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푼 부산 설화] 26. 아이덴티티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사채놀이로 인간사냥을 해온 그는 사람인가 괴물인가

그림=서양화가 박경효

# 범바위굴 전설 /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 미동마을 

웅천리에 한 효자가 살았는데, 아버지의 병을 고치고자 온갖 약을 구해 썼으나 효험이 없어 범바위 굴에 가서 100일 기도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신이 나타나 개 천 마리를 먹으면 아버지의 병이 낫는다고 일러주면서 개를 잡아 물어올 수 있게 범가죽과, 범가죽을 입고 벗을 때 쓰는 자물쇠를 주고 사라졌다. 

효자는 그때부터 범가죽을 써 범으로 변신하여 개를 잡아 물고 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려고 애를 썼다. 

아버지가 900여 마리의 개를 먹자 병이 나았는데도, 효자가 산신의 말대로 천 마리를 채우기 위해 계속 범으로 변신하여 개를 물고 왔다. 

이를 지켜보던 아내가 그만 자물쇠를 없애버려 결국 그는 사람으로 변신하지 못하고 범이 되어 범바위 굴에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는 전설이다. 자료제공=김승찬 부산대 명예교수




정신을 차려 돌아오기까지 몇 초의 시간이 걸렸다.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무거웠다. 정말 육신이 찢겨나간 것처럼 동통이 느껴졌다. 나는 일어나 얼굴을 만져보고 가슴팍을 쓸어보았다. 틀림없는 내 몸이었다. 나는 가만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손에는 촉촉하게 땀이 배어 있었다. 요즘은 자주 악몽을 꾼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간다. 밤새 잘 주무셨어요. 소파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인사하는 나를 외면하더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버지의 차가운 반응이 못내 섭섭하다. 집안의 공기가 냉랭하게 가라앉아 있다. 아내는 장례식장에 가 있을 것이다. 이틀 전 상운의 사고가 있었다. 못난 놈. 나는 혀를 찼다. 내 탓은 아니라고 변명해보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꺼림칙한 건 사실이었다.

언제부턴가 아내는 나를 연민의 눈길로 보더니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져 한숨을 쉬거나 조소를 보냈다. 나를 내려다보는 듯한, 불쌍히 여기는 듯한 그녀의 태도가 싫어 나는 더욱더 아내에게 못되게 굴었다. 심지어 아내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 적도 있었다. 이만큼 살게 해놓았더니 이제 배가 부르다 이건가. 식탁을 한번 내려치거나 의자를 집어던지면 아버지도 아들도 끽소리 못했다. 그리고는 돈을 던져주면 될 일 아니던가. 그들의 다물었던 입이 활짝 벌어지고 내 앞에 머리를 조아릴 테니까. 이렇게 한 번씩 길을 들여 나의 권위를, 힘을 보여줘야 했다. 당근과 채찍. 가정의 평화와 질서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밤새 턱 주위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아나 있었다. 한 이틀만 면도하지 않아도 제법 털이 거칠게 올라왔다. 오늘은 꼭 들러요. 아내는 일부러 아침 일찍 전화를 걸어 내게 말했다. 나는 욕실 수납장에서 면도기를 꺼낸다. 수동식 도루코 면도기. 면도기 머리의 날개를 벌려 무뎌진 날을 버리고 새 날로 갈아 끼운다. 반짝이는 푸른 날을 만질 때의 촉감이 더없이 좋다. 전동면도기의 성마른 감각에 비하랴. 비누거품을 구레나룻과 입술 주변에 묻힌다. 거울 속에 하얀 거품을 바른 얼굴이 단호하게 마주 본다. 위로 추켜올려진 짙고 두터운 눈썹. 검고 매섭게 빛나는 눈. 꽉 다물린 입. 거품 아래 숨겨진 완강한 턱. 양미간에 힘을 주면 V자로 새겨지는 두 개의 깊은 골까지 영락없는 호랑이의 형상이다.


"언제부턴가 내게 돈 빌리러 오는 사람은
한 장의 서류, 한 마리의 개로 보였다
말 잘 듣고 눈치 보는 비루한 개
먹을 것을 주면 쪼르르 달려와 발바닥을 핥는 개"



전화가 쉴 새 없이 걸려왔다. 여직원 두 명이 번갈아가며 전화 상담을 하거나 컴퓨터에 저장된 무수한 전화번호를 보며 문자 메시지를 띄웠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팩스로 보내진 등본과 주민등록증을 들여다본다. 흠흠, 먼저 종이에 코를 갖다 대며 신중하게 냄새를 맡는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신원을 알려주는 이 서류들이 내게 얼마나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지 눈앞에 동그라미 숫자를 그려본다. 덫에 걸려 몸부림치는 여린 것들을 상상하면 할수록, 킁킁, 나는 절로 오르가슴을 느낀다. 경기가 불안하고 어려울수록 유리했다. 구석구석 쳐놓은 덫을 알면서도 스스로 걸려들어 오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요즘 같으면 정말이지 만세, 라도 부르고 싶었다. 돈 놓고 돈 먹기. 투자한 돈이 몇 배로 불려 내 손으로 들어왔다. 이런 재미를 모르는 것들이 고리대금업이니 악덕사채업이니, 이따위 말도 안 되는 멍청한 소리를 해댔다.

'방문 없이 전화 한 통으로 쉽고 간편한 대출', '10분 내 당일 대출', '무담보, 무보증'. 얼마나 환상적인가.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국가도, 부모도, 자식도 못해준 것을 나는 해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처음부터 쉬운 일은 없다. 십사 년 전 그런대로 유지되었던 선반 기계 공장이 돈을 돌려막지 못해 부도가 나고 빚쟁이로 나앉게 되었을 때 내게 남겨진 건, 병든 아버지와 나만 바라보고 있는 식구들이었다. 아버지는 신장이 망가져 정기적으로 혈액투석을 받아야만 했다. 벼랑 끝에 내몰린 심정이었다. 발 하나만 내딛으면 천길 바닥이었다. 그래도 나를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준 건 아내였다. 아직 젊은데 우리 둘이 힘을 합하면 설마 굶기야 하겠어요. 아내도 고생은 많이 했다. 돈 되는 일이라면 식당, 세차장, 파출부, 아파트 공사현장일까지 보통 여자들이 하기 어려운 일까지 다 했었다. 아내의 강단과 긍정의 힘이 큰 버팀목이 되었다.

인맥을 바탕으로 건강식품, 정수기, 중고자동차 매매 등 일을 하며 악착같이 종잣돈을 마련했다.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제대로 돈 빌려주는 법'에 눈뜨게 되었다. 처음엔 작은 투자금으로 시작했다. 비록 큰돈은 아니었지만, 그 돈을 잘게 여러 개로 나누어 빌려주고 꼬박꼬박 이자를 받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잘 처리했다는 K의 메시지였다. 몇 달씩 이자를 미뤄놓고 잠수 탄 놈을 찾아내 새 일터로 찾아가 성공적으로 족쳤다는 말이다. 쓸 만한 '주먹'들 서너 명만 수족처럼 잘 부리면 예전처럼 돈 떼이는 일은 드물었다. 사채이자가 턱없이 높다고 난린데 떼일 경우도 고려한다면 높은 이자도 아니었다. 생떼 같은 남의 돈을 먹으려면 그 정도는 부담해야 합리적이지 않은가. 그냥 먹겠다는 것은 다 손 안 대고 코 풀려는 뻔뻔한 짓이다. 처음에 이 업을 시작할 땐 순진해서 이자는커녕 원금까지 말아먹는 일도 여러 번이었다. 그때는 마음이 약해 동정심에 흔들렸었지만, 사업은 사업일 뿐.

채무자를 직접 만나지 않는 건 일을 한결 수월하게 했다. 자칫 신파극에 끌려다닐 수도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내게 돈 빌리러 오는 사람은 한 장의 서류, 한 마리의 개로 보였다. 말 잘 듣고 눈치 보는 비루한 개. 먹을 것을 주면 쪼르르 달려와 내 발바닥을 핥는 개. 나는 그것의 엉덩이를 냅다 걷어차거나, 목줄을 매어다 놓고 그것의 껍질을 벗겨 살을 발라내면 되었다. 개는 죽어 보신탕이라도 되지, 아무것에도 기여 못하는 잉여인간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휘익, 이리와 쫑쫑. 내 휘파람에 달려올 개들은 세상에 넘치고 넘쳤다. 그 개들이 백 마리든 이백 마리든 그건 아무 의미가 없다. 수많은 개들이, 한 마리 한 마리 내 앞에서 널브러질 때마다 걷잡을 수 없는 에너지가 넘치며 나를 새롭게 했다. 개의 몸통을 물고서 폭주기관차처럼 돌진, 돌진! 거친 벌판의 맹수가 된 느낌이랄까. 조용필은 자신을 일러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고 했던가. 나는 시베리아의 호랑이? 푸하하하. 내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릴 수는 없지 않은가.

오늘 꼭 들러요. 아내의 말이 일하는 사이사이 가시처럼 찔렀다.



분위기가 썰렁하고 침통했다. 진한 향내가 코를 파고들었다. 선뜻 안으로 들어가려니 주춤거려졌다. 나는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옷깃을 여몄다. 오고 싶지 않았지만 빠질 수도 없는 처지였다. 아내가 먼저 나를 발견했다. 검은 상복을 입은 아내의 머리에는 하얀 리본이 꽂혀 있었다. 아내가 굳은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이 썼다. 도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조문객은 별로 없었다. 영정 속의 얼굴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마주 보았다. 아직 마흔이 안 되었지. 나 또한 마음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나는 최대한 고개를 수그려 향을 새로 꺼내 불을 붙이고 절을 하려는데 누가 나를 강하게 낚아챘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네가 여길 어디라고 와! 큰 처형은 미친 듯이 나를 흔들고 몰아세웠다. 내 아들 살려내, 살려내. 니가 사람이야, 어? 이 개만도 못한 놈아! 큰 처형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울부짖었다. 아내의 다섯 자매가 병풍처럼 둘러싸고서 묵묵히 지켜보았다. 아내마저 나를 구해줄 생각은 안 하고 구석으로 비켜나 있었다.

거, 에어컨 좀 줄여라. 추워서 소름이 돋는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차 안이었다. 상운이 안 된 건 사실이지만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사업한다고 이리저리 돈을 끌어다 쓰고 망한 건 전데 왜 내가 이 덤터기를 쓰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죄라면 빌려준 죄밖에 없다. 조카라고 금리도 낮춰 줬구먼. 내 돈도 날려버리게 생겼는데. 빌려달랄 땐 언제고 나를 살인자 취급하다니, 아내도 원망스럽다. 그놈 얼굴이 허여멀건 한 게, 약해빠져서는…. 빚 독촉 좀 했다고 죽었겠어, 세상을 물렁물렁하게 본 거지. 죽을 용기로 악착같이 살아 내 빚도 갚고 보란 듯이 일어났었어야지. 츱, 입이 썼다.



도시의 밤은 불빛이 있어야 도시다웠다. 휘황한 네온과 자동차들이 질주하며 빛을 뿜어냈다. 꺼지지 않는 욕망 같은 불빛이 도시를 빛나게 했다. 욕망은 밤에도 잠들지 않는다. 나는 아래를 굽어보다 이곳 생활도 익숙해지니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13층 높이지만 여느 펜트하우스 못지않게 쾌적하고 안락했다. 원룸 건물을 인수받았을 때 맨 꼭대기 전망 좋은 곳으로 내 방을 꾸민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위스키 잔을 들고 대리석 책상으로 가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는다. 얼음 없이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게 좋아졌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술과 무엇보다 쓸데없는 생각이 늘었다. 나도 모르게 가족들 얼굴을 자주 떠올린다. 몇 달 전 짐을 싸들고 여기로 왔다.

아내는 장례식을 마치고 작정한 듯 말했다. 당신 이제 사채놀이 그만둬. 나는 발끈했다. 뭐, 사채놀이? 당신은 내 일이 놀이로 보이나? 이건 엄연히 사업이야. 냉정한 사업. 아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 일 안 해도 충분히 먹고살 정도로 넘치잖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당신의 사악한 기운이 우리 집을 오염시키고 있어. 당신 때문에 죽은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이겠어? 가엾은 영혼들이 집안을 떠도는 것 같아 발 뻗고 편히 못 자겠어. 당신이 계속 그렇게 살 거라면 우리 이혼해. 아니면 여기서 나가든지. 내가 아버님 모시고 아이들과 살 테니. 당신 돈, 필요 없어. 내 노동력으로 뭔들 못하겠어. 작은 국숫집을 차리더라도 마음 편하게 살고 싶어.

대단한 반격이었다. 허를 찔린 셈이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먹여 살리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 사람한테 이제 와 보따리 내놓아라. 이혼은, 아니 이혼당한다는 건 내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식구들이 똘똘 뭉쳐 나를 투명인간 대하듯 하는 데에는 견딜 재간이 없었다. 나를 내다 버린 폐기물로 취급했다. 자식도 아버지도 다 미웠다. 신장이식수술까지 해서 살려놓은 아버지는 적어도 내 편이어야 했다.

독한 코냑을 목으로 넘긴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내게 던진 말은 더 독했다. 당신 예전엔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거울을 보라고. 당신은 괴물이야. 소름 끼쳐.

괴물이라고? 나는 눈을 부릅뜨고 맞은편 거울을 본다. 고개를 거칠게 가로젓는다. 나는 거울을 향해 술병을 집어던진다. 와장창. 화려하게 빛을 반사하던 거울이 직삼각형으로 길게 여러 개의 파편으로 분열되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조각조각 나누어져 있다. 미간 사이에 V자로 파인 골이 오늘따라 짙은 고독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나는 거울 속의 일그러진 호랑이를 되쏘아보며 길게 포효한다.


하나은행·부산소설가협회 공동기획

배이유 소설가

◇약력=2011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