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인+간)]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 동아대 교수 문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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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과 눈물로 일궈낸 '돌려차기' 가난과 시련과 도전은 내 일상이었다

문대성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가난과 시련으로 점철됐던 자신의 태권도 인생 이야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 박희만 기자 phman@

안녕하세요. 날씨가 많이 춥죠. 저는 문대성입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기도 하고

동아대 체육학과 교수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저를 보면 다들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태권도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IOC 위원에, 교수까지 됐으니 말이죠.

얼굴이 밝고 환하게 보여 어릴 때 부유하게 자랐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세상에 편하게 공짜로 되는 일이 어디 있나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그다지 편안한 인생을 살아오지 못했습니다. 제가 걸어온 삶의 길을 같이 한번 돌아보시죠.


■방 두 칸에 아홉 식구=저는 인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선주였지만 배 침몰 사고 때문에 사업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의 불행이 시작됐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에 누나 4명, 동생 2명, 여기에 저까지 해서 우리 식구는 모두 9명이었는데 방 2칸에 나눠 살았답니다.

구월초등에 다닐 때 기억이 납니다. 이때는 하루 세 끼 밥도 제대로 못 먹었습니다. 아침은 죽으로 때우고 점심은 굶기 일쑤였죠. 당시에는 학교 무료급식이 없었습니다. 저녁에 집에 오면 그때서야 밥을 먹을 수 있었어요.

누나들은 그래도 공부를 잘해서 학교에서 전교 회장, 부회장을 했답니다. 선생님들이 "너희들은 공부를 잘하니까 대학에 가야 한다"면서 가정방문을 하려고 했대요. 그런데 누나들이 창피해서 집 주소를 엉터리로 가르쳐주는 바람에 결국 선생님들이 한 번도 집에 찾아올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 사업 실패로 방 두 칸에 아홉 식구
아침은 죽으로 때우고 점심은 굶기 일쑤 
약골에 맞고 다녀 어머니가 태권도 권유, 선수의 길
부상·시드니행 좌절 딛고 오뚝이처럼 일어나 
마침내 2004년 아테네올림픽서 값진 금메달

■허약한 아들에게 태권도=
집안 형편은 어려웠지만 어머니는 저를 장남이라며 특히 아껴주셨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제대로 못 먹은 탓에 키도 작고 덩치도 작았습니다. 동네 불량배들에게 끌려가 맞기도 많이 했죠. 그때 어머니께서 태권도를 배우라고 하시더군요. 처음에는 발차기를 하는 모습이 무서워서 안 가겠다고 버티다가 강제로 끌려가게 됐습니다. 체육관 사범님이 저를 꼭 껴안아 주시더군요. 그래서 태권도를 시작하게 됐답니다.

다른 애들은 품세를 좋아했지만 저는 겨루기가 재미있었습니다. 소리를 지르며 치고받고 하는 게 신나더라고요. 아마 가난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랬나봐요. 처음 나간 인천 지역 태권도대회가 기억납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결승까지 올랐는데 그만 여자선수에게 내려찍기를 맞아 쌍코피를 흘리며 울고 말았습니다. 그대로 KO패였죠.

3년 동안 회비를 면제해 준다는 말을 듣고 구월중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당시 태권도 감독이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화연 선생님이셨는데 정말 무섭게 훈련을 시켰어요. 이 선생님은 웨이트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알고 계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방법은 잘 모르셨던 것 같아요. 선수들끼리 돈을 모아서 역기를 샀죠.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장소가 없어 역기를 들고 한적한 도로로 가는 일이 많았어요. 운동을 체계적으로 못하다 보니 허리, 무릎, 발목을 다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때 저는 키가 170㎝ 정도였어요. 평범한 체구였죠. 다행히 인천 대회에서 금을 두 번 따고, 전국대회에서 동을 한 개 건져올릴 수 있었어요.

문대성 IOC 위원이 새해 포부를 밝히며 환하게 웃고 있다.



■본격적인 선수의 길을 걷다=부평기술고에 특기자로 입학했습니다. 1학년 때 사고가 터졌습니다. 선배들이 훈련하는 게 너무 힘들다며 모두 도망을 간 겁니다. 아침에 학교에 가보니 선수들은 아무도 없고 선생님만 화난 표정으로 혼자 서 계시더군요. 선생님이 "너는 왜 도망 안 갔냐"고 물으시데요. 나중에 알고 보니 3학년 선배들이 1, 2학년 후배들 집에 전화를 걸어 "내일 학교에 가지 마라"고 했다더군요. 그런데 우리 집에는 전화가 없어서 선배들로부터 연락을 받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이 사건은 우습게도 저의 태권도 인생에 전환점이 됐습니다. 학교 측에서 태권도 팀을 없애겠다고 나선 겁니다. 그래서 택한 학교가 서울 리라공업학교였습니다. 당시에는 정식 인가 고교가 아니었습니다.

리라공고에 다닐 때 집안에 다른 사건이 하나 터졌습니다. 남동생은 축구를 좋아했습니다. 학교 축구부에 들어가 선수를 하고 싶어 했죠. 그런데 부모님이 "형 운동 시키는 데도 돈 많이 든다. 너는 포기해라"고 하셨다네요. 그때까지도 우리 집은 여전히 어려워서 방 2칸에 아홉 식구가 그대로 같이 살 때였어요. 여기에 동생이 폭발한 겁니다. "왜 어릴 때부터 형은 모든 것을 다 해 주면서 나는 안 되는 거야."

동생은 결국 축구를 포기해야했어요.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나 때문에 동생이…. 그때부터 제 생각이 바뀌었어요. '정말 잘해야겠구나. 나 때문에 누나와 동생들이 이렇게 피해를 보는데…'

그때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습니다. 가정 형편 때문에 서울에서 자취나 하숙을 할 수가 없어서 통학을 했죠. 매일 학교에 6시 30분까지 도착해야 했어요. 그래서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학교까지 갔죠. 집에 돌아올 때는 미리 버스에서 내렸어요. 집까지 1시간 이상 달리기를 했어요. 집에 도착하면 거의 12시가 다 되더라고요.

이렇게 고생한 덕분이었는지 고3 때 전국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금 2개에 은 1개를 따냈죠. 전국고교랭킹 2, 3위권이라는 소리를 듣게 됐습니다.

당시 전국 최강이던 두 대학으로부터 입학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운동부 회비 등 돈이 많이 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그래서 망설이고 있을 때 당시 리라공고 최종국 감독님이 "동아대에 가면 기숙사비와 등록금을 면제해 준다더라"고 하시더군요. 결국 최 감독님 말씀대로 동아대로 진로를 정했습니다. 그곳에서 일생의 스승인 김우규 교수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아시아 최초 IOC선수위원 도전
'무모하다' 비판 많았지만
진실한 마음·자신감으로
불가능 무너뜨려

'인간 문대성' 작고 약한 존재지만
스포츠인으로 할 일 많아
한국 외교 아직 밑바닥 수준
이 분야 선구자역할 하고 싶습니다

■연이은 불운 뒤에 찾아온 금메달=
대학교에서 키가 자라 189㎝가 된 저는 2학년 때 국가대표로 발탁됐습니다. 그때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죠. 그런데 부상의 악몽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왼쪽 무릎을 크게 다쳐 다리를 절단해야 할 정도의 위기를 맞았죠. 다행히 동아대 병원에서 골수배양에 성공해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됐습니다.

1999년에는 캐나다 에드먼턴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남자 80㎏ 이상급에서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시드니 올림픽에 아무런 문제없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죠. 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한 대학선배 김제경 선수가 부상으로 태극마크를 반납했습니다. 당연히 2위였던 제가 올림픽 티켓을 이어받을 것으로 생각했죠. 그런데 대한태권도협회에서 3위 김경훈 선수와 재대결을 하라고 하더군요. 억울했지만 경기를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안 되려고 했던지 재대결에서 패하고 말았답니다.

한때는 태권도를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김우규 교수님이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 주시더군요. 곧바로 군에 들어가는 것으로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은 저를 대학교수이자 IOC 위원으로 만들어준 계기였죠. 다들 결승전 기억하시죠. 키가 2m를 넘는 장신이던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니콜라이디스 선수와의 경기요. 시원한 돌려차기 한 방이 터졌습니다. 니콜라이디스 선수는 그대로 KO되고 말았고요. 올림픽 태권도 사상 첫 결승전 KO였답니다. 저는 상대 선수가 걱정돼서 다가갔죠. 그리고 그를 일으켜주며 진심으로 위로했답니다. 경기장에는 승패와 관계없이 뜨거운 박수가 터져나왔어요.

지난 2004년 아테테올림픽 태권도 결승에서 돌려차기로 금을 따내는 장면.



■IOC 위원에의 도전=올림픽에서 금을 따낸 후 저는 태권도 선수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감사하게도 모교 동아대에서 저를 태권도 감독이자 교수로 채용해주셨습니다. 그때 새로운 도전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로 IOC 위원이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선수위원이 그것이었죠.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물론 아시아에서 선수위원은 한 명도 없었답니다. 그랬더니 언론은 물론 태권도계 안팎에서 "분수도 모르고 무모하게 도전한다"는 비판이 쇄도하더군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며칠 앞두고 다른 후보들보다 선수촌에 일찍 들어갔습니다. 선거운동을 펼치면 효과가 있겠다는 생각에 태권도복을 입고 활동을 시작했죠. 선수촌 식당 앞에 자리를 잡고 식사하러 오가는 선수들에게 일일이 선거 유인물을 나눠주며 악수를 청했죠.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외국 선수들이 며칠 지나니 저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청하러 오더라고요.

며칠 뒤에 IOC 관계자가 오더니 "식당 입구에 서 있지 말고 30m를 떨어져라"고 하더군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그렇게 했죠. 며칠 뒤 그 사람이 다시 오더니 이번에는 "100m 떨어져라"고 하는 거예요. 친해진 외국인 선수들이 "왜 여기로 옮겼느냐"면서 빵과 음료수 같은 것을 가져다 주더군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프랑스 조정 선수가 오더니 "8강에 올라갔는데 너무 심리적 부담이 강하다, 어떻게 해야하느냐"고 자문을 하더군요. 그래서 저 나름대로 손짓발짓을 다 동원해서 노하우를 설명했죠. 제가 마지막으로 해준 말은 '진인사대천명'이었습니다. 영어로는 어떻게 했냐구요. "You only play, and wait god's will." 다행히 그 선수는 은메달을 땄습니다.

올림픽이 막바지에 접어드니까 외국 선수, 코치들은 물론 우리나라 선수, 코치들도 제게 "네가 우세하다더라. 다들 네 이야기를 한다"고 전해주시더군요. 저랑 친해진 외국 선수들은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는 휴대전화 사진을 보여주더군요. "네게 투표했다는 인증샷"이라는 뜻이었죠. 그렇게 저는 IOC 선수위원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문대성 위원이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선수위원 선거 활동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갈 곳은 많고 할 일도 많다=IOC 위원이 되고 보니 정말 대단한 자리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나의 인간 문대성은 작고 약한 존재지만 스포츠를 통해 도전의 삶을 이어가면 할 수 있는 게 정말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겁니다.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과정이 새삼 떠오릅니다. 아내와 아이에게 미안할 정도로 외국을 돌아다녔어요. 집에 머무른 시간은 길어야 한 달에 2~3일 정도였어요.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로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먼저 역량을 더 쌓아 스포츠 외교 전문 인력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싶어요. IOC 위원으로 활동하다 보니 우리나라 스포츠 외교는 아직 밑바닥 수준이라는 걸 절감했습니다. 이 분야에서 선구자 역할을 하고 싶은 게 제 꿈이죠.

생활체육 분야에서도 일하고 싶어요. 우리나라는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잖아요. 노인의료비만 해도 7조~8조 원에 이른다고 하더군요. 이 가운데 일정 부분만 생활체육에 체계적으로 투자하면 노인의료비를 크게 줄일 수 있을 텐데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저는 앞으로 태권도인 문대성에서 우리나라 체육의 선구자 문대성이 되겠다는 약속을 드리겠습니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건강을 지키는 데는 운동이 최고입니다. 우리 모두 파이팅, 태권도 파이팅! 

문대성 위원이 지난 2005년 코리아 오픈 국제태권도대회에서 방송 해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추신=저를 그렇게 아껴주신 어머니는 지금 치매를 앓고 계십니다. 옛날 기억을 거의 못하십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길을 잃을 때 한 가지만 기억한다고 합니다. "우리 아들이 문대성이야." 제가 IOC 위원이 되기 전 부산에서 살 때는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병원이나 경찰서에서 수시로 전화가 왔습니다. "문대성 씨, 어머니가 여기 계신데요." 솔직히 정말 힘들더군요.

지금은 누나 중 한 명이 인천에서 어머니를 아버지와 함께 모시고 삽니다. 저는 매주 인천에 부모님을 뵈러 갑니다. 항상 어머니를 꼭 껴안아드리고 가끔 뽀뽀도 합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아주 좋아하십니다. 남태우 기자 leo@busan.com

문대성이 후배들에게

잘 안 풀릴 때도 있어
낭떠러지는 아니잖아
다시 일어나면 돼

인생을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릴 때도 있고 안 풀릴 때도 있습니다. 저는 위기 때마다 항상 이렇게 스스로 위로합니다. '넌 잘 하고 있어. 지금이 낭떠러지는 아니잖아. 다시 일어서면 돼.' 이런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오늘날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후배 여러분, 우리가 가진 게 뭔가요. 젊음이잖아요. 젊으니까 도전할 수 있고 실패하면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거예요. 40~50대가 되면 현실에 안주할 뿐이지 새롭게 도전을 할 수 없어요.
어려움에 부닥친 후배에게 제가 이런 말은 쉽게 해줄 수 있어요. "힘들지." 하지만 이 말은 감정적인 도움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제 그에게 현실적 힘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흔들리는 후배가 주저앉지 않도록 야단치고 바로잡아 주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제가 살아온 인생이 길지는 않지만 시련과 고통, 도전 없이 성공은 없다는 것을 압니다. 저 역시 많은 시련을 겪고 도전을 해 봤다고 스스로 평가하기 때문에 후배들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이런 말을 해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건승을 빕니다.
약력

1976년 9월 3일 출생 인천 구월초등-구월중-서울리라고-동아대-용인대 대학원 석사-국민대 대학원 박사
1999년 세계태권도 선수권대회 우승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
2004년 아테네올림픽 금
2005년 동아대 태권도부감독
2006년 동아대 교수
2007년 세계태권도연맹 집행위원
2008년 국제올림픽 위원회(IOC) 위원
2009년 아시아올림픽 평의회(OCA) 선수위원 대한체육회 이사
2011년 2018 평창동계 올림픽조직위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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