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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대통령의 여당? 여당의 대통령?
결국 국민의힘 당원들은 ‘윤심’을 택했다. 8일 전당대회에서 김기현 후보가 과반 득표로 결선 투표 없이 당 대표로 선출된 것이다. 이번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윤석열 대통령의 마음, 즉 윤심으로 시작해 윤심으로 끝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초 미미한 지지율을 기록했던 김 후보가 당선된 건 오롯이 윤심에 의존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번 전당대회는 국민의힘 앞날에 피할 수 없는 과제를 남겼다. 당정분리냐 당정일체냐,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이다.
기실 국민의힘은 이번 전당대회를 치르면서 대통령실 입장을 사실상 대부분 수용했다. 대통령의 당무 개입 논란과 정당 민주주의 원칙 훼손 비판에도 비대위 지도부는 ‘대통령의 뜻을 잘 살피는 후보가 대표가 돼야 윤석열 정부가 성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강요했다. 당정일체를 우선순위에 둔 것이다. 당 일각에서 윤 대통령을 명예 대표로 추대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반면 이른바 비윤계 쪽에서는 당이 대통령과 어느 정도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윤석열 정부의 성공에 더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폈다. 자칫 당이 대통령에 일방적으로 종속되면 결국 대통령의 독선으로 이어져 당과 윤석열 정부가 함께 몰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국민의힘 내부에선 당정분리 원칙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에 대한 논의가 급부상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 수립 후 대통령제를 유지하면서 오랜 기간 우리나라 여당과 대통령의 관계는 철저한 당정일체였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이 집권당 총재를 겸하면서 인사·공천·재정권을 장악해 ‘제왕적 대통령’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당연히 삼권분립이라는 헌법적 원칙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를 타파하자고 나선 이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그는 “대통령이 당을 장악해 의회를 지배하는 것은 유신 잔재”라며 당정분리를 선언했다. 대통령이 당 총재로서 당을 지배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하향식 당 운영을 막고 대통령의 당직 임명권과 공천권을 확실하게 배제하는 것이 당정분리라고 밝혔다. 이후 당시 집권여당이던 민주당은 당헌에 대통령 당원의 지위와 역할을 규정하면서 당정분리 원칙을 명시했고, 그 영향을 받아 현 국민의힘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한나라당도 당정분리를 지향하는 당헌 개정을 단행했다. 이후 우리 정치에서 당정분리는 하나의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여당과 대통령의 관계를 칼로 무 베듯 확연히 자르는 건 불가능하다.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대통령을 배제하는 정치를 한다는 건 처음부터 어불성설인 것이다.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고 협조하는 게 집권여당으로서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다. 실제로 여당이 당정분리 원칙을 고수하면서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 주지 않을 때 국정 운영이 무기력증에 빠지는 사례를 과거 여러 정권에서 보아 온 터다.
이를 절실하게 느낀 이가 문재인 전 대통령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 전 대통령이 보여 준 국정 운영은 ‘당정은 원팀’이라는 노선 위에서 진행됐다는 것이다. 사실상 당정일체를 강조한 셈으로, 문 전 대통령은 당정분리 원칙 때문에 참여정부가 실패했으며, 나아가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 결말을 초래한 것으로 본 듯하다. 문 전 대통령의 이러한 노선은 그러나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함으로써 당위성을 잃었다고 하겠다.
정당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의 중심은 개인이 아니라 정당이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무소속으로 출마하지 않은 이상 대통령의 정권은 당으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국민의힘 당헌·당규에는 ‘당정은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하여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때 강조된 건 ‘협조’ 체제다. 협조는 상명하복과는 다르다. 수평적이고 대등한 관계로서 서로 힘을 모으는 게 협조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당도 입법부의 일원이다.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이다. 삼권분립을 원칙으로 하는 우리나라에서 입법부는 행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집권여당으로서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해야 한다는 뜻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전당대회가 끝난 지금 국민의힘은 당정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최대의 당면 과제가 됐다. 당정 간 적절한 힘의 균형에 대해 국민의힘이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어느 경우든 분명한 건 과거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답습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김기현 대표는 8일 당선 직후 JTBC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뜻과 국민의 뜻이 다를 경우 당연히 국민이 우선”이라고 발언했다. 윤 대통령도 당무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수차례 공언했다. 그럼에도 지금 국민은 묻는다. 윤 대통령의 국민의힘인가, 국민의힘의 윤 대통령인가.
2023-03-0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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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산업은행 부산 이전과 부산 사람
찜찜하고 불쾌했다. 부산 이전을 추진 중인 산업은행(산은)의 임직원들을 달래기 위해 부산시가 준비하고 있는 여러 지원 방안을 접하고서 그랬다.
산은의 새 건물 지을 땅을 제공한단다. 부산 오는 임직원에 대해선 각종 지방세도 감면해 주고, 아이들이 다닐 학교도 원하는 곳에 배정할 방침이다. 행여나 아플까 종합검진 서비스도 제공하고, 뮤지컬 등 문화공연 관람료나 체육시설 사용료도 깎아 주겠다고 한다. 살기 좋은 입지에 아파트를 지어 산은 임직원들에게만 특별히 공급하는 방안도 모색 중이다.
그 정도로는 어렵사리 부산에 오는 그들에겐 오히려 부족하며, 그래서 더한 보상안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도 있다. 지난해 10월 ‘산은 부산 이전 지원단’을 꾸린 부산시는 최근 산은을 직접 찾아 이런 내용을 전달했다고 한다.
부산시의 고충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지금 부산 형편에 산은 이전은 그 얼마나 감지덕지할 일인가. 그러나 뭔가 어긋나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저들을 극진히 대하는 건 좋으나, 숱한 차별과 곤경에도 지금껏 부산을 지켜 온 부산 사람들의 자존감은 어쩔 것이며 그들이 갖게 될 박탈감은 또 어떻게 메울 것인가. 어쩔 수 없이 지방 사는 설움을 새삼 깨닫게 되니 그 마음이 좋을 리 없다.
무엇보다, 그런 배려가 산은 임직원들에게 통할 것인가, 의문을 갖게 된다. 지금 돌아가는 사정이 부산시의 기대와는 명백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산은은 최근 정기 인사를 통해 50여 명에게 부산으로 전보 명령을 내렸다. 산은 노조가 거세게 반발한다. 이번 인사는 무리한 결정이며,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이달 초 법원에 내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노조는 이미 강석훈 산은 회장의 부산 이전 추진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지난달 12일 감사원에 국민감사를 청구했다. 노조는 향후 추이를 봐 가며 파업도 불사한다는 입장이다. 산은 임직원들은 그 어떤 유인책에도 부산으로 올 생각이 조금도 없음을 이 지점에서 확실히 깨닫게 된다.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과 관련해 부산을 비롯한 지방의 사람들은 오래전에 이미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른바 ‘특공 먹튀’ 논란이 그런 상처의 하나다. 한 국회의원이 2010~2021년 사이 지방으로 이전한 공공기관 종사자를 조사했다. 그런데 이전한 지방의 혁신도시 아파트를 특별 공급받은 임직원 3명 가운데 1명 꼴로 실제 거주지나 근무지가 다른 지역인 것으로 나타났다. 부산에서는 ‘특공’ 아파트를 받은 뒤 불과 10일 만에 퇴사한 이가 있었고, 한 기관에선 ‘특공’ 아파트를 받은 64명 중 무려 40명이 전매로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은 사례도 있었다. 지방에 오래 살라며 특별히 각종 혜택을 부여하며 아파트를 공급했는데, 혜택만 챙기고 지역을 떠나버리는, 얌체 짓을 벌였던 것이다. 지방이라고 해서 제집 마련이 수월한 건 아닌데, 이런 행위가 지역민에게 얼마나 불공정하고 괘씸하게 여겨졌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테다.
서울에서 잠깐 살다 부산으로 와서 수십 년을 살아도 자신은 언제나 서울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들을 종종 본다. 이들은 지방민으로 있기를 거부한다. 기회만 되면 언제든 서울로 돌아가려 한다.
이런 형편에선 산은 같은 공공기관을 부산에 유치해도 진정으로 지역에 보탬이 되긴 어렵다. 한국거래소가 부산으로 본사를 이전한 게 2005년 1월이다. 그 외에도 여러 기관이 현재 부산으로 이전한 상태다. 이들은 이전 후 지역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고 내세우지만, 실제로 그런지는 세밀히 따져 볼 일이다.
이들 덕분에 부산이 나아진 게 무엇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부산은 여전히 일자리에 허덕이고 청년이 떠나고 도시 소멸의 징후는 점점 심해질 뿐이다. 공공기관 이전은 실패작이라고까지는 말 못한다 해도, “지역경제 활성화와 지역민과의 상생” 운운하는 건 역시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기에 산은 임직원을 위해 부산시가 준비하고 있는 지원책들은 포인트를 잘못짚고 있는 게 아닌가 묻게 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요, 이쪽만의 짝사랑에 그칠 공산이 크다.
상상해 본다. 안 오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오게 해서 쓰는 것보다 차라리 이전하는 산은에 부산 인재를 데려다 쓰는 것을. 부산에도 산은 업무 따위 감당할 능력 갖춘 인재는 얼마든지 있다. 본사가 부산에 있는데 굳이 서울 사람 데려다 쓸 이유가 없다. 그냥 부산 사람을 쓰면 된다. 황당한 객기요 발칙한 상상이라고? 그리 말해도 어쩔 수 없다. 쓸데없는 넋두리라고 해도 좋다. 여하튼 서울 사람들이 부산에서 상전 노릇 하는 꼴을 더는 보기 싫으니까.
2023-01-3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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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계묘년 토끼해, 청년이 돌아오는 원년 되길…
행정안전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주민등록부 주민통계를 들여다본다. 지난 10년(2011~2021)간 부산의 청년(20~29세) 인구 추이. 역시나, 익히 짐작하던 걸 수치로 새삼 확인하게 된다. 2011년 12월 말 기준 부산 거주자 350만 9308명 중 청년 거주자는 47만 8099명. 2021년, 전체 거주자 333만 119명에 청년 거주자는 41만 4434명. 그 10년간 부산 인구가 크게 줄었는데, 청년 감소율이 특히 현저하다. 전체 부산 거주자는 5.1% 준 데 그친 반면 청년 거주자는 13.3%나 줄었다. 감소폭이 3배에 가깝다!
서울 것도 본다. 같은 기간 전체 거주자는 1008만 8867명에서 940만 1888명으로 6.8% 줄었고, 청년 거주자는 151만 9741명에서 141만 4854명으로 6.9% 줄었다. 서울에선 청년 인구 감소폭이 전체 인구 감소폭과 별 차이가 없다!
부산시는 오랫동안 청년정책을 펴 왔다. 과거 오거돈 시장 때에는 청년 분야 종합정책이 발표됐고, 박형준 시장 체제로 들어선 이후엔 ‘청년이 머무르고 돌아오는 도시, 다시 태어나도 살고 싶은 부산’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워 청년들을 부산으로 끌어들이려 노력 중이다. ‘청년G대’라는 브랜드를 내세운 청년정책 통합플랫폼도 운영하고 있다. 부산권 반도체 인재를 양성하겠다며 지역 대학들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다른 지역의 클라우드·블록체인 업체 유치 비전도 제시했다. 창업 청년을 돕기 위한 부산창업청 설립도 목하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처럼 ‘화려한’ 부산시의 노력이 제대로 효과를 보고 있는지 의문이다. 행안부 주민통계만이 아니라 다른 각종 연구 조사들도 널리 알려 주듯, 청년들의 ‘탈부산’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런 어긋남은 무엇에 기인하는가. 원인이야 워낙에 복합적일 테고, 부산시 차원의 대책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따지자면, 부산시의 여러 정책들이 청년들의 마음에 닿지 않는 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겠다. 얼마 전 동아대 다우미디어센터가 부산시의 청년정책 관련 설문조사를 벌였다. 그런데 조사에 응한 청년들 중 86.1%가 부산시의 청년정책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청년정책에 대한 부산시의 홍보가 부족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여러 청년정책이 청년들이 실질적으로 원하는 바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은 아닐까.
묻고 따지고 할 것 없이 해답은 누구나 알고 있다. 바로 일자리다. 부산에 살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청년들은 부산을 떠나는 것이다.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코로나19 이후 부산지역 고용의 질 평가’에서 부산은 전국 17개 시·도 중 12위였다. ‘대한민국 제2 도시’라는 명색이 부끄럽다. 있는 일자리나마 급여가 형편없다. 부산상공회의소가 조사한 바, 청년들은 최소 3000만 원 안팎의 연봉을 원하는데 2600만 원 이상의 연봉을 감당할 부산 기업은 드문 것으로 나타났다. 앞으로는 나아질까. 역시 암울하다. 지역소득을 짐작할 수 있는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의 경우 지난해 부산은 2965만 원으로 집계됐다. 전국 평균이 4012만 원이다. 부산 전체 GRDP는 99조 원 규모다. 경기도(527조 원)나 서울(472조 원)에 비할 바가 아니다. 부산 경제는 끝을 모른 채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부산에는 전국을 이끌었던 조선업을 비롯해 일자리가 많았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엔 사정이 달라졌다. 나라 경제는 첨단 산업으로 급격히 체질이 바뀌는데 부산은 그에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경제 역량은 갈수록 떨어지고 청년들이 원하는 양질의 일자리는 찾기 힘들게 됐다. 기업과 청년을 연결해 주고 집 구할 돈을 지원해 주는 따위 단편적인 정책이 아니라 부산 산업의 체질을 바꾸는 포괄적이면서도 원대한 계책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는 정권 차원을 넘어서는 과제다. 시장 한 사람 바뀐다고 해서 달라질 정책은 애당초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박 시장은 늘 ‘다시 태어나도 살고 싶은 부산’을 외친다. 그러면서 ‘시민 행복 15분 도시’ ‘영어 하기 편한 도시’ ‘저탄소 그린도시’ ‘문화관광 매력도시’를 내세운다. “내년은 글로벌 허브도시 부산을 향한 대도약의 원년이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선언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국내는 물론 세계 곳곳을 누빈다. 말 그대로 동분서주다. 그 노력이 가상함은 물론이다.
다 좋다! 하지만 동시에 “부산에서 살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부산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떠난다”는 청년들의 절규도 가슴에 새기길 당부한다. ‘글로벌 허브도시로의 도약’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내년 계묘년 토끼해가 ‘청년이 부산에 돌아오는 원년’이 되길 더 소망한다.
2022-12-2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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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오페라하우스, 짓겠다는 건가 말겠다는 건가
인천시가 오페라하우스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최근 전해졌다. 송도국제도시에 1400여 석 규모로 짓는다는데, 2027년 개관할 모양이다. 총 2200억 원 정도의 사업비를 인천시 재정사업으로 충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 국제적 수준의 공연이 가능한 오페라하우스는 현재 두 곳이다. 하나는 서울에 있다. 1988년 건립된 예술의전당 안에 있는 오페라하우스다. 오페라 전용 공연장만 2200여 석 규모다. 다른 하나는 대구오페라하우스다. 삼성그룹이 지어 대구시에 기부채납한 것으로, 2000년 11월에 착공해 2년 9개월 만인 2003년 8월 1500여 석 규모로 개관했다. 재단법인 대구문화예술진흥원이 운영주체다. 연간 100억 원 정도의 시비로 운영되며, 해마다 오페라 관련 축제와 공연을 펼친다.
이런 이야기가 부산 시민으로서 범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부러우면서 씁쓸하다. 벌써 개관해 운영에 들어갔어야 할 부산오페라하우스가 십수 년째 표류 중인 것이다.
부산시가 롯데그룹과 오페라하우스 건립기부약정을 체결한 게 2008년 5월의 일이다. 1800여 석 규모로 지을 예정인데, 착공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8년에야 가능했다. 롯데가 약속한 기부금 완납이 그 직전에야 이뤄진 탓이다. 그런데 착공 후 4년이 지났건만 공정률이 여태 40%가 안 된다.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미 올해 5월께는 완공됐어야 했다. 그나마 지금 공사는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그 전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설계 부실 의혹, 재원 확보 등의 문제가 겹치면서 공사 지연이 되풀이됐다. 지금은 건물 전면부의 공법 변경과 기초구조물 무단 시공 논란으로 또다시 난관에 처했다. 이를 두고 부산시, 설계사, 시공사, 감리사 등이 잘잘못과 책임 소재를 놓고 논쟁을 거듭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부산시의회의 행정사무감사가 두 차례나 있었는데 누구 말이 옳은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사공들이 저마다 자기가 옳다며 소리 높이니 배가 산으로 가는 꼴이다.
이런 판이니 올해 5월 개관이라는 당초 약속은 허언이 돼 버렸고, 이후 완공 예상 시점도 2023년 초라고 했다가 또다시 2024년 말로 미루는 등 혼선을 빚었다. 지금 상황으로는 2024년 말 완공도 어렵다는 게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건물 전면부 등 외부 공사를 놓고도 이렇게 갑론을박에 지지부진인데, 예술 공연장이라는 특성상 훨씬 정밀해야 할 내부 공사는 말도 못 꺼내는 형편이다.
행여 늦게나마 예정대로 완공된다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하다. 오페라하우스는 누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할지가 개관 전에 정해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작업은 지금껏 윤곽이 불분명하다. 대구오페라하우스처럼 재단법인 형태가 지역 예술계의 중론이지만 부산시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 정부와 부산시가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기존의 공공기관도 없애는 마당에 새 법인이 가당키나 하냐는 것이다. 부산시는 직영 사업소 형태나 ‘행정은 공무원, 공연은 외부 전문가’ 형태의 책임운영기관제 등을 대안으로 염두에 두는 모양이나 지역 예술계가 반대하고 있다.
최대 난제는 돈 문제다. 롯데가 약정했던 건립 기부금 1000억 원을 완납한 게 2017년 8월이다. 부산시가 돈을 다 받아 내기까지 9년이나 걸린 것이다. 삼성의 대구오페라하우스 건립 과정과 비교하면 참으로 아쉬울 따름이다.
당초 부산시가 예상한 총사업비는 그 1000억 원을 포함해 총 2500억 원이었다. 1500억 원은 부산 시민의 혈세로 채워야 한다. 더구나 이후 공법 변경과 인건비·자재비 상승 등으로 사업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부산시가 지난해 고쳐 산정한 금액이 3050억 원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등 나라 안팎의 형편으로 볼 때 앞으로 사업비가 어디까지 치솟을지 아무도 모른다. 부산시는 국비 지원을 바라지만 여의치 않은 형편이다. 해양수산부가 오페라하우스 사업을 북항재개발사업에 흡수하기로 했다(이 경우 국비 지원이 가능하다)는 소식이 최근 알려져 반색했으나, 아직 아무런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일이 뜻대로 안 될 경우 그 부담은 또다시 부산 시민이 져야 한다.
이게 다 누구 책임인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관리·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은 시에 궁극적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오페라하우스 실현 의지가 있기나 한 건지 의심이 들 정도다. 오페라하우스가 부산 시민에게 무슨 득이 될까라는 의문은 이제 무의미하다. 이왕 짓기로 했으니까. 그렇다면 제대로 제때 지어야 한다. 서울은 차치하더라도, 경쟁 도시라 할 수 있는 인천과 대구까지 마냥 부러운 눈길로 봐야 하는 부산 시민의 모습은 안쓰럽다. 부산시 당국의 자성과 분발을 촉구한다.
2022-11-17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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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권위와 권위주의, 그 깊고도 먼 간극
삼국지를 보면 조조의 최대 라이벌은 원소였다. 중원의 패권을 놓고 치러야 하는 관도대전을 앞두고 조조는 몹시도 초조했다. 병력, 가문, 재력 등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앞서는 원소를 이길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모사 곽가가 저 유명한 ‘조조가 이길 수밖에 없는 10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그중 하나가 도량이다. 원소는 속이 좁고 시기심이 강해 자신을 거스르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으나 조조는 도량이 커 합당하다면 자신의 뜻에는 개의치 않고 사람을 쓴다는 것이다. 실제로 원소는 참모들의 고언을 무시한 채 전쟁에 임하다 결국 참패해 몰락의 길을 걸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그릇의 크기가 두 사람의 운명을 갈랐던 것이다.
고등학생이 그린 만화 한 컷을 두고 지금 말들이 많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개최한 전국학생만화공모전에서 최근 금상을 받은 ‘윤석열차’라는 제목의 만화가 논란의 대상이다. 이 작품에 대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진흥원 측에 엄중 경고와 함께 징계에 나서겠다고 밝힌 것이다. 해당 작품에는 윤석열 대통령의 얼굴을 가진 열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질주하고 시민들이 놀라 달아나고 있다. 조종석에는 김건희 여사로 보이는 이가 있고, 객실에는 칼을 든 검사들이 그려져 있다. 누가 봐도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비판하는 내용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문체부는 행사 취지에 어긋나게 정치적 주제를 다루어서 경고한다고 밝혔다. 쉽게 말해, 학생 따위가 어디 감히 대통령을 풍자하느냐며 발끈한 것이다.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은 별도 입장을 내지는 않았지만 불쾌한 기색까지는 숨기지 않는 모습이다.
권력자에게 풍자가 달가울 리 없다. 어쩌면 자신에 대한 조롱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말은 쉽게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권력자는 풍자에 발끈해선 안 된다. 기본적으로 풍자하는 이는 약자고 당하는 이는 강자이기 십상이다. 약자는 힘이 없기에 강자를 직접적으로 욕하지 못한다. 다만 에둘러 풍자할 뿐이다. 힘을 가진 강자는 그래서 속은 쓰리고 기분이 나쁘더라도 풍자를 용납해야 한다. 그게 강자의 풍모요 그런 풍모를 지녀야 비로소 권위가 선다. ‘감히 얻다 대고!’가 아니라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하는 마음 씀이 있어야 한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르다. 둘 사이의 간격은 멀고도 깊다. 권위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합당하게 인정되는 영향력이다. 이때 합당하다는 건 오롯이 자발적임을 전제로 한다. 자발적이지 않을 때 즉 강제적이고 위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엔 권위주의가 된다. 권위는 주변 사람들이 마음으로 인정해 주어지는 것이고, 권위주의는 자신을 억지로 높이려는 오만에서 비롯된다. 권위는 사람을 감화시키지만, 권위주의는 굴종을 강요한다. 굴종에는, 당연하게도, 반발이 따를 수밖에 없다. 권위주의자에게 진정한 권위가 있을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아하게 말해서 표현의 자유라고 하지만, 여하튼 말은 막는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다. 러시아가 소련이었던 시절 일화가 전해진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한 사람이 모종의 전단지를 뿌리고 있었다. 반체제 인물이라 직감한 경찰이 그를 체포하고선 전단지를 압수했다. 그런데 전단지를 보니 그냥 백지였다. 황당해진 경찰이 물었다. “도대체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로 무슨 짓을 하는 거요?” 그 사람이 말했다. “굳이 쓸 필요가 있나요? 이미 진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말을 막는 권력은 권위주의로 흐르게 된다. 그런 권위주의 체제는 필망한다는 실증적 사례를 우리는 숱하게 봤다. 이를 직감해서인지, 윤 대통령은 권위주의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청와대를 부정하고 대신 용산 집무실을 만들었다. 탈권위주의를 내세우며 출근길 도어스테핑 시스템도 정착시켰다. 대통령 후보 때에는 “정치 풍자 코미디를 해도 되겠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건 당연한 권리”라고 답한 바 있다. 하지만 지금 윤 대통령의 모습과 태도는 그때와는 사뭇 어긋나 보인다. 윤 대통령을 풍자한 어느 화가의 그림을 두고 경찰이 수사를 운운하고, 겨우 고등학생의 만화에 정부가 나서서 징계를 예고한다. 언론의 따가운 비판을 대통령실과 집권여당이 들고일어나 가짜 뉴스로 정의하며 특정 언론사를 뿌리째 흔드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비판을 허용하지도 않고 풍자마저 백안시하는 모양새다. 윤 대통령의 직접적인 언급은 없어도 우리 사회에 권위주의의 그늘이 다시 드리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전에 없이 낮은 대통령 지지율은 그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이들에게 “고생하신다”라며 너털웃음 짓는 대통령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럴 자유는 충분히 있을 테니 하는 말이다.
2022-10-11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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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꼼수 정치, 부끄럽지 않은가
바둑에서 허방을 놓아 상대가 걸려들기를 노리는 변칙의 수가 꼼수다. 이게 일상에까지 전해져 흔히 꼼수라고 하면 비열하고 얍삽한 수단을 뜻한다. 그런데 요즘 우리 정치권이 구사하는 꼼수가 현란하다.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이 단연 돋보인다. 이준석 전 대표가 신청한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효력정지 가처분을 법원이 인용해 지난 26일 주호영 비대위원장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국민의힘 현 상황이 당헌·당규에 비춰서 비대위를 만들 만큼 비상하지는 않다고 법원은 판단한 것이다. 놀란 국민의힘 지도부는 이튿날 5시간에 걸친 의원총회를 통해 해법을 모색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당헌·당규를 고쳐서라도 새 비대위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법원은 비상상황이 아니라는데 당사자인 국민의힘 스스로가 억지로 비상상황을 만들어 내는 셈이다.
이 전 대표에 대한 징계도 ‘윤핵관’(윤석열 핵심 관계자)이 주도한 꼼수라는 비판을 받는 터에, 법원의 결정마저 변칙적인 방법으로 뭉개려 한다. 국민의힘 내부에서조차 “꼼수를 꼼수로 덮으려 한다” “민주주의도 버리고 법치주의도 버리고 국민도 버렸다”는 탄식과 비난이 쏟아진다. 명색이 집권여당인데 그 꼴이 참으로 가관이다.
제1 야당인 더불어민주당도 오십보백보다. 지난 28일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 체제로 전환됐다. 전당대회에서 이 대표의 득표율은 77.77%. 민주당 역대 최고인 데다 행운의 숫자라는 ‘7’이 겹겹으로 쌓인 터라, 이 대표로선 의기양양할 만도 하다. 하지만 그에겐 늘 따라붙는 꼬리표가 있다. ‘사법 리스크’다. 가족을 포함해 이 대표와 관련돼 진행 중인 수사는 백현동·대장동 개발 의혹 등 6가지다. 이 사법 리스크에 대비하기 위해 민주당은 전당대회 전 숱한 반발에도 결국 당헌 80조를 고쳤다.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된 당직자의 직무를 정지시킬 수 있다는 규정은 그대로 두되, 당무위 의결을 거쳐 취소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빠져나갈 길을 터 준 것이다. 당헌 80조 개정은 이미 당 중앙위에서 부결됐는데도 재상정해 통과시켰다. 일사부재의 원칙에 어긋나는 이 조치 역시 꼼수에 다름 아니었다.
꼼수 정치의 절정이라 할 만한 일이 21대 총선을 앞둔 2020년 초에 있었다.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을 제외한 야당과 민주당이 결성한 ‘4+1 연합’이 선거법을 개정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키로 했다. 거대 정당 독주 시대가 끝나고 다당제의 길이 열림으로써 우리 정치에도 대화와 타협의 문화가 정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기대는 곧 실망으로 변했다. 자유한국당이 그해 2월 미래한국당이라는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을 만든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미래통합당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위성정당을 이용해 내심 원내 과반 의석을 노렸다. 미래통합당의 행태를 비난하던 민주당도 다음 달 여러 군소 정당을 모아 범여권 위성정당을 만들었다. 더불어시민당이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가치나 의미는 깡그리 무시한, 반칙 대 반칙, 꼼수 대 꼼수의 대결이었다. 미래한국당과 더불어시민당은, 위성정당답게, 그해 4월 총선이 끝나자 바로 소멸했다.
꼼수 정치는 국회에서만 횡행하는 게 아니다. 입법 기관인 국회가 검찰의 수사권을 제한하는 법을 세우자 법무부는 시행령 개정을 통해 옛 수사권을 그대로 행사하겠다고 선언하고, 행안부는 법률적 근거가 불확실하다는 지적에도 역시 시행령 개정을 통해 행안부 내 경찰국 신설을 강행했다. 이를 두고 “시행령 전성시대”라는 비꼬는 말이 나오는 건, 따지고 보면 모두가 편법이고 꼼수이기 때문이다.
병불염사(兵不厭詐)라는 말이 있다. 전쟁에서는 꼼수 같은 비열한 짓도 꺼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쟁터에서나 통할 말이다. 아무리 정치가 전쟁처럼 냉혹하고 잔인한 영역이라고는 해도 정치는 정도(正道)라야 한다. 목적도 정당하고 방법도 정당해야 한다. 정도는 신의가 바탕이 돼야지 꼼수로는 걸을 수 없는 길이다.
바둑에서 꼼수는 제대로 된 상대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정치에서도 우리는 그런 결말을 충분히 경험했다. 꼼수 정치의 극치라고 불리는 ‘사사오입 개헌’이 대표적인 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재적의원 203명 중 3분의 2, 즉 136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다. 개표 결과는 135명. 1명이 모자라 부결됐다. 하지만 당시 자유당은 ‘203의 3분의 2’(135.333)를 반내림(사사오입) 하면 135라는 억지를 부려 결국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의 말로는 익히 아는 바다. 국민의 눈을 잠시는 속일 수 있어도 계속 속일 수는 없다고 했다. 국민의 눈은 밝다. 꼼수의 비열한 정치는 결단코 응징한다.
2022-08-30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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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휴가 간 대통령,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까
오는 17일 취임 100일째 맞아
지지율은 최근 20%대로 급락
급박했던 지난 석 달 국정 운영
대화·토론 없는 모습에 실망 커
일방통행식 정면돌파 대응보다
국민 기대 부응하는 자세 필요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날이 올해 5월 10일이다. 오는 9일이면 대통령직 수행 석 달을 지나고, 17일이면 취임 100일째를 맞는다. 대통령의 성패 여부는 나라의 운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윤 대통령의 성공을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윤 대통령과 새 정부의 행적을 보면 그런 바람에 크게 못 미쳐 아쉽다. 20%대까지 떨어진 윤 대통령의 지지율이 말해 주듯, 이는 개인을 넘어 대다수 국민이 느끼는 실망감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2위 후보자와 불과 0.73%포인트 차이인 48.56% 득표로 당선됐다. 20%대 지지율이라는 건, 단순 계산으로 보면, 대선 때 지지자의 절반 정도가 반대로 돌아섰다는 의미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당선 직후 윤 대통령은 집무실을 멀쩡한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이전하겠다고 해서 큰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인수위 내부에서도 성급하다며 속도 조절의 필요성을 제기했으나, 윤 대통령은 “용산이 안 되면 차라리 통의동 (인수위) 사무실을 쓰겠다”는 배수진까지 치며 결국엔 뜻을 관철시켰다. 취임 후에는 몇몇 장관 후보자들의 자질과 처신이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다는 비판이 거센 가운데서도 임명을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한동훈 법무부 장관에 대해서는 검찰개혁을 외치는 야당을 향해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임명을 강행했을 뿐만 아니라 인사검증 역할까지 맡김으로써 한 장관에게 날개를 달아 주기도 했다.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명을 강행한 장관 중 특히 윤 대통령의 심복으로 알려진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일선 경찰의 반발과 위법 논란 따위는 무시한 채 행안부 내 경찰국 설치를 속도전으로 밀어붙여 결국은 ‘임무’를 완수했다. 박순애 교육부 장관은 현행 만 6세인 초등학교 취학 연령을 만 5세로 낮추겠다고 발표하고 관련 내용을 윤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공론화나 의견 수렴 없이 느닷없이 발표된 ‘만 5세 초등학교 입학 추진’ 계획에 학부모, 교사, 교원단체들이 일제히 반발하고 있지만 윤 대통령은 오히려 신속한 학제 개편을 주문하며 박 장관을 독려했다.
이 외에도 법인세 인하, 다주택자 종합부동산세 중과 폐지, 상속세 완화 등 소위 ‘부자감세’ 정책이 잇따라 발표됐고, 수도권 규제 완화와 반도체학과 정원 확대 등 지방으로선 마른하늘에 날벼락일 수밖에 없는 조치들도 이어졌다. 나라 바깥에 큰 충격파를 던진 일들도 많았다. 윤 대통령의 “선제적 공격” “한미 군사동맹 강화” 선언으로 한반도에서 긴장이 고조됐고, 사드 재배치와 ‘칩 4’(미국 주도 반중국 반도체 동맹) 참여 여부로 중국의 거센 반발을 샀다. 그 와중에 윤 대통령이 특별한 이슈도 없이 반러 군사동맹인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함으로써 러시아와의 관계도 불편하게 만들었다.
3개월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그야말로 정신을 차리기 힘든 정도의 풍파가 몰아친 느낌이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일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이다. 윤 대통령은 일단 마음먹은 일에는 밀어붙이는 데 거리낌이 없어 보인다. 방향이 정해지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직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야권이나 국민과 대화하거나 토론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일방통행의 측면이 강했던 것이다. 소신과 추진력이라고 좋게 평가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일이 터질 때마다 나라 전체를 흔들 정도로 논란을 야기하고 정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윤 대통령은 정면돌파라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정면돌파는 적한테나 시도하는 법이다. 정면돌파의 상대를 오인하거나 착각할 경우 그때의 행위는 독선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윤 대통령의 “지지율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은, 애초 그런 의도는 아닐 테지만, 국민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들릴 수도 있다. 여론만 좇는 인기 지상주의도 문제지만 ‘무조건 나를 따르라’는 독선적인 태도는 더 위험하다. 국민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정치하는 사람들의 독선이다. 윤 대통령은 “오로지 국민만 생각한다”지만 그 말의 충정을 수긍하는 국민은 지금 열에 셋도 안 된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였던 지난 1월 윤 대통령은 자신에게 “연기만 해 달라”는 당시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이 몹시도 서운했던 모양이다. 갈등 끝에 선대위를 전격 해체해 버렸다. 그때 윤 대통령은 “국민이 기대하셨던, 처음 윤석열의 모습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정작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이 된 지금 ‘윤석열의 모습’과 ‘국민이 기대했던 바’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지금 윤 대통령은 휴가 중이다. 휴가가 끝나면 그는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까.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반성문을 갖고 올지 아니면 ‘나를 따르라’는 기치를 그대로 들고 올지, 기대와 걱정이 교차한다.
2022-08-02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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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법과 원칙만이 능사는 아니다
건달 출신 한 고조 유방이 귀족 가문에다 초패왕을 자처할 정도로 절대 강자였던 항우를 꺾고 천하를 차지한 배경에는 ‘법 삼장’(法 三章)이 있었다. ‘법 삼장’은 유방이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진격하면서 내세운 기치로, 살인·상해·절도에 대한 3가지 법령 외 기존 진나라의 법은 모두 폐기한다는 것이었다. 가혹했던 진나라의 법 집행에 신음하던 백성들은 환호했고 민심은 유방에게 쏠렸다. 제국 건설이 어찌 법 조항 3개만으로 가능했으랴. 유방이 그만큼 법과 원칙에 유연했음을 보여 주는 사례로 봐야 할 것이다.
법과 원칙은 세상을 경영하는 중요한 벼리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중국 전국시대에 진나라는 법과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혼란을 종식시키고 천하통일을 달성했다. 그 중심에 이사가 있었다. 법가 사상의 완성자로 불리는 이사는 진나라 승상으로서 법의 철저한 집행이 국가 운영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진나라의 엄혹한 법치주의는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사마천은 〈사기〉를 통해 평가했다. “진나라 법망은 어느 때보다 치밀했으나 간사하고 거짓된 일이 싹트기 시작했다. 백성을 다스리는 요체는 도덕에 있는 것이지 혹독한 법령에 있는 것은 아니다.” 법과 원칙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말이다.
‘혹독한 법치’ 진나라 잃었던 민심
‘유연한 법 집행’ 한나라 고조 차지
잇단 증오 집회 등 분열과 갈등에
윤 대통령 오불관언 태도 아쉬워
위법 감시하는 검사의 시선 대신
약자에 대한 긍휼 기반 정치 해야
검찰 출신 윤석열 대통령은 법과 원칙을 강조한다. “검찰 출신 인사들이 새 정부의 요직을 독식한다”는 세간의 숱한 지적에도 “원칙에 따라 적재적소에 유능한 인물을 쓰는 것”이라며 일축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사저가 있는 경남 양산시 평산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수단체와 유튜버들의 집회에 대해서도 윤 대통령은 법과 원칙을 우선하는 태도를 보였다. 지난달 10일 이후 계속되고 있는 이 집회는 문 전 대통령을 향한 고성과 욕설 일색이다. 확성기 등을 이용해 각종 혐오 발언을 여과 없이 분출하면서 주민들의 고통 따위는 무시한다. 법이 보장하는 집회와 시위의 기준을 벗어나 상대에 대한 증오감만 남는 집회라는 비판을 받는데도, 윤 대통령은 “다 법에 따라 되지 않겠냐”며 거리를 둔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사태는 해결은커녕 오히려 더 꼬이고 있다. 윤 대통령의 발언 이후 서울 서초구 그의 자택 앞에서 소위 ‘맞불 집회’가 열리고 있다. 인터넷 언론사 서울의소리가 윤 대통령이 평산마을 집회를 사실상 옹호한다며 항의성 집회를 여는 것이다. 그러자 같은 장소에서 신자유주의연대가 서울의소리 집회를 비난하는 집회를 시작했다. 시위가 시위를 낳고 증오가 증오를 부른 격이다. 일각에선 국민 갈등을 해소해야 할 현직 대통령이 오히려 국민 갈등을 조장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법과 원칙을 말할 뿐 오불관언이다. 자신의 집 앞에서 벌어지는 두 집회에 대해서도 “법에 따른 국민의 권리”라고 밝혔을 뿐이다.
국토부가 쟁점이던 안전운임제 연장에 합의함으로써 지난 14일 극적으로 중단된 화물연대 파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화물연대 파업 사태는 약자들이 입은 상처를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보듬어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파업을 벌이며 화물노동자들은 유가 폭등으로 생존이 벼랑 끝에 내몰린 처지를 호소했다. 어떤 이는 “안전운임제 시행 이전의 삶은 노예 그 자체”라고 외쳤다. 하지만 이들을 보는 시선은 대체로 차가웠다. 경제계는 파업이 나라 경제를 망친다며 맹렬한 적의를 드러냈고, 다수 언론은 파업의 폭력성을 부각하며 엄정 처벌을 촉구했다. 그런 상황에서 윤 대통령은 법과 원칙대로 처리하겠다는 입장만을 고수했다.
대통령으로서 고충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안 그래도 대내외적인 악조건으로 경제위기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마당에 물류 파업은 그 충격을 배가시킬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떠나, 법과 원칙만을 앞세웠을 뿐 화물 노동자들의 “제발 살려 달라”는 호소에는 무심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대통령은 검사처럼 위법 행위를 감시하는 자리가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까지 진정성 있는 눈으로 살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원칙이 실종되고 법이 무력화되면 사회 질서는 무너지고 국정은 혼탁해진다. 이는 엄연한 진리다. 그러나 법과 원칙의 기준이 때와 장소, 사람에 따라 달라지고, 화합과 치유가 아니라 분열과 갈등의 원인이 된다면 이는 심각히 되돌아봐야 할 문제다. 천주교 사제이자 사회운동가인 헨리 나우웬(1932~1996)은 긍휼을 당부했다. 긍휼(compassion)은 단순한 연민을 넘어 보다 적극적으로 타인과 하나 된다는 의미다. 나우웬이 비유한 바 “비를 맞고 있는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 주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묻게 된다. 법과 원칙도 인간에 대한 긍휼의 바탕 위에 서야 하는 건 아닌지, 또 그게 정치의 본령이 아닌지.
2022-06-16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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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선거구 획정위 이대로 둘 건가
올 6월 1일 치러지는 지방선거를 위해 ‘부산시 자치구·군의원 선거구 획정위원회’(이하 획정위)가 꾸려진 게 2021년 10월 1일이다. 위원은 모두 11명. 부산시의회, 학계, 법조계, 시민단체, 선관위, 언론계 인사로 꾸려졌다. 이들은 2022년 4월 20일 최종 회의까지 모두 6차례 회의를 가졌다. 틈틈이 별도의 의견청취 절차도 거쳤다. 그런 산고 끝에 나온 게 ‘부산시 기초의원 선거구 조정안’이었다.
획정위는 2인 선거구를 기존 44곳에서 18곳으로 줄이는 대신, 3인 선거구를 23곳에서 27곳으로 늘리고, 한 곳도 없는 4인 선거구를 10곳 신설하자고 주문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장악한 기초의회에 군소 정당도 진입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혀 다양한 민의가 반영되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진일보한 선거구 조정안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군소 정당들의 기대도 컸다. 그런데 애써 조정안을 짜면서도 획정위원들은 “이렇게 해 봤자 어차피 시의회에서 마음대로 할 건데…”라는 자조 섞인 전망을 보인 터였다.
‘4인 선거구 10곳 신설’ 담은
부산 기초의원 선거구 획정안
시의회가 1곳만 남기고 없애
사실상 들러리 역할에 머물러
구속력 있는 결정권 갖도록
시급히 제도적 장치 마련해야
전망은 현실이 됐다. 획정위 조정안은 묵살됐다. 시의회는 지난달 27일 기초의회 선거구 획정 조례안을 의결했다. 획정위가 10곳으로 제안한 4인 선거구를 1곳만 남겨 두고 나머지 9곳은 2인 선거구로 쪼갰다. 27곳으로 제안된 3인 선거구는 25곳으로 줄였다. 대신 18곳으로 제안된 2인 선거구는 39곳으로 크게 늘렸다. 군소 정당들과 시민단체들은 “시의회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폭거를 자행했다”고 비난했다.
이런 일은 반복되고 있다. 2018년 지방선거 때도 당시 획정위는 2인 선거구는 기존 50개에서 30개로, 3인 선거구는 18개에서 23개로, 4인 선거구는 7개로 조정했다. 하지만 시의회의 결론은 ‘2인 선거구 44개, 3인 선거구 23개, 4인 선거구 0개’였다. 획정위는 유명무실했던 것이다. 이는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2005년 8월 4일 개정된 공직선거법은 기초의원 선거 방식을 1명만 뽑던 소선거구제에서 2~4명을 뽑는 중대선거구제로 바꿨다. 이를 계기로 2006년 지방선거 때부터는 기초의원 선거구 획정위도 각 시도에 설치토록 했다. 소선거구제는 아무래도 기성 정치인이나 기득권을 가진 세력에게 유리한 법이다. 중대선거구제로 바꾼 것은 군소 정당이나 정치 신인을 지지한 유권자들의 선택이 사표화 되는 것을 방지해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해나 요구를 지방 정치에 적용하자는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취지는 크게 왜곡돼 왔다. 시도 획정위가 아무리 중대선거구제 취지를 살리기 위한 선거구 조정안을 내놓아도 시도의회는 이를 무시하고 맘대로 선거구를 결정했다. 특히 4인 선거구는 아예 빼버리거나 2인 선거구로 쪼개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 결과 중대선거구제가 도입됐음에도 불구하고 거대 양당이 의석을 독식하는 결과가 발생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공직선거법의 허점에 있다. 현행 선거구 획정 시스템은 시도 획정위가 조정안을 마련해 제출하면, 시장·도지사는 이를 시도의회에 제출하고, 시도의회는 심의 후 조례로 의결한다. 그런데 법에 따르면 획정위의 조정안은 최종안이 아니라 단지 권고안일 뿐이다. 시도의회는 획정위의 결정 사항을 ‘존중’만 하면 된다. 조례로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수정 가능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당 간 담합의 여지도 상존한다. 또 하나의 허점은 ‘하나의 선거구에서 4인 이상을 선출할 때는 2개 이상의 선거구로 분할할 수 있다’는 규정이다. 4인 선거구를 2인 선거구로 쪼개는 편법이 그래서 가능해졌다.
선거구 획정의 결정권은 오롯이 시도의회가 갖고 있다. 어렵게 획정위를 꾸려 오랜 기간 격렬한 토론과 논의 끝에 선거구 조정안을 마련해도 시도의회가 거부하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이다. 획정위는 말 그대로 들러리일 뿐이다. 이 무슨 낭비인가.
더 큰 문제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이 돼야 할 기초의회를 거대 양당이 장악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이는 민의를 왜곡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히 우려할 일이다.
민주주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사소한 선거구 조정만으로도 민주주의의 진전을 가져올 수 있다. 선거구 획정 결정권을 이해충돌의 소지가 다분한 정치인에게만 맡겨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대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획정위의 권한이 강화돼야 한다. 획정위의 결정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채택되도록 해야 한다. 선거 때마다 급조하는 일시적인 기구가 아니라 일관성과 전문성을 갖춘 상설위원회로 기능할 필요도 있다. 획정위가 자문 그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제라도 바꿔야 한다.
2022-05-03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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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장관은 임명하면서 부처는 폐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10일 여성가족부(여가부) 장관 후보자로 김현숙(56) 숭실대 교수를 지명했다. 여가부는 윤 당선인이 폐지를 공약한 부처다. 그런데도 그 수장을 낙점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여가부 폐지 공약은 철회된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같은 날 “당선인이 여러 차례 약속한 거라 폐지 수순을 밟는 것은 명확하다”고 밝혔다. 장관으로 김 교수를 내정한 것도 그 수순으로 읽힌다. 경제학자인 김 교수는 지난달 인수위에서 정책특보를 맡으면서 사실상 여가부 폐지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장관 후보자 선임 직후 “미래를 열 수 있는 새로운 부처로 갈 수 있도록 충분히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말했다. 스스로 여가부 폐지를 공식화한 셈이다.
여가부 폐지 공약 윤석열 당선인
장관 후보자로 김현숙 교수 낙점
공약 철회는 아닌 것으로 보여
“올 지방선거 의식” 등 여러 분석
폐지 명분 절실한지 비판 제기
차별에 대한 근본적 고민 있어야
폐지될 부처의 장관 임명?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김 후보자가 공식 장관이 되기 위해선 국회 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청문회를 통과해도 그의 임무는 한시적이다. 윤 당선인 취임 이후 조직 개편을 통해 여가부가 폐지되면 그는 곧바로 그만둬야 한다. 여가부를 대체하는 새 부처를 김 후보자에게 맡긴다 해도 다시 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이 무슨 낭비인가. 불과 몇 개월 사이 이뤄지는 조직 개편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윤 당선인과 인수위가 이번 조각에서 여가부를 존치키로 한 데에는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온다. 인수위는 여가부 포함 현 정부 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조직 개편에 대해 외교·안보를 이유의 하나로 들었는데, 대통령 집무실 이전 문제의 경우 안보 공백이라는 여론의 질타에도 강행한 점에 비추어 보면 공감하기 어렵다.
분석의 하나는 여소야대로 형성될 향후 정국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고육책이라는 설명이다. 정부 부처를 새로 구성하려면 정부조직법을 바꿔야 한다. 그런데 172석이라는 압도적 의석 수를 갖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이 여가부 폐지에 부정적이다. 110석의 국민의힘이 밀어붙인다 해서 간단히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일단 여가부를 포함한 현 정부조직법대로 정부를 출범시키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을 수 있다.
이 경우 윤 당선인과 국민의힘이 주장해 온 여가부 폐지의 명분이 그다지 절실하지 않음을 스스로 인정한 건 아닌지 의문을 갖게 된다. 새 정부가 나라와 국민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진단한 정책이라면 난관이 예상되더라도 에두르지 않고 관철시키려 노력하는 게 바람직하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식의 태도는 정당하지 않다. 명분이 확실하다면 아무리 다수 의석을 가진 야당이라도 무작정 반대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또 다른 설명은 오는 6월 1일 치러지는 지방선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성 유권자의 표를 의식했다는 이야기다. 지난 20대 대선에서 윤 당선인의 20대 여성 득표율은 33.8%에 그쳤다. 그에 비해 이재명 후보는 58%의 지지를 받았다. 30대 여성에서도 49.7% 대 43.8%로 이재명 후보 지지세가 강했다. 윤 당선인과 국민의힘으로서는 이 부분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선 승리에 취해 여가부 폐지를 강행할 경우 올 지방선거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방선거를 노린 전략적 꼼수라는 지적이다. 국가 운영의 근간이 되는 정부 조직을 선거에서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게 온당하냐는 비판이 그래서 나온다.
어느 경우든 결과적으로 폐지될 정부 조직의 장관을 뽑아서 부처 폐지 업무를 맡기는 기묘한 상황을 맞게 됐다. 이와 관련해 보다 근본적 질문을 던져야 할 지점이 있다. 우리 정부 조직에서 여가부는 숱한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부처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1년 여성부로 시작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축소 또는 폐지 논란에 휩쓸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여성 인권 향상, 직접적으로는 남녀 차별 금지라는 기치를 내세우며 존속했다. 여성계(여성단체들)가 여가부를 “수십 년 공들여 쌓은 탑”으로 표현하는 이유다. 이런 저간의 사정이 있는데도 윤 당선인은 지난 1월 7일 자신의 SNS에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단 7글자의 공약을 느닷없이 선포했다. 뚜렷한 근거나 대안 제시는 없었다.
여가부 폐지를 주장하는 측은 “현재 우리 사회에 구조적 남녀 차별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여성계는 “지금도 차별받고 있다”고 호소한다. 이 간극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그에 대한 깊은 고민은 있었는가 묻게 되는 것이다. 폐지를 기정 사실화한 부처에 새 장관을 임명하는 촌극은, 더구나 그것이 선거를 의식해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라면 국민 기만에 다름 아니다. 정직한 답이 있기를 바란다.
2022-04-12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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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자치경찰제, 그게 뭔가요?
1945년 10월 경찰 창설 이후 우리나라 치안조직은 경찰청장을 정점으로 하는 단일 구조였으나, 2021년부터는 경찰청장의 지휘·감독을 받는 국가경찰, 국가수사본부의 지휘·감독을 받는 수사경찰, 시·도자치경찰위원회의 지휘·감독을 받는 자치경찰로 나눠졌다. 자치경찰제는 여러 준비를 거쳐 그해 7월 1일 전국적으로 본격 시행됐는데, 중앙집권화된 국가경찰 단일 체제에서 벗어나 지역 실정에 맞는 치안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치안 업무에 지방자치단체도 책임을 지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시민들은 물론 경찰 스스로도 변화를 체감하지 못한다. 현행 자치경찰제가 여전히 국가경찰의 그늘을 걷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늬만 자치경찰”이라거나 “자치경찰사무는 있으나 자치경찰관은 없다”는 비아냥이 나오는 실정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2021년 1월 이후 조직 개편
국가·수사·자치경찰로 분리
지역자치단체 지휘·감독받는
자치경찰제, 그해 7월 시행
도입 2년 차, 시민 홍보 부족
지방자치법에도 명시 않아
국가경찰 ‘그늘’ 못 벗어나
기초단체와 연계성 높이고
독자적 예산 편성·집행 위해
조직 등 법적 근거 구체화해야
■ 경찰서장도 주민 직선으로?
근래 일선 경찰서장, 정확히는 시·군·구의 자치경찰대장을 주민이 직접 뽑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현행 자치경찰제는 광역시와 도, 즉 광역자치단체 단위의 자치경찰제다. 주민이 일상에서 가장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기초지자체 차원의 자치경찰제는 아직 도입되지 않았다. 당연히, 자치경찰제에 대한 주민의 인지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광역 단위로는 주민 밀착형 치안 서비스라는 자치경찰제의 취지를 실질적으로 살리기 어렵다. 지역 사정에 맞는 치안 서비스를 발굴하고 지역 특색에 따른 주민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 광역 단위 자치경찰사무 집행에 대해 해당 기초지자체가 비협조적으로 나올 경우 제어하거나 협의할 방도도 권한도 없다. 그래서 자치경찰제를 시·군·구 단위로 확대해 기초지자체와의 연계성을 높이고 지역 자치경찰대장까지 주민이 뽑도록 하자는 것이다. 최근 열린 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에서 기초 자치경찰제 도입을 요구한 바 있다.
■ 국가경찰이 자치경찰사무를?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자치경찰사무는 경찰법에 ‘관할 지역의 생활안전, 교통, 경비, 수사 등에 관한 사무’로 규정돼 있을 뿐, 지방자치법에는 명시돼 있지 않다. 자치경찰사무는 경찰 업무 중 일부이지 지방자치사무는 아닌 것이다. 이 때문에 관련 사무의 집행 절차에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부분이 자치경찰사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의 신분이 국가경찰이라는 점이다.
시·도자치경찰위원회는 자치경찰을 지휘·감독한다지만 독자적인 집행기구가 없다. 시·도자치경찰위원회가 지시 사항을 공문으로 시·도경찰청에 보내면 시·도경찰청장이 이를 해당 경찰서에 지시하게 된다. 자치경찰제라고는 하지만 진정한 자치경찰은 없고 기존 단일 국가경찰 조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로 인해 시·도자치경찰위원회는 실질적으로 지휘·감독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단순 심의·의결 역할에만 머무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다. 시·도자치경찰위원회의 그런 위상을 엿볼 수 있는 상징적인 사례가 있다.
■ 지구대·파출소는 못 내놓겠다?
시민 생활과 가장 밀접한 경찰 조직인 지구대와 파출소는 원래 각 경찰서 생활안전과 관할이었다. 그런데 자치경찰제 도입 직전에 경찰청이 ‘직제 시행규칙’을 고쳐 지구대와 파출소 운영·관리 부서를 112치안종합상황실로 바꾸었다. 이로써 지구대와 파출소가 범죄 예방을 목적으로 하는 생활안전 업무보다 112상황실의 출동 지령에 의해 범죄 사후 대응 조직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커졌다. 시·도경찰청 내 자치경찰사무 관련 부서의 조직·업무 조정은 경찰청의 단독 소관 사항이며, 시·도자치경찰위원회는 그와 관련해 아무런 권한을 갖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문제는 지구대와 파출소가 112종합상황실로 편제되면서 앞으로도 시·도자치경찰위원회가 지휘·감독권을 행사할 여지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생활안전이라는 자치경찰 업무를 최일선에서 수행해야 할 지구대와 파출소가 국가경찰 업무에만 치중하게 된 것으로, 자치경찰제 도입 취지에 역행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지구대·파출소 직제 개편은 국가경찰 조직이 자치경찰제에 얼마나 부정적인지를 분명히 일깨워 줬다는 지적도 있다. 경찰 인력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파출소와 지구대에 대한 관할권을 놓지 않겠다는 경찰청의 전략적인 방어라는 해석이 그렇다.
■ 인사권·예산편성권은 언제쯤?
경찰청장은 시·도경찰청장을 임용할 때 관련 법에 따라 시·도자치경찰위원회와 협의해야 한다. 하지만 세부 규정이 없어 형식적 협의에 불과한 실정이다. 또 시·도자치경찰위원회는 일선 경찰서장의 자치경찰사무 수행을 평가해 경찰청장에게 통보하고 경찰청장은 이를 인사에 반영토록 하고 있지만, 그 비중이 2%에 불과해 실효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고위 경찰 인사에 시·도자치경찰위원회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구조인 것이다. 자치경찰사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에 대해서도 시·도자치경찰위원회의 인사권은 제한적이다. 이들에 대한 승진이나 전보 등 인사권은 갖고 있지만, 승진심사위원회 구성 같은 실질적 권한은 각급 경찰서에 있기 때문이다. 일선 경찰들이 기존 국가경찰 조직의 눈치만 살피고 자치경찰제에 대해서는 부정적 인식을 갖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거기다 시·도자치경찰위원회가 독자적으로 예산을 편성·집행할 수 있는 명확한 법적 근거가 없다. 현행 경찰법에는 자치경찰사무의 인력이나 장비 등에 드는 비용은 국비로 지원토록 하고 있으나 신규 사업비나 후생복지비 등의 지원 규정은 없다. 2023년부터는 기존 국비 사업비도 각 지자체가 떠안아야 할 형편이지만 그에 대한 법 규정조차 현재로선 미비한 상태다.
■ 과거로 회귀? 천만부당!
사실 이런 문제점들은 자치경찰제 시행 전에 이미 숱하게 논의됐다. 그에 따라 당초에는 자치경찰 조직과 인력을 국가경찰에서 완전히 분리시키는, 이른바 이원화 경찰체제를 도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그 시도는 무산되고 지금처럼 기형적인 자치경찰제로 시행됐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둔 지금 자치경찰제는 원래 계획대로 국가경찰에서 완전히 분리된 체제로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가경찰은 전문적인 형사사법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자치경찰은 지역 치안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과 책임을 갖는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제도 개선이 필수적인데, 지방자치법 등 관련 법령을 고쳐 자치경찰사무를 지자체의 자치사무로 규정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자치경찰의 개념과 조직, 인사와 예산에 관한 법적 근거를 구체화하자는 것이다.
일각에선 자치경찰제를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보인다며 다시 국가경찰 단일 체제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제기한다. 자치경찰제는 숱한 어려움을 이겨 내고 일궈 낸 경찰 개혁의 소중한 성과다. 이를 폐기하고 과거로 회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온전한 자치경찰제의 시행이 자치행정, 자치교육에 이어 자치분권을 완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022-04-06 [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