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같았던 사람, 내 마음속 영원한 '태석이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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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김효정 기자가 추억하는 고 이태석 신부

아프리카 수단 톤즈 마을에서 의료 봉사를 하는 생전의 이태석 신부 모습. 수단장학회 제공

"태석이가 많이 아프단다. 한국 와 있다네." "태석이샘 어디가 아픈데? 많이 아프대? 한 번 만나면 좋겠다. 반가워할 것 같은데…."

1년 6개월 전이었나. 기자가 어머니와 나누었던 대화이다. 날 잡아서 보러 가자던 그 사람,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니다. 내가 너무 늦게 갔다. 그런데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 방송으로, 극장에서, 책으로, 인터넷에서 모습을 더 자주 볼 수 있었다.


노래 잘하고 마음 넓었던 성당 주일학교 선생님
의사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선교 떠나 놀라기도
내일 1주기, 고향 부산은 추모행사 없어 아쉬워



그는 지난해 1월 14일 세상을 떠난 이태석 신부이다. 의대생에서 신부가 된 후 아프리카 오지, 수단으로 가 8년간 의술을 펼치고 학교를 지어 수단 아이들에게 배움을 전했다. '수단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가장 낮은 곳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했고, 죽음 후 그의 뜻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그가 이끌었던 수단 장학회는 현재 1만 2천여 명의 회원들이 사랑을 보태고 있다. 장학회에선 수단으로 의사와 간호사, 봉사자들을 파견해 이태석 신부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다. 그의 삶을 보여준 영화 '울지마! 톤즈'는 다큐 영화로는 드물게 2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많은 이에게 나눔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KBS가 우리 사회에 귀감이 되는 사람에게 주는 'KBS 감동대상'의 주인공으로도 선정했다. 이태석 신부의 존재는 시간이 갈수록 더 커지는 느낌이다.

14일은 이태석 신부가 세상을 떠난 지 1주기가 되는 날이다. 사실 기자에겐 '이태석 신부님'보다 '태석이샘'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이태석 신부는 초등학교 시절 기자가 다녔던 성당의 주일학교 선생님이셨다. 바닷가 동네, 송도 성당에서 그는 꼬맹이 여학생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그가 기타를 멋지게 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성가를 가르쳐 주었고, 차분하게 성경 이야기를 전해주는 주일학교 수업시간이 은근히 기다려졌다. 짓궂은 꼬맹이들의 장난에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는 마음 넓은 선생님이셨다. 대학 가는 사람이 몇 명 없는 동네에서 노래 잘하고 성격 좋은 의대생이었다. 6학년들이 졸업할 때 어려운 형편에도 사비를 털어 일일이 묵주를 선물했던 기억도 난다.

시간이 지나고 의사가 아니라 신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왜? 의사가 안 되고 신부님이 되셨대요?"라고 반문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또 지나 이번엔 아프리카로 선교를 떠났다는 말을 듣고 다시 "왜 아프리카래요?"라고 질문을 쏟아냈다. '태석이샘'의 선택은 언제나 보통 사람인 기자에게 '왜'라는 의문투성이였다.

재능 많던 '태석이샘'은 수단의 귀한 의사였고 학교를 지은 건축가였고 수단 아이들의 선생님이었다. 톤즈 마을 사람들에겐 자신들의 삶을 살뜰히 돌봐주는 든든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주일학교 시절 기자가 그랬듯 분명히 수단 톤즈 마을의 인기 만점 선생님이었을 것 같다.

지난 8일 경기도 과천에선 그를 추모하는 음악회가 열렸고, 악보가 없는 그의 자작곡들을 기억해 내 추모 음반도 제작됐다. 13일 서울에선 추모 미사가, 14일 전남 담양에선 추모 행사가 열린다. 몸은 갔어도 '태석이샘'이 남긴 진주 같은 사랑은 남아 있는 사람들이 예쁜 목걸이로 꿰어내고 있었다.

아쉽게도 그가 태어나고 자란 부산에선 그를 기억하는 행사가 없다. 오늘 저녁, 혼자라도 '울지마! 톤즈'를 다시 보며 '태석이샘'을 만나봐야겠다. "태워도~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처럼 영롱한 사랑을 피우리라~". 영화를 통해 '태석이샘'의 그리운 목소리도 들을 수 있겠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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