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가운에선 사람 냄새를 맡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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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국에 가고 싶다/최복자, 지독한 하루/남궁인

세상의 모든 인간 군상을 만나는 직업. 그중에서도 약사·의사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기에 전문직 중의 전문직으로 여겨진다. 흰색 가운이 풍기는 권위는 분명 편안함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매일 수많은 환자와 부대끼며 함께 병마와 싸워야 하는 이들의 삶은 여느 '노동자'와 다를 바 없다. 4차 산업혁명으로 노동자의 일자리가 위협받듯 이들 역시 사라질 직업군 중 하나로 꼽힌다. 과연 로봇이 약사와 의사를 대체할 수 있을까. 약국과 병원은 일상생활의 중요한 일부지만, 정작 우리는 '그들이 사는 세상'에 대해 잘 모른다. 어쩌면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흰 가운에서도 사람 내음이 풍긴다는 사실 말이다.

포항 읍내 약국 최복자 약사
손님들 고민 들으며 상담
'마음의 병' 어루만져 완치 유도

생사 다투는 응급실 전문의
화상 환자·학대당한 아기…
'삶과 죽음의 경계' 사투 기록

"안녕하세요, 어디가 아파서 오셨나요?" 요즘 약국에서는 쉬 들을 수 없는 인사말이다. 의약분업이 도입되면서 약국은 시나브로 처방전에 적힌 약을 주고받는 사무적인 공간이 돼 버렸다. 그런데 포항의 한 읍내 약국은 조금 다르다. 약사는 항상 미소와 함께 90도로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고, 손님들은 집안의 대소사와 고민을 함께 나눈다. 오래전 시골 약국에서나 볼 법한 풍경. 최복자 약사는 약국에 약 냄새가 아닌 사람 냄새가 나야 한다는 신념으로 32년째 이 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최 약사의 공감과 소통이 일으킨 결과는 놀랍다. 험상궂은 문신을 한 조폭 손님은 다음 날 부하들까지 데리고 오는 단골손님이 된다. 피부병을 극복한 어린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감사의 편지를 보내온다. 딸 결혼식까지만이라도 사는 게 소원이라던 말기암 환자인 이장님은 여전히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다. 최 약사는 병원 처방전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대신 병증의 근본 원인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환자의 이야기를 경청한 뒤 자신의 전공인 생약, 식이요법 등을 활용해 완치의 길로 이끈다. 치유법보다 더 중요한 건 '마음의 병'을 어루만져 주는 상담이다. 최 약사의 약국은 입소문을 타고 지금은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찾을 정도다. 주민들에겐 동네 사랑방이자 만남의 장소며, 1년에 한 번 음악회장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최 약사가 환자들과 나눈 교감의 이야기를 에세이로 풀어낸 <그 약국에 가고 싶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책 제목처럼 약국을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동한다. 한쪽 옆구리를 움켜쥔 채 몸속 회충을 잡아 왔다는 할머니, 아들 설사병을 치료해 달라며 병원이 아닌 약국에 입원(입국)하러 온 모자 등 황당한 사연을 그대로 품어 안는 약국은 사람 내음으로 그득하다. 때로는 감정노동에 버금가는 헌신이지만 최 약사는 오히려 환자들에게서 많은 걸 받았다고 말한다. '환자들과 함께했던 소소한 일상, 질병과 아픔을 견뎌 낸 뒤 찾아온 완치의 행복은 필연의 선물이었다'며 '질병 예찬론'을 펴기도 한다.

최 약사는 '행복한 약국 만들기'를 모토로 전국의 약사와 약대생들에게 강의하고 있다. 온라인 공간에선 버려진 반려동물을 보살피는 약사로도 유명해, 2013년 <길천사들의 행복 수업>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자동화 기계가 약을 조제하는 로봇약국까지 생겨나는 요즘, 최 약사의 후배들에게 '오래된 미래'를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복자 지음/책읽는귀족/224쪽/1만 2000원.

병원 응급실은 좀 더 긴박하고 치열하게 병마와 싸우는 공간이다. 생사를 다투는 과정에서 부조리한 사회 현실이나 선악의 문제들이 터져 나오기도 하기에,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어느 날 생기 없는 얼굴로 실려 온 생후 2개월 된 아기. CT 촬영 결과 두개골은 여기저기 부서져 뇌출혈이 심하고, 뼈가 부러졌다 붙은 흔적도 온몸에서 발견됐다. 지적장애인 엄마가 더듬더듬 밝힌 학대의 장본인은 아이 아빠. 그러나 응급실에 나타난 남성은 '동거인'일 뿐이라며 혐의를 부인한다. 한 번은 공단의 대형 폭발사고로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은 남성 3명이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산 채로 온몸이 불에 탄 사람들. 결국 심정지로 1명은 사망하고, 나머지 2명은 화상전문병원으로 떠났지만 이후 감내해야 할 고통을 생각하면 살았다 해도 산 게 아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 남궁인 씨의 에세이집 <지독한 하루>에는 죽음의 기로에 선 환자와 사투를 벌이는 응급실의 지독한 일상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사람의 죽음을 판정해야 하는 직업적 숙명에 대한 고민, 자신의 실수로 화를 키운 환자에 대한 죄책감 등 응급실 의사로서 감내해야 하는 고뇌의 시간이 글 곳곳에서 묻어난다. 개인적인 고민은 꼬리를 물고 의료체계 전반에 대한 문제 인식으로 이어진다. 난동을 부리며 의사와 환자 안전을 위협하는 취객에 대한 솜방망이 처분, 응급 환자를 제대로 구해 내지 못하는 중증외상센터의 현실, 지방직 공무원이란 이유로 열악한 처우 속에 일하는 소방대원 등, 30대 젊은 의사의 눈에 비친 오늘날 한국 의료시스템의 개선해야 할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저자가 없는 시간을 쪼개 글을 쓰는 이유는 사람이 사람에게 행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긋는 일'에 대한 무게감 때문. 작년 7월 <만약은 없다>에 이은 두 번째 에세이집이다. 24시간 근무한 뒤 한숨 자고 일어나 써 내려간 글들이기에 더 생생하고 묵직하게 다가온다. 남궁인 지음/문학동네/260쪽/1만 3000원.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그래픽=류지혜 기자 bir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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