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업의 부산에 살다] 수영야류(수영들놀음)
수영야류 제3과장 할미·영감과장에서 봉사가 죽은 할미를 위해 경문을 읊고 있다."여보시오. 우리 영감 못 보았소?" 수영야류 놀이마당에 나타난 할미가 집 나간 지 오래된 영감을 찾아 나섰다. 초라한 옷차림에 죽장 짚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데 햇볕에 그을린 듯한 피부색 얼굴에 두 눈은 밑으로 처지고, 코는 왼편 볼까지 삐뚤어졌으니 입도 왼쪽에 붙었다. 안쓰러워 보이던지 악사가 말참견을 한다. "당신 영감이 어떻게 생겼소?" "우리 영감, 우리 영감은 훌륭하고 깨끗하고 이마가 투욱 터지고 사모(紗帽) 꼴 나고 점잖고 양반답고 알곰삼삼하오." 할미 몰골은 말이 아니지만 영감모습만큼은 장자(長者)답게 얘기한다. "방금 그런 양반 이리로 지나갔소." 할미 고맙다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영감 찾아 나선다. 제법 여유까지 갖추어 창으로 부른다. "영감이여∼!"
지난 13일 수영동 수영민속놀이마당에서는 수영민속보존회원의 길놀이와 수영야류 탈제를 시작으로, 수영야류의 할미·영감과장이 질펀하게 연희되고 있었다.
조선시대 해군기지였던 '수영'
어방놀이, 농청놀이 등 민속 전승
탈 쓰고 가무와 풍류 즐긴 들놀음
250년 전 역사 가진 수영야류
익살과 너스레의 열린 놀이마당
조선시대 경상좌도수군절제사영(오늘날의 해군기지)이 있어 좌수영이라 부르던 것을 폐영이 된 뒤에도 오늘날까지 관아의 명칭을 줄여 수영(水營)으로 부르는 이곳에는 야류 외에도 좌수영어방놀이, 수영농청놀이, 수영지신밟기 등 여러 민속이 보존 전승되고 있다.
수영야류란 들놀음, 들놀이를 한자로 야유(野遊)라 적은 데서 비롯한 명칭으로 가무(歌舞)와 풍류를 즐기던 이곳 토박이들이 꾸며낸 탈놀음인 것이다. 양반과장을 필두로 영노과장, 할미·영감과장, 사자춤과장 등 네 과장으로 꾸며져, 악사들이 연주하는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춤도 추고 재미와 해학이 넘치는 재담으로 꾸며져 있다. 당대 시대의 양반을 꼬집고 헐뜯으며 할미의 질투와 실수로 빚어지는 불행을 익살과 너스레로 승화시키는 탈을 쓴 놀이꾼들의 연희는, 농사짓고 고기 잡던 보통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지혜이다.
250여 년 전부터 전해져오는 수영야류는 정월 대보름날 오전에 산정머리 송씨할매당과 조씨할배당, 먼물샘과 최영장군당(무민사)에서 고사를 지낸 다음 달 밝은 밤에 팔도시장 터 넓은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고 횃불 들어 불을 밝히면서 밤을 도와 놀았다. 극 속에서 주고 받는 익살스러운 대화는 즉흥적이기 마련이어서 구경 온 마을사람들을 배꼽 쥐고 웃게 했다. 농사일과 뱃일로 지친 수영사람들을 즐겁게 하였다.
수영야류 탈은 모두 12개로 사자와 범의 탈만 대소쿠리이고 그 밖의 것은 바가지 위에 한지를 발라 인물을 그려 만들었는데, 원래 정초에 부정이 없는 깨끗한 곳에서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 탈이 완성되면 모아서 모시고 '탈제'라는 고사를 지냈다. 놀이를 마치고 나서 탈을 태우고 다시 고사를 올리는 '탈소각제'를 지내는 것으로 보아 탈이 지닌 신성한 기운과 풍농을 빌고 각 가정의 행운을 빌어 온 수영사람들의 마을사랑을 알게 한다. 그렇게 해마다 놀이 이후에 탈을 불살라 버리다 보니 오래된 탈은 전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1963, 1964년에 조덕주(1914~1983) 씨가 만들면서부터는 소각하지 않아 지금껏 흔적이 남아 있는데, 현재 사용하고 있는 수영탈은 1980년에 조덕칠 씨가 만든 것을 병용하고 있다.
수영야류판의 탈놀음은 수영사람이 놀았지만 길놀이에는 원근 각처의 마을사람들이 함께하였으며, 특히 팔선녀가 기생춤을 추고 난봉가패와 양산도패들이 민요를 부르며 참여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마당 춤놀이나 뒷놀이에서도 여러 모양의 춤이 어울리듯 수영야류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열린 놀이인 것이다.
주경업
부산민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