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25時 朴寬用의원 訪蘇 비망록] <8>초대 駐蘇대사 李相朝와 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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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떠나며 불행한 民族史 거듭 느껴

내가 모스크바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들은 기실 내가 모스크바에서 만나라라고 기대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북한의 허담위원장과 전금철 부위원장이 그랬다.

그러나 정작 내가 꼭 만나보리라고 작정했던 사람은 만나보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그는 다름 아닌 前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였던 李相朝씨였다.

나는 소련에 가기전에 그를 만나보기 위해서 그에 관한 자료를 모으는등 나름마로 준비를 했었다.

그래서 모스크바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확인하여 그가 살고있는 민스크市로 여러차례 연락을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집에 없었다. 내가 모스크바에 도착하기 바로 전날에 우리 한인들이 많이 사는 타슈켄트로 떠나 버려 나와 길이 엇갈려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내가 모스크바를 떠나기 바로 전날에야 민스크市로 돌아왔다.

백러시아공화국의 수도이며 소련내 제3의 도시인 민스크는 모스크바에서 기차로 20시간이나 걸리는 곳에 있었다.

나는 결국 그와 전화통화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李씨는 귀가 매우 어두워 있었다. 나는 고함을지르듯 그와 통화를 했다.

『이상조선생님, 저는 李선생의 고향인 동래출신 국회의원인 박관용이라는 사람입니다. 이거 전화로만 인사드며 죄송하고 한편으론, 안타깝습니다. 제가 李선생님을 고향동래로 초정하려고 합니다. 응락하시겠습니까?』

이상조씨는 귀가 어두워서인지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채 『뭐 동래라구요?, 나를 초청한다구요?』하는 말만 되풀이했다.

마침 옆에 있는 소련내 고려한인회 부회장인 허진씨가 전화를 건네받아 소련말을 섞어가며 내 의사를 반복해서 전달해 주었다.

『서울에서 오신 박관용 의원이라는 분이 李선생님을 고향 동래로 초청한답니다.

그리고 그동안 李선생님이 써오신 한글 詩랑 자료들도 서울에서 출판할 수 있도록 해드리겠대요.』

이상조씨는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내 고향에 가고 싶습니다. 동래에는 아직도 내 계모가 살아 있습니다. 소련당국이 출국허가를 내주면 가겠습니다. 정말 가고 싶습니다.』

이상조씨는 초대 駐蘇북한대사를 지냈고, 북한인민군의 창설주역이며 휴전 회담의 북한측 대표를 역임한바 있는 북한현대사의 산 증인이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副총참모장겸 정찰국장으로 있으면서 중국과 소련으로 부터 전쟁불자와 군대를 동원해온 주역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金日成에 반대하여 反김일성 쿠데타를 꾀하는데 앞장서 소련에 망명한 反김일성주의자이다.

그는 동래 壽院洞(지금의 안락동)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동래에서 보냈으며, 장성하여서는 만주에서 항일무장독립투쟁을 한 후 북한으로 들어가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후 말년에는 소련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기이한 운명의 풍운아이다.

그는 사회주의자이지만 김일성주의를 철저하게 배격하는 反김일성주의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조선에서 이상적인 사회주의국가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질 못했다. 김일성이가 없어져야 진정한 남북평화가 올수 있다. 그리고 남한의 군사정권도 물러가야 한다. 나는 아직도 이상적인 사회주의국가가 조선반도에 세워지길 꿈꾸고 있다.』

그러나 그를 위험한 인물로만 보는 것은 곤란하다. 그는 한마디로 이상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소련대사로 재직중에 김일성으로부터 소환당하자 곧 소련에 망명해서 소련과학원 민스크지부 국책연구소에서 연구활동에 전념하여 만년에 박사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또 그는 우리의 가슴아픈 현대사를 생생하게 증언해주고 북한정권수립 과정에서의 秘史를 들려줄 몇 안되는 생존 인물중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계모와 이복동생들은 아직도 동래에 살고 있다. 또 그의 사촌동생이 되는 이상교씨는 나와 동래고등학교동기생이기도 하다.

그는 죽기전에 고향을 꼭 찾아보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그에게 고향 동래를 방문할수 있도록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기울이겠다고 다짐 했다. 나는 그의 주소를 다시 확인하고 서울로 돌아가 곧 초청장을 띄우기로 했다.

이념 때문에 조국을 등지고 민족을 떠나야만 했던 우리민족사의 불행한 人物 李相朝. 그는 소련내의 한인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흘러간 시대의 그 영화도 지금의 존경도 그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지금 이 순간 오직 그가 소망하는 바는 그가 태어나서 자랐던 고향땅 동래를 찾아 그 땅을 다시 밟는 일 뿐이다.

10일간의 모스크바방문을 마치고 모스크바 공항을 떠나는 비행기를 타면서 나는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가 李相朝라는 한인물에 투영되어 나의 뇌리를 짓눌러옴을 느꼈다.

아아··· 슬픈 우리의 민족사여, 나는 李相朝씨를 반드시 조국으로 오게 함으로써, 그 슬픈 민족사의 한 언저리를 쓰다듬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느새 비행기는 뉴욕에 도착하였다.

뉴욕. 그 번화함, 자동차들의 요란한 경적소리, 바쁜 사람들의 발걸음. 뭔가 생기있는 듯한 뉴욕의 모습을 보는 나는 별천지에 온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돈되고 규격화 되어 있던 모스크바에 어느새 익숙해버린 나에게 비친 뉴욕은 혼돈과 무질서,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방종의 도시처럼 보였다. 열흘간의 소련여행이 던져준 충격은 뉴욕의 분주함을 광란(?)처럼 느끼게 할 만큼 큰 것이었나 보다.

―끝

朴寬用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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