 기부채납한 것으로, 2000년 11월에 착공해 2년 9개월 만인 2003년 8월 1500여 석 규모로 개관했다. 재단법인 대구문화예술진흥원이 운영주체다. 연간 100억 원 정도의 시비로 운영되며, 해마다 오페라 관련 축제와 공연을 펼친다.
이런 이야기가 부산 시민으로서 범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부러우면서 씁쓸하다. 벌써 개관해 운영에 들어갔어야 할 부산오페라하우스가 십수 년째 표류 중인 것이다.
부산시가 롯데그룹과 오페라하우스 건립기부약정을 체결한 게 2008년 5월의 일이다. 1800여 석 규모로 지을 예정인데, 착공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8년에야 가능했다. 롯데가 약속한 기부금 완납이 그 직전에야 이뤄진 탓이다. 그런데 착공 후 4년이 지났건만 공정률이 여태 40%가 안 된다.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미 올해 5월께는 완공됐어야 했다. 그나마 지금 공사는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그 전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설계 부실 의혹, 재원 확보 등의 문제가 겹치면서 공사 지연이 되풀이됐다. 지금은 건물 전면부의 공법 변경과 기초구조물 무단 시공 논란으로 또다시 난관에 처했다. 이를 두고 부산시, 설계사, 시공사, 감리사 등이 잘잘못과 책임 소재를 놓고 논쟁을 거듭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부산시의회의 행정사무감사가 두 차례나 있었는데 누구 말이 옳은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사공들이 저마다 자기가 옳다며 소리 높이니 배가 산으로 가는 꼴이다.
이런 판이니 올해 5월 개관이라는 당초 약속은 허언이 돼 버렸고, 이후 완공 예상 시점도 2023년 초라고 했다가 또다시 2024년 말로 미루는 등 혼선을 빚었다. 지금 상황으로는 2024년 말 완공도 어렵다는 게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건물 전면부 등 외부 공사를 놓고도 이렇게 갑론을박에 지지부진인데, 예술 공연장이라는 특성상 훨씬 정밀해야 할 내부 공사는 말도 못 꺼내는 형편이다.
행여 늦게나마 예정대로 완공된다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하다. 오페라하우스는 누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할지가 개관 전에 정해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작업은 지금껏 윤곽이 불분명하다. 대구오페라하우스처럼 재단법인 형태가 지역 예술계의 중론이지만 부산시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 정부와 부산시가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기존의 공공기관도 없애는 마당에 새 법인이 가당키나 하냐는 것이다. 부산시는 직영 사업소 형태나 ‘행정은 공무원, 공연은 외부 전문가’ 형태의 책임운영기관제 등을 대안으로 염두에 두는 모양이나 지역 예술계가 반대하고 있다.
최대 난제는 돈 문제다. 롯데가 약정했던 건립 기부금 1000억 원을 완납한 게 2017년 8월이다. 부산시가 돈을 다 받아 내기까지 9년이나 걸린 것이다. 삼성의 대구오페라하우스 건립 과정과 비교하면 참으로 아쉬울 따름이다.
당초 부산시가 예상한 총사업비는 그 1000억 원을 포함해 총 2500억 원이었다. 1500억 원은 부산 시민의 혈세로 채워야 한다. 더구나 이후 공법 변경과 인건비·자재비 상승 등으로 사업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부산시가 지난해 고쳐 산정한 금액이 3050억 원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등 나라 안팎의 형편으로 볼 때 앞으로 사업비가 어디까지 치솟을지 아무도 모른다. 부산시는 국비 지원을 바라지만 여의치 않은 형편이다. 해양수산부가 오페라하우스 사업을 북항재개발사업에 흡수하기로 했다(이 경우 국비 지원이 가능하다)는 소식이 최근 알려져 반색했으나, 아직 아무런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일이 뜻대로 안 될 경우 그 부담은 또다시 부산 시민이 져야 한다.
이게 다 누구 책임인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관리·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은 시에 궁극적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오페라하우스 실현 의지가 있기나 한 건지 의심이 들 정도다. 오페라하우스가 부산 시민에게 무슨 득이 될까라는 의문은 이제 무의미하다. 이왕 짓기로 했으니까. 그렇다면 제대로 제때 지어야 한다. 서울은 차치하더라도, 경쟁 도시라 할 수 있는 인천과 대구까지 마냥 부러운 눈길로 봐야 하는 부산 시민의 모습은 안쓰럽다. 부산시 당국의 자성과 분발을 촉구한다.
2022-11-17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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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권위와 권위주의, 그 깊고도 먼 간극
삼국지를 보면 조조의 최대 라이벌은 원소였다. 중원의 패권을 놓고 치러야 하는 관도대전을 앞두고 조조는 몹시도 초조했다. 병력, 가문, 재력 등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앞서는 원소를 이길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모사 곽가가 저 유명한 ‘조조가 이길 수밖에 없는 10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그중 하나가 도량이다. 원소는 속이 좁고 시기심이 강해 자신을 거스르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으나 조조는 도량이 커 합당하다면 자신의 뜻에는 개의치 않고 사람을 쓴다는 것이다. 실제로 원소는 참모들의 고언을 무시한 채 전쟁에 임하다 결국 참패해 몰락의 길을 걸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그릇의 크기가 두 사람의 운명을 갈랐던 것이다.
고등학생이 그린 만화 한 컷을 두고 지금 말들이 많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개최한 전국학생만화공모전에서 최근 금상을 받은 ‘윤석열차’라는 제목의 만화가 논란의 대상이다. 이 작품에 대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진흥원 측에 엄중 경고와 함께 징계에 나서겠다고 밝힌 것이다. 해당 작품에는 윤석열 대통령의 얼굴을 가진 열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질주하고 시민들이 놀라 달아나고 있다. 조종석에는 김건희 여사로 보이는 이가 있고, 객실에는 칼을 든 검사들이 그려져 있다. 누가 봐도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비판하는 내용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문체부는 행사 취지에 어긋나게 정치적 주제를 다루어서 경고한다고 밝혔다. 쉽게 말해, 학생 따위가 어디 감히 대통령을 풍자하느냐며 발끈한 것이다.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은 별도 입장을 내지는 않았지만 불쾌한 기색까지는 숨기지 않는 모습이다.
권력자에게 풍자가 달가울 리 없다. 어쩌면 자신에 대한 조롱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말은 쉽게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권력자는 풍자에 발끈해선 안 된다. 기본적으로 풍자하는 이는 약자고 당하는 이는 강자이기 십상이다. 약자는 힘이 없기에 강자를 직접적으로 욕하지 못한다. 다만 에둘러 풍자할 뿐이다. 힘을 가진 강자는 그래서 속은 쓰리고 기분이 나쁘더라도 풍자를 용납해야 한다. 그게 강자의 풍모요 그런 풍모를 지녀야 비로소 권위가 선다. ‘감히 얻다 대고!’가 아니라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하는 마음 씀이 있어야 한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르다. 둘 사이의 간격은 멀고도 깊다. 권위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합당하게 인정되는 영향력이다. 이때 합당하다는 건 오롯이 자발적임을 전제로 한다. 자발적이지 않을 때 즉 강제적이고 위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엔 권위주의가 된다. 권위는 주변 사람들이 마음으로 인정해 주어지는 것이고, 권위주의는 자신을 억지로 높이려는 오만에서 비롯된다. 권위는 사람을 감화시키지만, 권위주의는 굴종을 강요한다. 굴종에는, 당연하게도, 반발이 따를 수밖에 없다. 권위주의자에게 진정한 권위가 있을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아하게 말해서 표현의 자유라고 하지만, 여하튼 말은 막는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다. 러시아가 소련이었던 시절 일화가 전해진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한 사람이 모종의 전단지를 뿌리고 있었다. 반체제 인물이라 직감한 경찰이 그를 체포하고선 전단지를 압수했다. 그런데 전단지를 보니 그냥 백지였다. 황당해진 경찰이 물었다. “도대체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로 무슨 짓을 하는 거요?” 그 사람이 말했다. “굳이 쓸 필요가 있나요? 이미 진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말을 막는 권력은 권위주의로 흐르게 된다. 그런 권위주의 체제는 필망한다는 실증적 사례를 우리는 숱하게 봤다. 이를 직감해서인지, 윤 대통령은 권위주의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청와대를 부정하고 대신 용산 집무실을 만들었다. 탈권위주의를 내세우며 출근길 도어스테핑 시스템도 정착시켰다. 대통령 후보 때에는 “정치 풍자 코미디를 해도 되겠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건 당연한 권리”라고 답한 바 있다. 하지만 지금 윤 대통령의 모습과 태도는 그때와는 사뭇 어긋나 보인다. 윤 대통령을 풍자한 어느 화가의 그림을 두고 경찰이 수사를 운운하고, 겨우 고등학생의 만화에 정부가 나서서 징계를 예고한다. 언론의 따가운 비판을 대통령실과 집권여당이 들고일어나 가짜 뉴스로 정의하며 특정 언론사를 뿌리째 흔드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비판을 허용하지도 않고 풍자마저 백안시하는 모양새다. 윤 대통령의 직접적인 언급은 없어도 우리 사회에 권위주의의 그늘이 다시 드리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전에 없이 낮은 대통령 지지율은 그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이들에게 “고생하신다”라며 너털웃음 짓는 대통령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럴 자유는 충분히 있을 테니 하는 말이다.
2022-10-11 [1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