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걸리로 우주 정복? 스타워즈 캐릭터 무장한 '스톰탁주' [술도락 맛홀릭] <6>
우리 술과 클래식 음악, 그리고 외계인.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3가지가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클래식 음악으로 술을 빚던 경남의 한 양조장이 최근 영화 ‘스타워즈’ 캐릭터를 앞세운 막걸리를 출시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만남의 사연이 궁금해 밀양시 단장면으로 향했다.
■전통주, 클래식 선율에 취하다
중앙고속도로 밀양IC를 빠져나와 단장천과 논밭이 펼쳐진 시골길을 달리길 5분여. 도로 안쪽으로 대형 문주와 입구를 갖춘 신식 건물이 나타난다. 4년 전, 인근 태룡리에서 단장리로 자리를 옮긴 ‘밀양클래식술도가’(옛 단장양조장)이다. 입구 주차장에 세워 둔 냉장탑차부터 눈길을 끈다. 차량 화물칸 겉면이 온통 스타워즈 캐릭터인 ‘스톰트루퍼’ 그림으로 가득하다.
“경운기 모는 스톰, 부채춤 추는 스톰, 김장 담그는 스톰 등 더 재밌는 그림이 많습니다. 요즘 젊은 양조인들이 늘고 있잖아요. 좀 재밌게 표현해 보고 싶었죠.” 배현준(37) 총괄매니저가 환한 웃음으로 취재진을 맞으며 설명을 보탠다.
여기까지만 보면 밀양클래식술도가를 신생 양조장으로 여기기 쉽지만, 무려 90년 넘는 역사를 지녔다. 시골마을에 흔히 있을 법한 양조장은 2009년 배 매니저의 장인 박종대(64) 대표가 인수하면서 달라졌다. 박 대표가 어린 시절 뛰놀던 바로 그 양조장이었다. 그는 ‘단장양조장’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클래식 음악을 활용해 술을 빚기 시작했다.
“클래식의 잔잔하고 섬세한 리듬이 발효·숙성 과정에서 효모의 활동성을 깨웁니다. 효모가 어떻게 활발하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술의 맛이 달라지거든요.”
박 대표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는 ‘클래식 발효’가 오랜 연구 끝에 탄생한 비법이기 때문이다. 양조장 운영은 15년째지만 박 대표가 실제로 술을 빚은 기간은 배 이상이다. 그는 고향으로 귀농하기 전까지 부산에서 웨딩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자택에 술방을 마련해 끊임없이 맥주·막걸리·와인 등을 빚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가양주 문화가 자연스럽게 취미로 이어졌다. 우리 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지금처럼 높지 않던 시절, 그는 전통주 동호회에서 활동하며 멀리 호남 지역까지 강의를 다니기도 했다.
박 대표의 또 다른 취미는 클래식 음악 듣기다. 집이건 스튜디오건 클래식 선율이 끊어질 않았다. ‘일탈’처럼 보이는 우리 술과 클래식의 만남이 박 대표에겐 ‘일상’이었던 셈이다.
단장양조장에서 밀양클래식술도가로, 2019년 확장 이전을 하면서도 바뀌지 않은 건 ‘클래식’이다. 체험동과 제조동 전체에서 박 대표가 선곡한 클래식 선율이 울려 퍼진다. ‘톡 톡 토독 톡 톡 토도독….’ 곡과 곡 사이 잠깐의 침묵이 흐르자 발효조 안에서 또 다른 연주가 들려온다. 발효 막바지 단계에서 기포가 터지면서 내는, 술 익는 소리다.
“밤에 음향을 낮추면 (효모의)활동성이 떨어지고, 낮에 음향을 올리면 활동성이 올라가요. 잔잔한 선율에서 악센트가 센 파트로 바뀌어도 활동성이 떨어진답니다.” 배 매니저의 설명을 듣고 다시 보니 음악에 맞춰 술이 춤을 추는 듯하다.
■캐릭터 술 앞세워 세계로, 우주로
밀양클래식술도가는 ‘클래식’의 또 다른 의미인 ‘전통’을 강조한다. 박 대표는 줄곧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면서 직접 배양한 효모를 사용해 쌀과 누룩, 천연감미료 등으로 술을 빚는다.
처음엔 클래식막걸리와 클래식청약주 2종이었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한층 다양해졌다. 특히 아들 같은 사위, 배 매니저가 5년 전 합류하면서 신선한 변화가 일었다.
“처음엔 양조장이 뭔지도 몰라 간장을 만드는 곳인가 싶었어요. 아버지 기술이 참 좋은데 알릴 방법이 없어 너무 막막했죠.”
부산에서 유통사를 운영하던 그는 전국 양조장을 100군데 넘게 돌아다니며 벤치마킹과 실험을 거듭했고, ‘전통’과 ‘변화’의 갈림길에서 두 가지 모두를 선택했다.
고민 끝에 2018년 탄생한 ‘마실꾸지’는 꾸지뽕 열매를 손수 갈아 넣어 만든 막걸리다. 살구빛 빛깔에서 연상되듯 젊은 층이 좋아할 만한 새콤달콤한 향미가 특징이다. 뒤이어 출시한 ‘밀양대추막걸리’는 자연탄산이 가득한 샴페인 막걸리다. 일주일에 100병씩 소량만 생산하기 때문에 선착순 전화 주문만 받는다.
2021년 선보인 ‘밀양탁주’는 기존 클래식막걸리에서 밀을 빼고 100% 쌀로만 빚은 막걸리다. 정부 ‘술품질인증’을 획득하고 밀양이란 지역명까지 더해져 특히 주변 캠핑장을 찾는 이들에게 인기다.
꾸준한 실험과 변화 속에서 작심하고 만든 술이 있으니 바로 ‘스톰탁주’다. 최근 온라인 판매를 시작했는데 SNS 등으로 소문이 나면서 금세 밀양클래식술도가의 대표작으로 떠올랐다.
외관도 이름처럼 독특하다. 술병 전체를 영화 ‘스타워즈’의 캐릭터 중 하나인 ‘스톰트루퍼’(스톰) 이미지로 채웠다. 병뚜껑 위에도 스톰 얼굴(헬멧) 캡을 씌워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수많은 캐릭터 중 왜 스톰일까.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서울의 (주)우주라이크와 협업하면서 ‘그냥 캐릭터만 활용한 술이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술을 만들어 보자’는 얘기를 나눴어요. 스톰 캐릭터 자체가 백색이라 막걸리하고도 닮았잖아요. 영국 셰퍼톤 디자인 스튜디오와 연결되면서 정식 라이선스 계약까지 맺었죠.”
막걸리로 ‘지구정복’을 넘어 ‘우주정복’을 하겠단 야심찬 스토리텔링처럼, 배 매니저는 외국인에게 익숙한 스톰 캐릭터를 통해 해외 입맛을 사로잡겠단 계획이다. 그러기 위해 술의 기본인 맛부터 많은 신경을 썼다. 밀양탁주와 주원료는 같지만 쌀의 함량을 늘렸고, 12~13일 발효를 거친 뒤 사흘 동안 저온숙성을 더했다.
실제로 스톰탁주를 한 모금 들이켜자 같은 뿌리인 밀양탁주와는 전혀 다른 향미가 느껴진다. 은은한 달콤함 속에 포도를 닮은 과실 향이 풍기는 이색적인 맛이다.
■클래식·외계인과 어울리는 맛은
스톰탁주는 누구나 가볍게 마실 수 있는 6도와 애주가를 위한 17도, 2종이 있다. 특히 17도는 물을 전혀 섞지 않은 원주로, 알코올의 쏘는 맛이 강하기 때문에 얼음을 섞거나 다른 음료와 함께 마시면 좋다. 온라인에선 6도와 17도를 묶은 세트도 판매하는데, 취향에 따라 두 술을 원하는 비율로 섞어 마실 수 있다.
밀양 쌀로 세 번 빚어 삼양주의 부드러움을 지닌 스톰탁주는 한식과 양식 모두와 어울린다. 밀양클래식술도가를 찾으면 갓 생산된 술과 궁합이 맞는 음식도 맛볼 수 있다. 지금의 자리로 확장 이전하면서 막걸리 체험공간인 ‘카페표충로’를 함께 열었는데, 방문객들의 요구로 현재는 식당처럼 운영되고 있다.
식사류 대표메뉴는 밀양탁주(또는 차) 한 잔이 함께 나오는 ‘새싹불고기비빔밥’이다. 새싹잎과 산채나물, 소불고기 등을 곁들인 푸짐한 비빔밥과 탁주의 조합은, 농사일을 하다 먹는 막걸리와 새참 같은 느낌이다. 안주류로는 돼지수육과 오돌뼈 등이 있다. 수육은 껍질 부위를 바삭하게 구운 식감이 매력이고, 땡초가 들어간 매콤한 오돌뼈도 절로 술을 부른다.
밀양클래식술도가는 스톰탁주를 시작으로 비슷한 계열의 자매품과 시즌별 술도 출시할 예정이다. 해외 수출도 올해부터 본격화한다. 다음 달 7일에는 서울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에서 스톰탁주 정식 출시 행사가 열린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기자들의 시음평]
▶김희돈 스포츠라이프부 부장
“청포도 같은 상큼한 향이 느껴지다 강한 끝맛을 남긴다. 독특한 캐릭터처럼 독특한 맛.”
▶남형욱 디지털미디어부 기자
“꽃향기와 함께 과일 향이 많이 난다. 이국적인 향 때문에 누군가는 거부감이 들 수도….”
▶김동우 편집파트 기자
“라벤더 같은 꽃향기에 맛도 독특. 요즘처럼 날이 풀리는 시기에 잘 어울릴 것 같다.”
▶이지민 디지털미디어부 에디터
“신기한 맛이다. 살짝 포도 향이 느껴지며, 입 안에 남는 게 없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전문가의 맛 코멘트]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입국에서 유래한 뽀얀 컬러를 갖추고 있으며, 제성은 맑게 잘 되어 있다. 입자감도 곱고 바디감도 미디엄 이하로 라이트한 느낌이다. 외관에서 주는 남성미 뿜뿜한 이미지와는 달리 향은 정반대 느낌이다. 부드러운 곡향과 함께 달콤새콤한 청포도 향이 가득 피어오른다. 맛에서도 향에서 느낀 관능적 특성이 이어지며, 음료수처럼 술렁 넘어간다. 천연감미료가 들어가 입안에 텁텁함이 남지는 않으나 단맛이 길게 남는다. 막걸리 입문자나 단맛을 선호하는 분들이 환영할 만한 막걸리다.”
-제품명 : 스톰탁주
-양조장 : 밀양클래식술도가(경남 밀양시)
-내용량 : 600mL
-알코올 : 6.0%
-원재료 : 쌀·입국·정제수·천연감미료
2023-03-15 [06:30]
-
봄바람처럼 '새콤·달콤·상큼'…부산 다대포서 만난 '딸기막걸리' [술도락 맛홀릭] <5>
낙조로 유명한 부산 다대포해수욕장, 몰운대 입구에 가면 3대째 이어져 온 주점 ‘할매집’이 있다. 1979년부터 1대 시할머니가, 뒤를 이어 2대 시어머니도 손수 술을 빚었다. 이름조차 없던 할매집 동동주는 3대째에 이르러 완전히 달라졌다. 변화를 이끈 주인공은 MZ세대 ‘며느리’이다.
■딸기, 막걸리에 빠지다
사하구 다대동의 한 아파트단지 상가 2층. 통유리 안으로 묘한 풍경이 비친다. 부드러운 파스텔톤 타일과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를 보면 카페 같은데, 창가엔 대형 스테인리스 통이 줄지어 섰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봄바람처럼 은은한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술이 익어 가는 내음이다.
공간의 주인장인 박미화(38) ‘올빚찬주’(옛 순진도가) 양조장 대표는 빨강·노랑·하양 뚜껑의 막걸리를 내놓으며 취재진을 맞았다. 셋 중 빨간 뚜껑에 유난히 눈길이 간다. 라벨도 핑크빛, 내용물도 핑크빛이다. 박 대표가 1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한 딸기막걸리 ‘올빚베리’이다.
“제가 ‘알쓰’(술을 잘 못 마시는 사람을 일컫는 ‘알코올 쓰레기’의 줄임 말)여서 소주 같은 독한 술은 못 마셔요. 술내 안 나는 순한 술을 좋아하다 보니 제 입에 제일 맛있는 술을 만들었죠.”
결혼 전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한 박 대표는 20대 시절부터 시어머니 장사를 도우며 술 만드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밥으로 먹는 쌀이 술로 변하는 게 마냥 신기했던 그는 10여 년이 흐른 지금, 냄새만 맡아도 술 익은 정도를 알아맞히는 수준이 됐다.
올빚찬주의 대표작이자 가장 최근에 개발한 올빚베리는 박 대표가 가장 아끼는 술이다. 가게 손님이 많은 봄·여름·가을에는 한 달에 2000병씩 팔린다. 온라인 판매 없이 순수하게 주점 등 오프라인으로만 판매되는 양이다. 전문가들도 맛을 인정해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2020년, 2021년 연속으로 탁주 부문 ‘대상’(공동)을 받기도 했다.
박 대표는 인공 향료를 넣지 않고 진짜 딸기로만 향과 맛을 낸다. 딸기 함량을 탁주의 기준 한도인 20%까지(초과하면 ‘과실주’로 분류)로 가득 채운다. 간간이 씹히는 딸기 씨도 재밌는 식감이다.
“처음엔 무턱대고 딸기를 많이 넣었는데 술내도 많이 나고 제가 생각했던 맛이 아닌 거예요. 딸기 넣는 시점과 양을 조절하면서 최대한 향과 맛을 살리려고 정말 노력했어요.”
올빚베리를 유리잔에 따라 향을 맡으니, 딸기 느낌이 강하진 않다. 그런데 한 모금 마시자 입 안에서 딸기의 향미가 은은하게 퍼져나간다. 막걸리 입문자에겐 부담 없고, 독한 술에 익숙한 애주가라면 딸기주스처럼 여길 맛이다.
박 대표는 맛과 향 못지않게 외양에도 신경을 썼다. 핑크빛을 내기 위해, 고두밥에 ‘홍미(紅米)’를 섞어 딸기 느낌을 한층 살렸다. 라벨 디자인도 MZ세대 감성에 맞춰 귀엽게 수정했다.
■전통, 변화를 응원하다
‘올바르게 빚어 가득 채운 술’. 올빚찬주 양조장의 시작은 2018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어머니의 뒤를 이어 할매집 뒤쪽 부엌 좁은 공간에서 술을 빚던 박 대표는 남편과 상의 끝에 가게와 양조장을 분리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지금의 자리 인근에 5평짜리 공간을 마련하고 양조장 이름을 ‘순진도가’라 지었다. 시할머니(순희), 시어머니(순자), 남편(진만)의 이름을 따 박 대표가 작명했다.
“돌이켜 보면 진짜 멋모르고 차린 것 같아요. 5평 이상이어야 허가가 난다고 해서 이틀 정도 알아보고 그냥 5평짜리 공간을 구한 거거든요.”
양조장을 차린 뒤 술만 잘 빚으면 될 줄 알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관련 법에 따라 챙겨야 할 서류만 해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물어볼 데도 마땅치 않아 울기도 많이 울었다. 순진도가란 명칭도 순탄치 않았다. 비슷한 이름의 양조장이 있어 3년 넘도록 상표 등록이 안 됐다. 고민 끝에 지난해 5월께 지금의 자리로 확장 이전하면서 양조장 이름도 바꿨다.
규모를 키웠다곤 해도 여전히 15평 정도의 소규모 양조장이다. 돈을 벌 때마다 하나씩 장비를 갖춰, 현재는 몇몇 발효와 제성 단계에서 기계를 활용한다.
“처음엔 무조건 손으로 술을 빚어야 맛있다는 고정관념이 있었어요. 하지만 더 일정한 맛을 내고, 더 길게 가기 위해 생각을 바꿨죠.” 박 대표는 “하나씩 설비를 갖추어 가는 재미도 있다”며 유쾌하게 웃어 보였다.
올빚찬주에는 올빚베리 말고도 3가지 술이 더 있다. 찹쌀로만 빚은 막걸리인 ‘올빚찹쌀’과 과거 시할머니·시어머니표 술을 개량한 ‘올빚곡주’ 5도·8도 등이다. 올빚곡주 8도는 유일하게 두 번 빚은 이양주이다. 한 달 넘게 숙성하고 월 70병밖에 생산하지 않아 웬만해선 맛보기 힘들다.
올빚곡주 5도는 예전 할매집 동동주가 뿌리지만 맛은 확연히 다르다. 예전 술이 산성누룩을 써 산미가 강한 반면, 올빚곡주 5도는 다른 누룩을 사용해 새콤달콤한 맛이 특징이다. 여기에 부드러움과 달콤함을 더해 좀더 대중적인 막걸리로 개발한 게 찹쌀막걸리인 올빚찹쌀이다.
가업을 물려받았지만, 수십 년 동안 내려오던 전통의 술맛을 바꾸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시어머니의 평가는 어떨까. “그동안 술 빚느라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술을 안 드시는데, 얼마 전 올빚곡주(5도) 맛을 보셨어요. ‘너무 맛있다’며 칭찬해 주시는데 정말 감동이었죠.”
■‘새콤달콤’ 딸기막걸리와 어울리는 맛은…
앞으로 박 대표의 목표는 신제품 출시도 사업 확장도 아닌 품질이다. 전통 누룩을 쓰는 만큼 ‘주질’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또 하나 바람이 있다면 온라인 판매다. 현행법상 지역특산물을 사용한 ‘지역특산주’가 아니면 온라인에서 술을 팔 수 없다. 소규모 양조장인 올빚찬주는 그때그때 조금씩 재료를 사서 빚기 때문에 해당이 안 된다.
“저처럼 막걸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소규모 양조장을 차리는 사례가 앞으로 많아질 거예요. 온라인 판매 기준이 완화돼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전통주를 좀 더 편하게 구입해서 마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올빚찬주의 작은 규모를 보고 양조장 창업에 자신감을 얻어가는 이들도 있다고 하니, 머지않아 부산 곳곳에서 소규모 양조장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올빚베리 딸기막걸리의 주 판매처는 박 대표의 남편이 운영하는 ‘할매집’이다. 당연히 할매집 안주와 잘 어울린다. 대표메뉴는 문어·수육·야채무침과 쌈이 조합된 ‘삼합’. 특히 문어는 다대포 앞바다에서 통발낚시로 직접 잡아 올린 자연산이다.
칼칼한 국물과 어우러진 해물어묵탕도 추천 메뉴다. 게·조개 등 자연산 해물과 부산어묵·쌀떡이 들어간 조합이 푸짐하다. 땡초가 들어간 매운 부추전도 궁합이 맞다.
올빚베리의 새콤달콤함은 매운 맛뿐만 아니라 기름진 음식의 느끼함도 덜어 준다. 입소문이 나면서 이제는 부산지역 족발집과 양고기 식당에서도 딸기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 일부 전통주점과 전통주 보틀숍에서도 구매가 가능하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기자들의 시음평]
▶김희돈 스포츠라이프부 부장
“첫맛은 상큼, 끝맛에서 알코올 기운이 살짝. 기분 좋은 취기를 원하는 입문자용 막걸리.”
▶남형욱 디지털미디어부 기자
“되게 자연스러운 과일 막걸리 느낌. 샤베트처럼 얼려서 시원하게 먹어도 맛있을 것 같다.”
▶이상배 디지털미디어부 기자
“딸기 향은 별로 안 난다. 색깔은 딸기우유인데, 달달함보다는 새콤한 딸기 맛을 강조한 듯.”
▶이지민 디지털미디어부 에디터
“새콤달콤 자연스러운 딸기 맛이라 가볍게 즐기기 좋다. 귀여운 라벨도 20~30대 취향 저격.”
[전문가의 맛 코멘트]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완숙된 딸기라기보다는 딸기가 익어가는 과정에서 맡을 수 있는 풋풋한 향이 느껴지며, 단향과 함께 새콤한 향이 약하게 올라온다. 딸기 향의 강도는 전반적으로 라이트한 느낌. 맛은 (술꾼 입장에선) 마치 딸기 음료처럼 가볍게 넘어간다. 알코올 도수도 크게 느껴지지 않고 적당한 새콤달콤함이 있어,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분들도 즐기기 좋겠다."
-제품명 : 올빚베리(딸기막걸리)
-양조장 : 올빚찬주(옛 순진도가·부산 사하구)
-내용량 : 750mL
-알코올 : 6.0%
-원재료 : 쌀·홍미·딸기·누룩·정제수·효모·감미료 등
2023-03-01 [06:30]
-
귀농 꿈꾸다 술 연구…달 생각하며 빚은 '일월삼주' [술도락 맛홀릭] <4>
귀농을 꿈꾸던 20대 청년이 있었다. 10년이 흘러 그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술을 빚는다. 양조를 넘어 전통주 연구에 빠져든 부산 청년을 만나러 경남 함안으로 향했다.
■만화에서 출발해 오기로 도전한 우리 술
함안군 군북면 월촌리 한 도로변에 자리한 샌드위치 패널 건물. 간판 하나 없는 이곳은 김 대표가 홀로 전통주를 연구·개발·생산·유통하고 있는 양조장, 아니 연구소다.
‘빛올’이란 양조장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아침 해처럼 빛이 올라온다는 의미와 오가닉(친환경) 재료를 쓴다는 점을 강조해 김비성(36) 대표가 직접 지었다. 정식 명칭은 ‘빛올양조연구소’. 실제로 김 대표는 연구원처럼 흰색 가운 차림으로 취재진을 맞았다.
“제품을 만들 때 정밀하고 체계적이어야 하잖아요. 추후엔 발효 관련 연구 과제도 수주해 운영할 계획이어서 연구소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빛올양조연구소는 효모를 접종·배양하는 시설과 흡광도측정기 등 여느 양조장에는 없는 각종 실험 장비를 갖추고 있다. 대표 사무실을 겸한 공간 명칭도 ‘실험실’이다. 이 실험실은 술이 익어가는 ‘담금실’과 문 하나 사이로 연결된다.
김 대표가 우리 술에 입문하게 된 계기부터 흥미롭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그는 잔병치레가 많아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경남 등지로 등산을 자주 다녔다. 그렇게 자연과 친해졌고, 자연스럽게 농촌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도시 청년으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체계적으로 귀농 준비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전통주 양조장을 생각했던 건 아니다. 눈을 띄우고 불을 지핀 건 만화였다. “귀농을 하면 음식도 직접 만들어야 하니 한때 모든 관심사가 요리였어요. <식객>이란 만화를 보다 술 만드는 방법이 나오길래 한 번 빚어 봤는데 너무 맛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오기가 생겼죠.”
100번이고 200번이고 집에서 술을 빚으며 시행착오를 겪다 전통주 교육기관의 존재를 알게 됐고, 체계적으로 배우면서 우리 술의 매력에 푹 빠졌다. 실패하면 성공할 때까지 계속 도전하는 성격 덕분에 김 대표는 곧 전통주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아마추어로 참가한 2018년 궁중술빚기 대회에서 장관상을 받는 등 각종 대회에서 수상이 이어졌다.
하지만 양조장을 차리고, 술을 출시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일. 부산대 대학원(식품영양학)에서 미생물을 연구하고, 서울을 오가며 전문적인 전통주 교육을 받는 등 수년간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 비용을 아끼려 양조장 건물은 건축일을 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손수 지었다. 실험 장비들도 중고로 구하거나 여기저기서 지원을 받아 마련했다.
2021년에야 사업자 등록을 하고, 이듬해 비로소 첫 번째 술이 탄생했다. 귀농을 준비한 지 10년 만에 김 대표의 꿈이 빛을 본 것이다. 빛올의 술이 더 값져 보이는 이유다.
■익어가는 청년의 꿈, 달을 생각하며 빚다
‘일월삼주(一月三舟·하나의 달을 세 배에서 본다)’. 술 이름에서도 고민의 흔적이 엿보인다. 같은 달도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이듯, 누룩으로 빚은 술의 다양하고 풍성한 맛의 특징을 이름에 담았다.
“하나의 원주에서 일주(탁주), 이주(약주), 삼주(소주)가 나오는 점도 일월삼주의 의미와 딱 맞아떨어져요. 게다가 이곳 마을 이름도 월촌(月村)이거든요.”
일월삼주는 탁주인 ‘일주142’, 약주인 ‘이주’, 현재 개발 중인 ‘삼주’(소주)까지 모두 3종이다. 일주는 지난해 7월, 이주는 같은 해 10월 출시됐다. 두 술 모두 알코올 도수가 거의 원주에 가까운 14.2도이다.
이주는 일주를 맑게 걸러낸 술이어서 같은 뿌리지만, 향과 맛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일주는 진한 막걸리 특유의 질감을 보여 준다. 산미도 강해 누룩 막걸리 특유의 맛을 좋아하는 애주가라면 구미가 당길 만하다. 풍성한 과실향과 새콤달콤한 향미를 지닌 이주는 입맛을 돋우는 식전주로 좋다. 일주·이주 모두 높은 알코올 도수에 비해 부드럽게 감기는 맛이다. 다만 연거푸 몇 잔 기울이다 보면 화끈한 알코올 기운이 올라온다.
일월삼주는 쌀·물·누룩으로만 빚는다. 쌀은 오리농법으로 키운 함안지역 친환경 찹쌀 ‘도란미’를 쓴다. 단양주임에도 세 번, 네 번 빚은 삼양주·사양주 같은 깊이가 있다. 45일이라는 긴 발효 기간에다 직접 배양한 ‘빛올효모’를 넣어 맛의 깊이를 더했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이주는 일주를 여과한 뒤 한 달 정도 더 숙성을 한다.
“연잎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견한 효모를 배양해서 쓰고 있어요. 누룩도 자가 누룩으로 대체하려고 시도 중이고요. 이주의 경우 여과를 통해 일주의 탁한 부분은 물론 효모까지 걸러내기 때문에 전혀 다른 맛이 납니다.” 차분한 설명 속에서 홀로 연구·실험하며 고군분투했을 시간들이 느껴진다.
아직은 1인 기업이지만, 김 대표의 마음 속엔 더 큰 꿈이 익어가고 있다. 도수가 낮은 7도짜리 탁주를 올해 출시하고, 뒤이어 25도짜리 증류식 소주인 ‘삼주’를 선보일 계획이다. 일월삼주 3종 세트가 완성되면, 함안 특산품인 수박을 활용한 수박 막걸리도 내년쯤 내놓겠단 구상이다.
120평 규모의 양조장 건물 중 현재 사용하는 공간은 절반 정도. 나머지는 김 대표가 펼칠 또 다른 미래를 위해 남겨 뒀다.
“빈 공간을 예쁘게 꾸며서 일반 사람들이 시음도 하고 양조장 견학을 할 수 있게끔 운영하고 싶어요. 그보다 먼저 직원을 둬야 할 정도로 생산(판매)량을 늘리는 게 1차 목표입니다.”
현재 일주와 이주의 월 판매량은 각 1000병 정도. 탁주 못지않게 약주의 판매 비율이 높다. 온라인 쇼핑몰과 보틀숍, 부산지역 일부 주점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일월삼주와 생선구이·소수육이 만나면…
일월삼주는 알코올 도수가 높다 보니 술술 마시기보단 식전주, 혹은 식사와 곁들여 조금씩 음미하길 추천한다. 보통의 탁주·약주처럼 기본적으로 한식과 궁합이 맞는데, 매콤한 음식에는 이주보다 일주가 더 잘 어울린다.
일월삼주와 어울릴 함안지역 맛집 중엔 ‘전원휴게소’란 생선요리 전문점이 있다. 식사 시간대엔 넓은 주차장이 가득 들어찰 정도로 손님이 몰린다. 메뉴는 단출하게 생선(모둠)구이·생선조림·갈치조림 단 3가지. 주인장이 부산과 여수 등지를 돌며 가격대가 맞는 가장 신선한 생선을 공수해 온다고 한다. 모둠구이에는 이주, 칼칼한 양념이 배인 조림에는 일주가 어울린다.
무한리필인 밥과 미역국, 쌈(배추·다시마)에서 시골 밥상의 넉넉한 인심이 느껴진다. 계절별로 10여 가지 생선 중 골라 구워낸 모둠구이는 물론, 미역국에 들어가는 생선도 그때그때 바뀌기 때문에 시기별로 다양한 생선을 맛볼 수 있다. 매일 요리에 쓰인 생선을 화이트 보드에 ‘오늘의 생선’으로 소개한다.
함안과 지척인 의령에는 소고기가 유명하다. 소고기 음식 중에서도 별미인 소수육은 김 대표가 추천하는 조합이다.
일월삼주를 더 맛있게 마시려면 시원하게 보관하길 권한다. 특히 일주는 냉동실에 2시간 정도 넣어 두거나 얼음잔에 부은 뒤 흔들어 마시면 한층 부드럽고 깊은 맛을 즐길 수 있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기자들의 시음평]
▶김희돈 스포츠라이프부 부장
(일주) "허한 속과 취기를 동시에 채우는, 땀 흘리며 모내기 한 뒤 마시는 농주 같은 느낌."
(이주) "매실 원액을 마시는 것처럼 향이 엄청 강하다. 향도 맛도, 압도적인 바디감이다."
▶이상배 디지털미디어부 기자
(일주) "걸쭉하게 새콤하면서 달다. 매실 느낌의 새콤함이 받쳐줘 단맛이 물리지 않는다."
(이주) "매실주 향이 나면서, 뒷맛은 약주의 진한 여운. 젊은 층도 친숙하게 마실 수 있을 듯."
▶이지민 디지털미디어부 에디터
(일주) "맛있는데 세다. 속 안에서 뜨끈뜨끈한 게 느껴진다. 그냥 마시면 훅 갈 것 같은..."
(이주) "새콤한데 끝맛이 살짝 고소하다. 향도 새콤달콤한데, 과일주보다 훨씬 고급스럽다."
▶정윤혁 디지털미디어부 PD
(일주) "진한 막걸리 하면 상상되는 바로 그 느낌. 높은 알코올 도수에 비해 세진 않다"
(이주) "처음엔 독한 느낌이 들다 점점 옅어져 무겁지 않다. 잔향이 입안에 계속 남는다."
[전문가의 맛 코멘트]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일주) "향에서 새콤한 과실이 떠오른다. 적당히 익은 자두를 깨물었을 때의 새콤함, 청매실의 싱그러움 등과 함께 곡물과 견과류의 구수함이 저변에 은근하게 깔려 있다. 향의 특징이 맛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데, 원주에 가까운 농밀함과 곡류의 단맛에 강한 산미가 더해져 맛을 완성한다. 농축미·감칠맛이 강해 입을 자꾸만 다시게 된다. 입맛 없을 때나 더울 때 차갑게 마시면 없던 입맛도 돌아올 것 같다. 대중 막걸리에 익숙한 분들에겐 어려운 맛일 듯. 술꾼들에게 권하고 싶은 막걸리다."
(이주) "막 오픈했을 땐 향이 다소 갇힌 듯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깨어난다. 일주에서 느껴진 과실 산미가 전체적인 맛을 형성한다. 단맛보다 산미가 조금 더 강해 술맛을 리드하는 느낌인데, 둘이 탄탄하게 어우러지며 후미까지 쭉 한 몸으로 이어진다. 식전주로 입맛을 돋우는 데 아주 좋을 듯."
-제품명 : 일월삼주 '일주142' / '이주'
-양조장 : 빛올양조연구소(경남 함안군)
-내용량 : 350mL
-알코올 : 14.2%
-원재료 : 쌀·누룩·빛올효모·정제수
2023-02-15 [06:35]
-
[영상] 매콤한 낙지도, 부드러운 치즈도 홀린 ‘동래아들’ [술도락 맛홀릭] <3>
일본에서 사케 전문가로 활동한 한국인. 뒤늦게 우리 술에 빠져 고향 부산으로 돌아온 청년. 수많은 시도 끝에 완성한 막걸리로 ‘대상’까지 받았고, 이제는 한국의 양조 문화를 세계에 알리려 한다. 부산의 한 주택가에서 태어난 ‘동래아들’ 이야기이다.
■돌고 돌아, 우리 술에 빠지다
부산 동래구의 한 주택가에 있는 빛바랜 타일 외벽의 3층짜리 건물. 전통주 양조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부산 대표 술로 떠오른 ‘동래아들’ 막걸리가 탄생한 곳이다.
양조장 ‘기다림’ 조태영(41) 대표에게 동래아들은 ‘부캐’(또 다른 캐릭터) 혹은 분신 같은 술이다. 20년 동안 술을 공부해 온 세월의 무게와 경험치, 전문성이 한 병 한 병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갓 불혹을 넘긴 청년 양조인이지만 술 관련 경력은 여느 장인 못지않다. 20대 초반 술을 공부하러 일본으로 건너갔고 바텐더와 소믈리에, 일본 전통주인 사케 전문가로도 활동했다.
“일본에선 바텐더를 굉장히 품격 있는 전문직으로 여겨요. 60대에도 활동하는 바텐더가 있을 정도죠. 사케 전문가 자격증을 따서 현지인을 가르쳤는데, 한국인 강사라 그런지 더 좋아했던 것 같아요.”
부지런히 유럽 와이너리를 오가며 와인 공부도 하는 등 정신없이 술에 빠져 지내던 조 대표에게 우연히 새로운 술이 찾아왔다. 2011년 서울에서 열린 한 전통주 행사에 참석했다가 전통 방식으로 제대로 빚은 우리 술을 맛본 것이다.
“소곡주처럼 올드한 느낌의 술이었는데, 와인 같기도 사케 같기도 한 게 오묘했어요. 뭔가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에 독학으로 우리 술을 빚기 시작했죠.”
맥주·사케·위스키까지 홈브루잉(자가양조)을 하던 그였지만 막걸리 양조는 처음이었다. 숙취가 심한 체질이 외려 도움이 됐다. 정통 발효법으로 막걸리를 빚었더니, 마신 다음 날 전혀 숙취가 없었다. ‘기존 막걸리는 왜 숙취가 심할까’ ‘지레 막걸리를 기피하는 사람들에게 숙취 없는 맛을 보여 줄 방법은 없을까’ 물음은 꼬리를 물었고, 결국 해결책을 찾아 창업을 결심했다.
■옥동자 ‘동래아들’이 탄생하기까지
2011년 한국으로 돌아온 조 대표는 우리 술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관련 지식과 경험이 무르익었을 무렵 동래구 사직동 주택가에 1인 스타트업 ‘제이케이크래프트(JKCRAFT)’를 차렸다. 양조장을 제조 공장처럼 운영하기 싫어 선택한 장소였다.
“일본에선 300~400년 된 양조장이 집 근처에 있어요. 우리나라도 옛날엔 ‘가양주’ 문화가 있었잖아요. 양조를 제조가 아닌 문화로 보고 색다른 공간에서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처음 가보는 길인 만큼 걸림돌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역특산주 면허로는 부산 1호인 데다, 주택가에 양조장이 들어선 전례가 없다 보니 행정기관의 허가를 받기까지 무려 1년이 걸렸다.
긴 기다림 끝에 2015년 양조 허가를 받은 제이케이크래프트는 이듬해 첫 번째 술 ‘기다림34’를 선보였다. 발효부터 숙성까지 100일이나 걸리고, 가격도 1만 2000원으로 당시로선 선뜻 지갑을 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맛을 보고 만족스러워하다가도 가격을 얘기하면 다들 손사래를 쳤어요. 초창기엔 국내 영업이 힘들어 술을 메고 일본으로 다녀야 했죠. 후쿠오카 일식당 등 20여 곳에 ‘라이스 와인(Rice Wine)’이라 홍보하며 판매를 했어요.”
‘기다려온’이란 브랜드로 비누·샴푸·트리트먼트 등 발효 제품도 출시하며 사업을 확장할 무렵, 조 대표는 안주하지 않고 또 한 번 도전에 나섰다. ‘기다림34’ 생산을 전면 중단하고 좀 더 대중적인 술 개발에 나선 것이다.
기다림에 담긴 초심과 철학을 그대로 가져와 2019년 양조장 ‘기다림’을 만들었고, 1년 뒤 첫 작품 ’동래아들’ 막걸리를 선보였다. “기다림 막걸리가 와인을 만들 듯 제가 제일 잘하는 공법으로 빚었다면, 동래아들은 음료수처럼 만들었어요. 누구든지 편하게 마실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호불호 없는 음료수처럼 빚은 술
부산 강서구 해포도 쌀로 빚은 동래아들 막걸리는 하얀 빛깔부터 시선을 끈다. 병을 잘 흔들어 투명한 잔에 따르면 술인지 우유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다. 맛 또한 막걸리스럽지 않다. 산미가 거의 없고, 목 넘김은 우유나 요구르트처럼 부드럽다. 하얀 바탕에 파스텔톤 하늘색으로 디자인한 술병 라벨과 딱 어울리는 이미지의 맛이다.
막걸리란 술 특유의 개성을 옅게 해, 외려 개성 있는 막걸리로 거듭난 느낌. 날카로운 산미를 부드럽게 다듬기 위해 일반적으로 잘 쓰지 않는 범주의 누룩과 미생물을 사용했다는 게 조 대표의 설명이다. “전통주를 빚을 때 누룩을 바꾸는 건, 마치 요리사가 쓰던 칼을 바꾸는 것과 같아요. 직원들도 굉장히 의아해했죠.”
사실, 동래아들 막걸리는 2020년 말 출시 이후 8차례 맛의 변화가 있었다. 조 대표는 직원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변화를 주면서 지금의 동래아들을 완성했다. 꾸준히 작은 변화를 시도한 이유는 맛의 균질함, 즉 품질 때문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양조 방식은 불안정한 측면이 있어요. 10여 년 전 막걸리 세계화 붐이 일었다가 실패한 이유도 품질 때문이었어요. 외국인들에게 할머니 손맛을 얘기하면 안 통하거든요. 수제의 감성을 가지면서도 발효는 과학적이어야 합니다.”
조 대표는 안정적인 발효를 위해 밑술 단계에서 젖산을 활용하는 기초 작업을 추가했다. 덕분에 밑술에 덧술을 더한 이양주이면서도, 세네 번 빚은 삼양주·사양주 같은 깊이감이 있다.
균질한 맛을 향한 집념은 결국 우리 술 전문가들의 인정을 받았다. 지난해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대기업 국순당과 함께 ‘대상’(탁주-생막걸리 부문)의 영예를 안았다.
조 대표는 더 높은 단계의 품질 안정화를 위해 스마트 팩토리처럼 양조 공정을 시스템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같은 프로 끓이면 똑같은 맛이 나는 라면처럼,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게 빚어 똑같은 술맛을 낼 수 있는 공정을 개발해 양조를 업으로 하려는 이들에게 보급할 계획이다.
조 대표의 더 큰 꿈은 우리나라 양조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일이다. 그 첫걸음으로 부산지역 대표 맛집 중 하나인 ‘원조 안경희 개미집’과 손을 잡았다. 양조장과 음식을 결합한 커뮤니티 공간을 상반기 중 부산에 선보이고, 하반기엔 일본 오사카에 2호점을 열 예정이다.
■부드러움과 매콤함, 극과 극의 조화
우유와 치즈가 만나면 느끼할 수 있지만, 우유 같은 동래아들 막걸리와 치즈는 멋진 마리아주(궁합)를 이룬다. 부드러움과 부드러움이 만나 한층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느낌이다. 치즈가 듬뿍 들어간 피자류도 동래아들과 곁들이기에 좋다.
동래아들의 부드러움은 정반대로 매운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50년 역사의 ‘원조 안경희 개미집’과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표 메뉴인 낙곱새는 신선한 재료와 특유의 매콤한 양념으로 입맛을 돋운다. 낙지는 한국산과 가장 맛이 비슷한 중국산 중에서도 최고 등급을 매달 샘플 테스트를 통해 엄선한다. 큼지막한 한우곱창은 당일 도축장에서 공수해 오는데, 곱창에 반해 찾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현재 동래아들 막걸리는 온라인과 메가마트 동래·남천점, 보틀숍과 일부 주점에서 판매하며 개미집 같은 일반 식당에선 맛볼 수 없다. 동래아들과 개미집이 합작하는 커뮤니티 공간이 그래서 더 기다려진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기자들의 시음평]
▶김희돈 스포츠라이프부 부장
“요구르트 약간 섞은 우유맛. 막걸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다.”
▶남형욱 디지털미디어부 기자
“달콤한데 끝맛은 상큼. 치즈와 함께 마시니 서로 잘 섞인다.”
▶이상배 디지털미디어부 기자
“탄산이 없어 부드러움에 부드러움을 더한다. 와인향이 난다.”
▶이지민 디지털미디어부 에디터
“묵직하고 무거운 느낌인데, 달달해서 술술 잘 넘어간다.”
[전문가의 맛 코멘트]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초창기 동래아들이 정겨운 동네 토박이 같은 느낌이라면 지금의 동래아들은 좀 더 대중성 있게, 마시기 편하면서도 산뜻함이 더해졌다. 곡물의 질감도 적당히 느껴지면서 담백하며, 밀키한 느낌에 요구르트의 새콤함과 싱그러움이 더해져 맛있는 막걸리가 탄생한 느낌. 치즈 무스 케이크, 화이트 롤케이크, 생크림 케이크 등과 함께 맛보면 완벽한 디저트 페어링이 완성될 것 같다.”
-제품명 : 동래아들 막걸리
-양조장 : 기다림(부산 동래구)
-내용량 : 750mL
-알코올 : 6.0%
-원재료 : 정제수·쌀·누룩·젖산
2023-02-01 [07:00]
-
따로 또 같이, '산청 전통주' 맥 잇는 부자(父子) 양조장 [술도락 맛홀릭] <2>
산과 물의 고장 경남 산청(山淸)에 가면 할아버지에서 아버지·아들까지, 3대째 전통을 이어 가고 있는 양조장이 있다. 반백 년 역사의 양조장에서 아버지는 전통 방식을 고집하고, 아들은 바로 옆에 새 양조장을 차려 전통의 틀을 깨려 도전 중이다. 우리 술의 전통과 미래, 신구의 오묘한 조화를 꿈꾸고 있는 이웃한 부자(父子) 양조장을 찾았다.
■父, 전통이 익어 가는 ‘산청양조장’
산청읍내 최중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 산청소방서와 길 하나 사이를 두고 사이좋게 자리한 두 개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왼쪽 새 건물은 아버지 김대환(63) 씨가 운영하는 ‘산청양조장’, 오른쪽은 옛 산청양조장 공간에 청년창업가인 아들 김태건(32) 대표가 차린 ‘몬스터빌리지’ 양조장이다.
산청양조장은 공식 기록으로만 50년 넘는 역사를 지녔다. 김 대표의 할아버지가 1971년 인수를 했는데,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훨씬 오래된 셈이다.
지난해 가을 산청양조장은 아버지 김 씨의 오랜 바람인 ‘산청약주’를 정식 출시했다. 김 씨가 할머니 어깨너머로 본 옛 방식 그대로 빚어, 지인들하고만 나누던 술이었다. 2021년 지역특산주 약주 면허를 갖추고, 바로 옆 부지에 새 건물을 지어 확장 이전을 하면서 제품화의 길이 열렸다.
김 씨의 할머니 레시피에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약재로 유명한 산청의 상황버섯을 넣었다는 점이다. “술은 술다워야지 다른 향이 강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것저것 첨가해 본 결과 상황버섯의 향이 특출나지 않아 술맛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겠더라고요.”
MZ세대인 김 대표가 보기엔 산청약주는 아버지의 고집 그 자체다. “일반 막걸리를 빚는 공정도 힘든데, 약주는 몇십 배 더 힘들어요. 대량 생산을 위해 기계의 힘을 빌리는 막걸리와 달리 약주는 60~70년대처럼 직접 짜는 방식을 고집하세요. 그러다 보니 여과도 숙성도 너무 오래 걸려요.”
산청 메뚜기쌀과 청정 지하수로 빚은 산청약주는 주모(밑술)를 포함해 4차례 술을 빚는 ‘사양주’이다. 발효만 한 달 이상, 옛 방식대로 70L짜리 한 통 분량을 짜는 데만 일주일이 걸린다. 이후 100일 동안 저온 창고에서 숙성 과정을 거친다. 다 합치면 수개월이 걸리는 지난한 과정이다.
100일이 지났다고 해서 곧바로 술을 출시하는 건 아니다. 최종적으로 아버지 김 씨의 입맛을 통과해야 한다. 최근 전통주 콘텐츠·유통 플랫폼인 대동여주도와 함께 카카오메이커스에서 진행한 판촉 행사에도 아버지 입맛을 통과해 출고일을 맞추느라 애를 먹었다.
“당도와 산도를 체크했을 때 소수점 단위 차이밖에 안 나는데 아버지는 ‘조금 더 숙성시켜야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결국 막판에 온가족이 동원돼 턱걸이로 출고일을 겨우 맞출 수 있었어요.”
고생스러운 전통 방식을 따르는 대신 김 대표와 아버지는 1년에 세 번만 약주를 빚기로 합의를 봤다. 한 번에 1000병씩 생산하니, 연간 고작 3000병만 맛볼 수 있다.
깊은 정성, 오랜 시간이 담긴 술이어서 그런지 투명한 병에 담긴 산청약주의 영롱한 황금 빛깔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한 잔 따라 천천히 들이키자 상황버섯의 은은한 향미가 오랫동안 입안에 맴돈다. 고급진 약주인 만큼 제사상이나 명절 차례상에 제격이다.
■子, 새로움이 샘솟는 ‘몬스터빌리지’
학창 시절부터 산청양조장에서 아버지 일을 도운 김 대표는 지난해 큰 도전에 나섰다. 대학 후배 2명과 의기투합해 새 산청양조장 바로 옆, 비어 있던 옛 건물에 따로 양조장을 차린 것이다. 산청양조장의 명성에 기댈 수도 있지만 김 대표는 새로움을 택했다. 본인과 멤버들을 형상화한 캐릭터를 만들고, 양조장 이름도 전통주스럽지 않은 ‘몬스터빌리지’라고 지었다.
몬스터빌리지의 시작은 김 대표가 2019년 제주도에서 열린 ‘양조기술교실’에 참가한 게 계기였다. “진짜 색다른 술이 너무 많고, 온라인에서 술을 팔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어요. 신세계였죠. 산청지역에선 저희 술이 판매량이 높으니까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우물 안 개구리처럼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김 대표는 한국가양주연구소와 신라대 우리술 전문인력 양성과정 등을 찾아다니며 전통주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처럼 술을 잘 못 마시는 사람, 전통주 입문자를 위한 양조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술 잘 마시는 사람들을 위한 술은 계속 개발되고 잘 팔리는데, 왜 술이 약한 사람을 위한 술은 없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개발한 술이 ‘설레’예요.”
‘저 세상의 달달함을 보여 주겠다’는 각오로 만들었다는 ‘설레’는 라벨부터 핑크색으로 달달함을 물씬 풍긴다. 본인 캐릭터 ‘청산’이 발그레한 볼로 웃고 있는 디자인도 재밌다.
설레가 세상에 나온 지 1년쯤 지난 지난해 12월, 김 대표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소풍’을 출시했다. ‘설레가 너무 달다’는 평가를 반영해 단맛을 줄인 천연탄산 막걸리이다. 설레와 달리 아버지의 막걸리 레시피를 많이 가져와 누룩 대신 입국을 사용했고, 적당한 단맛·신맛·쓴맛을 고루 갖추기 위해 천연감미료도 넣었다. 소풍 전날 기분 좋은 떨림과 소풍 때 행복했던 순간이 떠오르는, 행복할 때 마시기 좋은 술이라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알코올 함량을 5.5%로 낮춰 한결 마시기 편한데, 숫자에서 어린이날이 연상된다.
산청양조장과 산청약주에 아들 김 대표의 손길이 더해졌듯, 몬스터빌리지에도 아버지의 노하우가 스며들고 있다. 같은 듯 다른 듯, 따로 또 같이, 부자의 두 양조장은 산청을 넘어 전국으로 이름을 알려 나가고 있다.
지난해 두 양조장은 경사가 겹쳤다. 산청양조장은 산청군 1호로 중소벤처기업부의 ‘백년소공인’에, 몬스터빌리지는 ‘로컬크리에이터’에 선정됐다. 올해는 몇 년 전부터 준비해 온 신제품을 출시할 계획이다. 산청양조장은 약주에 소주를 섞어 빚는 ‘과하주’를, 몬스터빌리지는 다양한 도수(19~50도)의 증류식 소주를 선보일 예정이다.
아들의 도전이 걱정이던 아버지도 이제는 응원하는 마음이 더 크다. “술이 발효돼 잘 익는 데 시간이 필요하듯, 지금의 시간들이 몇 년 뒤엔 아들에게 빛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산청의 나물, 전통한정식 맛보려면
깊은 맛을 지닌 산청약주는 전을 비롯해 한국의 전통음식, 달콤한 막걸리 설렘과 소풍은 매운 음식과 잘 어울린다.
산청양조장에서 자동차로 3분, 산청약초시장 인근 춘산식당에 가면 이들 술과 궁합이 맞는 전통한정식을 맛볼 수 있다. 춘산(특)정식의 메인은 산청흑돼지로 요리한 석쇠고추장구이. 3가지 맛이 난다는 ‘삼채’가 결들여져 매콤한 불향 속에 건강한 맛이 느껴진다.
죽순 무침을 비롯해 다양한 나물들 역시 산청에서 자란 것들이다. 가지·깻잎과 함께 나오는 파래 튀김은 모양도 맛도 이색적이다. 산청 메뚜기쌀과 향미찹쌀로 지은 솥밥은 윤기가 흐르고, 장식처럼 섞인 색깔 쌀이 보는 재미도 더한다. 된장찌개에는 논고동과 함께 방아가 들어가 소화를 돕는다.
아쉽게도 일반 식당에선 산청약주나 설렘·소풍을 판매하지 않는다. 대신 산청양조장의 오랜 술인 산청생막걸리와 산청팔도주는 춘산식당을 비롯해 산청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2023-01-18 [07:00]
-
통영 ‘건축가가 빚은 막걸리’ [술도락 맛홀릭] <1>
가가호호 술을 빚던 시절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던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100년 만에 다시 부활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급된 지역특산주 면허만 1400건에 이르고, 해마다 새로운 양조장과 전통주가 탄생한다.
전통주엔 지역의 특색이 오롯이 담겼다.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 술을 빚어, 특산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부산일보>는 ‘술도락맛홀릭’ 기획시리즈를 통해 부울경의 전통주 양조장을 탐방하며 지역의 맛과 가치를 재조명한다.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등 전통주 전문가도 힘을 보탠다. 이 대표는 “지역의 제철 식재료와 술의 조합이 주는 만족감은 경험해 본 사람만 알 수 있다”며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부산·경남권 양조장을 조명하는 시도는 지역의 가치를 재발견한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설계부터 준공까지, 건물을 짓는 마음으로 빚은 전통주가 있다. 재료는 쌀과 물, 누룩이 전부다. 비움의 건축 철학을 온전히 담아낸 술. 그 고집스러운 맛을 찾아 경남 통영으로 향했다.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건막’
경남 통영시 산양읍, 미륵산자락의 마을. 막다른 샛길의 끝에 햇살을 잔뜩 머금은 붉은 기와의 전원주택이 나타난다. 박준우·김은하 부부가 양조장과 식당을 운영하며 어린 딸과 함께 생활하는 보금자리이다.
박준우 대표(거북이와 두루미 양조장)가 섬마을에서 쏟아지는 햇살과 바닷바람을 담아 만들었다는 막걸리는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건축가가 빚은 막걸리’(건막). 글자 그대로 건축가인 박 대표가 ‘혼자’ ‘손으로’ 빚은 술이다.
2021년 가을 세상에 나온 이 막걸리의 탄생 배경도 남다르다. 사드 사태를 겪으며 박 대표의 중국 현지 건축 프로젝트에 지장이 생겼고, 물질적·정신적으로 힘든 시기에 전통주의 세계와 만났다. “한국가양주연구소에서 교육 과정을 마친 아내가 막걸리를 빚어 줘서 마셨는데, 다음 날 머리가 하나도 안 아픈 거예요. 또 빚어 달라고 했는데 안 주길래 직접 만들기로 했죠.”
마침 집에 은행대출 사은품으로 받은 찹쌀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인터넷에 나온 레시피대로 술빚기에 도전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이후 7년간 찹쌀과 멥쌀, 물의 비율을 달리하며 독학으로 술빚기에 도전하길 130여 차례. 박 대표는 매번 그 공식을 엑셀파일로 정리했고, 마침내 32번째 레시피에서 최적의 비율을 찾아냈다.
사계절 비슷한 맛을 낼 수 있는 온도·습도를 조합한 ‘저온숙성법’, 12일간 발효조에서 1차 발효를 한 뒤 냉장고에서 열흘 동안 2차 숙성시키는 ‘혐기성 발효’ 등도 수차례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한 비법이다.
박준우 건축가의 비움 철학 온전히 담은 술
7년간 130여 차례 도전, 최적 비율 찾아내
첨가제 없이 쌀·물·누룩만 사용 손수 빚어
■빛깔은 막걸리, 맛은 스파클링 와인
‘건축가가 빚은 막걸리’의 가장 큰 특징은 발효 과정에서 스스로 만들어진 ‘천연탄산’이다. 병뚜껑을 살짝 열면 미세한 입자의 탄산이 바닥부터 올라오며 침전물과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빛깔만 막걸리일 뿐, 눈을 감고 마시니 스파클링 와인 같은 풍미가 느껴진다.
해산물과 ‘마리아주’(궁합)를 이루는 화이트 와인처럼, 건막도 해산물과 제격이다. 특히 박 대표의 아내 김은하 대표가 운영하는 식당 ‘야소주반’의 모든 메뉴는 건막을 위한 요리라 할 만하다. 식당은 당일 새벽 싱싱한 재료를 사서 당일 소진하기 때문에 예약제로 운영된다.
취재진이 방문한 날에도 김 대표는 당일 새벽시장에서 공수해 온 ‘개체굴’을 내놓았다. 핑거라임을 얹어 한입에 넣자 우리나라 굴의 진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연이어 유리잔에 따른 건막을 한 모금 마시니, 마법처럼 굴향이 배가된다. 천연탄산이 터지면서 향을 한층 돋우는 것이다. 유리잔은 탄산감을 살려 줘 날음식, 도자기잔은 탄산을 잡아 줘 익힌 음식에 적합하다고 한다.
“와인동호회에서 자주 찾아와 즐기다 가시곤 해요. 와인을 싸 들고 온 사람들이 저희 술만 먹다가 돌아가기도 하죠.” 김 대표의 설명에 왜 건막을 ‘내추럴 와인’이라고 소개하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술 애호가들의 입소문에다 겨울철이 되면서 건막의 몸값은 더욱 높아졌다. 공급이 부족해 최근엔 식당에서 팔아야 할 술이 동나버렸다.
주문은 밀려들지만 ‘건축가가 빚은 막걸리’는 한 번에 80병밖에 생산하지 않는다. 박 대표가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혼자서 손으로 직접 빚기 때문이다. 생산량을 조금씩 늘렸지만, 한 달 최적의 목표를 618병으로 잡았다. 박 대표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이면서, 건축설계 때 적용하는 황금비율(1 대 1.618)이기도 하다. “대량생산을 하려면 공정을 자동화해야 하고, 그러면 사람 손을 떠나게 돼요. 이 술에는 제 손에서 시작하는 정성, 저만의 가치가 담겨 있어요.”
■한 병 한 병에 담긴 느림·비움의 철학
박 대표는 양조장이 둥지를 튼 야솟골의 자연을 최대한 활용해 ‘느리게’ 술을 빚는다. 전날 오후 8시에 두 시간 동안 쌀을 씻은 뒤 불리고, 다음날 새벽 5시부터 마당에 누룩을 널어 해풍을 맞힌다. 고두밥을 쪄서 자연 바람에 잘 말린 뒤, 오후가 돼서야 물에 재운 누룩과 고두밥을 골고루 섞는 치대기 작업에 비로소 돌입한다. 물은 제조용과 청소용을 철저히 구분해 술 제조에는 청정 지하수만 사용한다. 인근 고성군의 유기농 쌀 등 모든 재료는 유기농만 고집한다.
늦둥이 딸도 힘을 보탠다. “유치원에 가기 전에 아이에게 고두밥을 먹여 봐요. ‘아빠 더 주세요!’라고 하면 이번 술은 성공이죠. 아이들은 절대 미각을 지녔거든요.”
건막 양조의 전 과정엔 박 대표가 건축가로서 강조해 온 ‘공(空)의 개념’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쌀과 물, 누룩을 제외한 어떤 첨가제나 탄산도 인공적으로 넣지 않는다.
투명한 병과 라벨도 인상적이다. 막걸리의 빛깔과 천연탄산 알갱이를 온전히 볼 수 있다. 화려한 디자인의 여느 전통주와 달리 겉멋을 빼고 속을 그대로 드러내보인다는 점에서 이 또한 ‘공(空)’이다.
술맛을 향한 집념으로 박 대표는 올해부터 변화를 꾀하고 있다. “서울의 한 보틀숍에서 저희 술을 맛봤는데 전혀 다른 맛이어서 충격을 받았어요. 영상 3도에서 보관할 때 제일 안정적인데 배송 과정에서 술이 변해버린 거죠.”
이에 온전한 맛을 유지하기 위해 천연탄산 막걸리는 ‘야소주반’에서만 판매하고, 외부에는 탄산 없는 막걸리만 공급할 계획이다. 두 번 빚은(이양주) ‘약주’도 선보일 예정이다. 조만간 지역특산주 면허를 갖추면, 그동안 전국 20여 개 오프라인 매장에서만 만날 수 있던 건막을 온라인에서도 간편하게 구매할 수 있게 된다.
천연탄산 터지며 스파클링 와인 같은 풍미
부인 김은하 씨 운영 ‘야소주반’ 음식과 궁합
한 달 618병 생산…통영 굴 등 해산물에 제격
■싱싱한 해산물과 ‘통영 굴’ 맛보려면
겨울은 건막의 계절이라 할 만하다. 건막에 어울리는 대표음식인 굴이 제철이기 때문이다. 통영은 우리나라 대표 굴 산지이지만 굴 요리 전문점이 많은 편은 아니다.
그중 중앙전통시장 인근 ‘한마음식당’은 다양한 굴 요리를 맛볼 수 있어 여러 방송에서도 소개됐다. 특히 굴·대패삼겹·김치를 불판에 구워 쌈 싸 먹는 ‘굴삼합’이 대표 메뉴다. 메뉴를 개발한 장수형 대표는 “삼겹살 기름이 굴에 스며들어 부드러우면서도 고소한 맛을 더한다”며 “김치가 기름기를 잡아 주면서 삼합이 조화를 이룬다”고 설명했다.
굴탕수육은 세 단계에 걸쳐 튀김가루, 계란물, 빵가루를 입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식감을 자랑한다. 수제 소스를 결들이면 어린이도 좋아할 만한 맛이다. 옛 통영 어머님들의 레시피를 따라 살짝 데친 굴로 부친 굴전은 물기가 적어 비린맛이 없다. 이밖에도 굴무침, 굴찜, 생굴 등 굴 요리 종합세트를 맛볼 수 있다.
현지인들은 통영의 싱싱한 해산물을 맛보려는 이들에게 서호시장과 통영중앙전통시장을 추천한다. 서호시장은 새벽시간대 경매부터 시작하는데, 노점상은 오전 10시쯤 파하고 이후 중앙전통시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중앙전통시장은 서호시장보다 좀 더 늦게, 저녁시간대까지 문을 연다.
2023-01-04 [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