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동지회 정광민 씨 "역사적 평가 반드시 이뤄져야"
1979년 10월 16일 오전 10시 부산대 상대 강의실. "여러분 우리 이제 투쟁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 나가서 투쟁합시다."
사복경찰이 학내에 쫙 깔린 삼엄한 분위기 속에 한 청년의 피맺힌 절규가 캠퍼스 전체를 한순간에 뒤흔들어 놓았다. 어리둥절해하던 학생들은 청년의 선동에 호응해 강의실을 뛰쳐나와 도서관 앞으로, 교문 앞으로 몰려 들었고, '독재 타도, 유신 철폐'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을 때 시위대 규모는 삽시간에 7천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18년 유신 강권체제를 무너뜨린 부마항쟁의 막이 오른 역사적 순간이었다.
항쟁의 최초 불씨를 댕긴 31년 전의 열혈청년이 정광민(54·당시 경제학과 2학년)씨다. 항쟁을 주도하다 경찰에 연행된 정씨는 4시간 동안 물고문을 받고 실신해 병원 응급실로 옮겨진 뒤 한참이 지나서야 의식을 회복했다.
정씨는 "부마항쟁에 대한 진압과 수사는 박정희 유신정권 최후의 용공조작 사건이자, 최대의 인권 유린 사건이었다"며 "계엄당국은 주동자급 학생과 재야인사를 북한과 연계된 것으로 조작하려고 혹독한 고문을 자행했고, 나도 부친이 북한 피난민 출신이라는 것을 이유로 고정간첩으로 몰렸다"고 말했다.
30여년의 세월 동안 정권이 6번이나 바뀌었지만, 부마항쟁은 그와 동지들에게 여전히 매듭지어지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다.
정씨는 "저와 절친했던 이용수 씨도 당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며 "하지만 현행 민주화운동보상법은 고문 피해를 입증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이들에 대한 피해 보상을 외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수감후 출소하는 정 씨.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김탁돈)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