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남 새 장편소설 '감꽃 떨어질 때' 역사의 물결에 흔들리는 민초들의 이야기
소설가 정형남이 새 장편소설 '감꽃 떨어질 때'(산지니)를 보내왔다. 30년 살던 부산을 떠나 전남 보성으로 들어간 지 6년. "소설 맘껏 쓰고 싶다"던 게 보성으로 찾아든 이유였다. 장편소설 '삼겹살'을 내놓은 지 2년 만에 또 하나의 장편소설을 탈고한 것이니 그는 바람대로 지내는 모양이다.
그의 새 소설에선 뚜렷한 변화들이 탐지된다.
새 소설은 전남 보성을 중심으로 순천 여수 등을 무대로 삼았다. 정형남은 "이쪽 사람들은 전라남도 동부라 한다"고 전했다. 전작 '삼겹살'이 전남과 부산을 오가는, 과도기적 성격이었다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남도 소설'을 써 나가고 있는 셈이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배경
서정적이고 몽환적 필체로
남도 여성의 삶 차분히 묘사소설 분위기도 철학이나 이데올로기 등 묵직한 주제들을 붙잡았던 전작들과는 달리 서정적이며, 또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새 소설 역시 일제 때부터 한국전쟁 이후까지, 치열했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하지만, 정형남은 시대보다는 시대 속 민초들의 삶에 더 초점을 뒀다. 그는 "4·3 사건, 여순 사건을 다룬 소설들이 있었다. 그걸 새삼 반복할 이유는 없다. 확실한 자기 의지 없이 시대에 휩쓸리고, 나름대로는 운명이라고 자포자기하면서도 회의하는 민초들의 삶을 다뤘다"고 말했다.
액자 식 구조인 소설은 일흔셋 할머니가 된 딸이 '감꽃이 떨어질 때 돌아오마'는 말을 남기고 떠난 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윽고 이야기는 일제 때로 건너가 항일 의병에 몸담고, 다시 빨치산으로 변하는 산골 촌부들의 삶을 좇는다. 그들은 의기에 휩싸여 시대와 맞서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시대에 휩쓸린다. 자기 의지가 뚜렷한 인물인 '조영'이나 한순간에 이데올로기에 휩싸인 인물 '삼수'나 거대한 역사의 조류에 흔들린다.
하지만 소설은 역사나 남성의 삶이 아닌 어머니와 딸에 주목한다. 중심적 화자도 여성이다. 일제와 해방 공간, 분단을 겪는 남자들이 이데올로기나 전쟁으로 갈리고 난리를 벌이는 동안 고독과 고난을 속으로 삭여야 했던 여성들의 삶을 차분히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 때 아버지 잃고 이제는 칠순 넘은 딸들이 그들의 아버지 이야기를 해요. 전쟁 때 남편 잃은 과부들도 이웃에 살고 있고요. 그들의 고독과 한스러움은 아직 풀리지도, 조명되지도 않았어요." 소설의 주요 소재인 감나무는 곧 여성이다. 작가는 "감나무는 집마다 있을 정도로 친화력이 있고 한번 자리 잡으면 생명력 또한 강하다. 우리네 여성들과 똑 닮았다. 잎이 아닌 통째 털어지는 감꽃 역시 여자들의 지조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영한 기자 kim01@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