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추적] 중증 알코올 중독자가 버젓이 학생 가르쳐
못 믿을 원어민 강사 채용 시스템
지난 19일 오후 6시께 부산 수영구 민락동 한 아파트에서 원어민 강사 B(32) 씨가 하의를 벗고 추락해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아파트 경비원의 진술 등을 통해 술에 취한 B 씨가 이 아파트 14층 복도에서 하의를 벗어던진 뒤 스스로 몸을 던진 것으로 보고 있다. 아파트 CCTV에서도 사고 직전 B 씨가 소주병을 든 채 혼자 엘리베이터에 타는 화면을 확보했다.
이에 앞서 B 씨는 지난 14일 김해공항에서 표도 없이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소란을 피운 바 있다. 당시에도 B 씨는 술에 취한 상태였다.
만취 미국인 강사 아파트서 투신
학원도 무단결근, 중독 완치 안돼
채용시 자질 검증 부족, 대책 시급
#원어민 강사 투신 왜?
미국인 B 씨는 부산에서 원어민 강사로 활동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비자를 받고 입국한 상태. 투신한 아파트에는 지인이 거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5일 학원에서 월급을 수령한 뒤 무단으로 결근하는 등 문제를 일으킨 B 씨는 종전에 살던 원룸에서 나와 서면의 한 모텔에서 지내던 중이었다. 경찰은 B 씨가 사고 당일 인근 광안리 일대에서 술을 마시다 이 같은 일을 벌인 것으로 추정하고 정확한 사인을 조사 중이다.
어학원 측은 B 씨가 이미 경기도에서 2년 가까이 원어민 강사 생활을 한 경력이 있는데다 범죄이력조회도 깨끗했다고 말한다.
보건소를 통해 채용건강검진도 마친 상태라는 것. 어학원 측은 "덩치도 크고 평소 활발한 성격의 B 씨가 이 같은 일을 벌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원어민 강사 커뮤니티의 지인들을 통해 알려진 B 씨는 달랐다. 미국 뉴욕에 거주하며 수년간 심각한 알코올 중독 증세로 치료를 받아오던 몸이었고, 입국할 당시에도 완치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공공기관에서 난동을 부리고 투신까지 하게 된 중증 알코올 중독자가 한국에서는 버젓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로 활동한 셈이다.
#원어민 강사 채용 허점투성이
원어민 강사 수요가 증가하고 북미 지역의 경제난으로 한국행을 선호하는 외국인 숫자는 늘고 있지만 이들을 원어민 강사로 채용하는 과정에 허점은 여전하다.
잦은 사고 이후 2008년 범죄이력조회가 의무적으로 이루어지는 등 심사는 강화되는 추세지만 알코올이나 약물 중독 여부 확인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다. 일부 원어민 강사가 잦은 무단결근, 일방적인 계약 해지 등으로 교육현장에서 파행을 초래케 하는 일도 이 때문이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부산지부 김정숙 정책실장은 "그동안 교육 현장에서 원어민 강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만 높았지 진짜 교사를 만들겠다는 노력은 부족했다"며 "강사 수급 측면에서 문제가 불거지더라도 등록을 마쳤다고 곧바로 채용할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관리하며 검증을 거치는 시스템 확립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학원가에서는 전화나 화상 인터뷰를 거친다고 해명하지만 극히 제한된 시간에 간접적으로 이루어지는 면접으로 이들의 잠재적인 사고 위험성을 완전히 배제시킬 수는 없다는 게 관계자들의 진술이다. 한 학원 관계자는 "학원장들마다 모이면 '원어민 강사 채용은 복불복'이라는 하소연을 한다"며 "학력과 이력을 검증하는 서류가 12가지가 넘어도 믿을 수가 없어 학원마다 교포를 채용하거나 중개소를 거치지 않고 직접 채용을 하는 등 고육책을 내보지만 확실한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건당국 역시 "보건소를 통해 이루어지는 채용건강검진은 에이즈와 결핵, 간염 등 전염성 질병의 검진에 국한되어 있어 알코올이나 약물 중독까지 파악해 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한편 이번 사건으로 부산시 원어민 강사 커뮤니티도 뒤숭숭한 분위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성실하게 학원가에서 일하는 강사들까지 도매금으로 마녀사냥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한국영어강사협회(ATEK)는 협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21일 성명까지 발표하며 분위기 추스르기에 나서고 있다. 영어강사협회 측은 "이번 사태가 누구의 잘못이든 간에 유감을 금할 수 없다"며 "한국 사회 적응이나 계약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외국인이 있다면 언제든 도움을 주고 싶다"고 전했다.
권상국 기자 ksk@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