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일의 역사] 감자 대기근(1845.9.9) 外
1845년 9월 9일 아일랜드 신문들이 감자 역병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보도했을 때만 해도 앞으로 닥칠 재앙을 예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전에도 감자 흉작이 여러 번 발생했지만 일부 지역에 국한된 일이었고, 단기간에 끝났었다. 하지만 감자마름병이라 불린 이 역병은 달랐다. 병원균인 진균은 바람을 타고 일주일에 80㎞의 무서운 속도로 전국에 퍼져나갔다.
무성했던 감자밭은 악취가 진동하는 시커먼 시궁창처럼 변했다. 구덩이에 저장해두었던 감자마저 이내 썩어 문드러졌다. 1846년에는 전체 감자의 90%가 파괴될 정도로 초토화되었다. 주식인 감자를 잃은 주민들은 굶주림에 내몰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양결핍으로 죽거나 발진티푸스, 재귀열 같은 열병과 콜레라에 희생되었다.
소작료를 내지 못해 농지에서 쫓겨난 농민들도 부지기수였다. 1847년 한 해만 50만 명이 쫓겨났다. 거리로 나앉은 농민과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아메리카행 배에 몸을 실었다. 이민자들의 행렬은 2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대기근이 끝날 무렵인 1851년까지 굶어죽은 사람만 110만명, 고국을 떠난 사람은 100만명이 넘었다. 800만 명이 넘었던 인구는 대기근을 거치고 600만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짧은 기간 동안 이처럼 피해가 컸던 것은 식량을 단일 작물에 지나치게 의존한 이유도 있었지만 영국 정부의 소홀한 구제정책에도 원인이 있었다. 영국 정부는 식민지 아일랜드인들이 게으르고 자립심이 없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원조를 외면하다시피 했다. 대기근 동안 지원한 구제사업비는 고작 810만 파운드. 몇 년 뒤 크림전쟁에서 지출한 전비의 20%도 안 되는 액수였다. 이런 처사에 아일랜드인은 분노했고 지금까지도 영국인을 증오하고 있다. 정광용 기자 kyjeong@
△이집트 첫 대통령선거(2005.9.7)
△인도, 영국 식민지로 편입(1858.9.8)
△영국-소련 통상협정 조인(1946.9.10)
△경주 안압지·임해전 복원 완료(1980.9.11)
△미군, 북베트남 폭격 재개(1969.9.12)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 취임(1943.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