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10> 두 번째 수도 - 중경현덕부
농업 생산의 기반, 비옥한 땅을 찾아서
중국과 러시아의 발해 유적이 있는 곳의 근대적 특징은 대개가 조선족이나 고려인들이 여전히 살고 있다는 것이다. 연변조선족 자치주는 간도지방으로서 독립운동의 본거지였으며 고구려·발해사와 함께한 유적지로서 한국의 탐방객들이 매년 수없이 다녀가는 곳이기도 하다.
연변에서 버스로 남서쪽으로 30분 정도를 달리면 해란강이 눈에 들어오고 용정시(龍井市)를 지난다. 발해 유적 답사자들은 먼저 화룡에 가서 발해 서고성(西古城)과 정효공주묘 등을 들렀다가 오후에 연길로 돌아가면서 들르곤 하는 곳이 용정이다. 이곳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간도로 간 많은 대한제국의 교포들이 독립운동을 하던 곳이다. 민족시인 윤동주 시비가 있는 이곳의 대성중학교(현 용정제일중학교)는 독립과 교육의 본산이었다. 문익환 목사도 이 학교를 나왔다고 한다.
가곡 '선구자'의 무대였던 용정의 '일송정(一松亭)'도 빠지지 않는 코스다. 지금은 주변에 그 지역의 큰 체육경기장이 들어서 있어 현대적 분위기가 물씬 나지만 한 20분 정도 걸어서 올라가면 그래도 꽤 숨이 차는 곳이기도 하다.
작년에 갔을 때는 일송정에 한국인들이 정성스레 세워두었던 기념시비가 아래로 내팽개쳐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른바 중국식 정화작업 과정에서 높은 분의 지시로 한국인들이 제작한 것이 밀려 내려왔던 것이다. 한글로 새긴 비였지만 이곳은 엄연한 중국이었다.
발해의 지방 편제는 5경(京),15부(府),62주(州)로 이루어졌다. 그 중 5경의 한 곳이 중경(中京)과 그 통치지역인 현덕부(顯德府)로 이른바 중경현덕부이다. 바로 화룡현(和龍縣) 서성진(西城鎭) 두도평원(頭道平原) 서북고성촌(西北古城村)의 서고성이다. 이곳은 발해의 두 번째 수도로 구국(舊國) 즉 지금의 둔화 지역에서 제3대 문왕 대흥 5년(742)에 옮겨와 대흥 19년(755)에 상경(上京)으로 옮길 때까지 14년간 수도였던 곳이다.
원래 중경이 어디인가 하는 논쟁은 이곳 서고성설과 길림성 둔화(敦化)설과 화전(樺甸)설 등이 팽팽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80년 10월 이곳에서 가까운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묘가 발견되고부터 이곳을 중경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이곳 중경현덕부의 치소(治所)는 노주(盧州),현주(顯州),철주(鐵州),탕주(湯州),영주(榮州),흥주(興州) 등 6개였다.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와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가 각각 3개 주,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와 서경압록부(西京鴨府)가 각각 4개 주를 거느리고 있었던 것에 비해 가장 많은 주를 거느렸던 도성이었다.
서고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는데 외성은 직사각형으로 동서의 길이가 630m,남북의 길이가 730m이고 둘레가 2천730m이다. 성벽은 흙을 다져 쌓았는데 다짐층의 두께는 10㎝이다. 성벽 밑면의 너비는 13~17m,윗면의 너비는 1.5~4m이며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1.8~2.5m이다. 15m 정도의 남문과 북문이 터져있으며 성안의 동남쪽에는 1천500㎡ 되는 못자리가 있으며 성벽에는 물이 고인 해자(垓字)가 있었다.
해자는 대부분 메워지고 오직 남쪽 성벽의 동쪽 끝과 동쪽 성벽의 남쪽 끝에만 남아 있는데 그마저 물도랑이 되었다.
내성은 외성 중부에서 북쪽에 치우친 곳에 위치해 있는데 장방형이며 남북의 길이가 310m,동서 너비 190m이다. 내성의 동쪽 성벽은 외성의 북쪽 성벽에서 약 70m 떨어져 있다. 내성 안에는 북남향으로 자리잡은 3개의 궁전자리가 있다. 이러한 성의 평면구조는 흑룡강성 녕안시(寧安市) 발해진(渤海鎭)의 상경(上京)이나 길림성 훈춘시(琿春市) 팔련성(八連城)의 동경(東京) 구조와 거의 같다.
▲ 발해의 두 번째 수도 중경 서고성 복원도(중국 길림성 화룡현). |
▲ 중경터에서 쏟아져 나온 발해 기와무지. 최근 중국이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전면 재발굴한 서고성터 중경 유적에서 쏟아져 나온 발해의 전형적인 손끝무늬기와 등을 수십 겹으로 쌓아 놓았다. 붉은 색의 고구려기와도 선명하다(박민성씨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