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책방, 진주문고 "출발은 혼자였지만, 지킨 건 책을 사랑한 진주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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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 진주문고 지기 여태훈 대표. 그는 "책을 판 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를 산 세월이었다"고 말했다. 진주문고 제공

세상엔 책을 만든 사람보다 책이 만든 사람이 훨씬 많다. 물성 가득한 책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건네는 곳. 책을 파는 곳이지만, 책만 팔진 않는 곳. 세월의 부침 속에 꿋꿋이 살아남은 지역 서점에는 견뎌온 세월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있다. 지역민의 일상에 스며든 문화공간. 초등학생 시절 이곳에서 책을 보던 어린이가 그때 그 시절 엄마 나이가 돼 아이를 데리고 오는 곳. 32년간 경남 진주를 지켜온 진주문고에도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있다. 책의 힘과 매력이 자꾸만 탕감 당하는 시대. 온라인 서점의 공세에 밀려 지역 서점의 시름도 깊어간다. 그러나 진주문고는 오히려 대대적인 변신을 감행했다. 32년 진주문고 지기 여태훈(57) 대표는 "진주문고는 30년 넘게 지역민의 사랑을 받은 공간"이라며 "변신을 통해 최소한의 예의를 차려야겠다는 마음이었다"고 했다. 진주문고는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4월까지 5개월 리모델링을 거쳐 새로 단장했다. 여 대표는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니 서점의 완성은 없다"고 말했다. 완성보다는 늘 과정만 있는 일. "진주문고라는 자리에서 끊임없이 꿈틀거리고 있는" 책방주인의 지나온 30년과 나아갈 30년 이야기를 들어봤다.

1986년 사회과학서점으로 시작 

진주문고의 새 로고.

지역 복합문화공간 자리매김
누적 회원 수 10만 명 넘어

최근 리모델링 1~3층 공간 확장
카페·문구점·콘텐츠관·문화관 등
지역민 일상에 스며든 '서재'로

■책을 판 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를 산 32년

진주문고는 1986년 진주 경상대 앞 사회과학서점 '개척서림'으로 출발했다. 책 대여점과 세미나 공간을 겸한 복합문화공간 '책마을'로 개편(1988년)했다가 '진주문고'란 이름으로 자리 잡은 건 1992년이었다. 지금은 ㈜진주문고 체제로 진주문고 본점(진주시 평거동)과 진주문고 MBC점을 운영하고 있다. 진주문고는 저자 초청 강연회, 문화기행과 전시회, 인문학 음악회도 여는 지역 문화공간이기도 하다.

책마을 시절 도입한 회원제로 지금도 서점 매출의 80%는 단골 고객이 차지한다. 누적 회원 수는 10만 명이 넘는다. 이 중 1년에 한 번이라도 책을 사는 고객은 7만~8만 명. 인구 35만 작은 도시 진주에서 5명 중 1명이 진주문고 고객인 셈이다. 여 대표는 "책을 팔기 위해 가게를 열었지만, 책은 맨 나중에 파는 것"이라고 했다. 먹고 사는 방법 중 서점이 가장 좋아 서점 주인으로 출발했다. 그다음엔 책을 팔면서 서점을 확장해 나갔다. 당시엔 몰랐지만, 돌이켜 보면 그가 좋아했던 건 세상과 사람이었다. 그는 "책을 판 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를 산 것"이라며 "32년간 '마음 내는 일'을 해왔다"고 말했다.

진주문고가 가장 힘들었던 때는 1998년 외환 위기 당시였다. 차용증 하나 없이, 이자도 없이 상상할 수 없는 거금을 선뜻 빌려준 어르신이 있었다. 진주문고의 변화를 위해 10만 원부터 100만 원까지 선도서 구매권을 사서 힘을 보태준 시민들의 응원도 있었다. 이자도, 차용증도 없는 그 죽비 같은 응원은 10년이 걸려 다 갚았다.

여 대표는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작은 도시에서 관계의 불편함이 바로 관계의 최선이었고 더 큰 도약을 이루게 했다"고 말했다.

■어쩌면 '무모한 도전'이 기대되는 이유
여 대표는 "시대정신에 민감하지 않은 책방은 없다"고 했다. 사회는 빠르게 변화해 지금은 책의 정신이 위기인 시대. 서점 매출도 지난 3년간 해마다 10%가량 감소해 왔지만, 진주 문고는 5개월에 걸친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했다. 출판 매출 감소 추세엔 인구 절벽과 책을 읽지 않는 세대의 등장 등 여러 요인이 몫을 한다. 그나마 타 지역보다 감소율이 낮은 건 진주문고가 일상처럼 지역민에게 다가간 덕분이다.

여 대표는 "서점이 30여 년 무탈하게 왔다는 것은 혼자만의 능력이 아니라 그 중심에 지역과 지역민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보상이 있든 없든, 손해를 보든 말든 가야 할 길로 그냥 가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

5층 건물에 학원 등이 있던 임대공간까지 서점으로 리모델링해 1~3층을 진주문고로 확장했다. 1층엔 카페와 문구점, 지역 콘텐츠관이 들어섰고, 2층 진주문고 문화관 '여서재'도 새 단장을 마쳤다. 1층에 새로 생긴 공간들 때문에 줄어든 책의 공간은 3층 전체를 할애해 200평 이상 확대했다.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해 온 여서재는 행사마다 50~70명이 참가하는 인기 공간. 그동안 박남준 시인, 공지영 소설가, 김탁환 소설가,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등 문화예술인 강연이 이어졌다. 이번 리뉴얼로 '나의 서재' 여서재(余書齋)는 시민의 자유로운 연대를 꿈꾸는 '당신의 서재'로도 거듭났다.

여 대표는 "서점은 책이 주인인 공간이어야 하고, 무거움과 가벼움을 적절히 섞은 지역민의 커뮤니티 공간이어야 한다는 데 중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리뉴얼 후 한 달. 젊은 고객들의 출입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반가운 결과다. 여 대표는 "진주문고를 있게 해 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갚는 것이 생존을 위한 방법이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최고의 생존 방법인 듯하다"고 말했다.

■책, 특별한 물성을 가진 솔메이트

몸과 마음이 모두 바쁜 사람들은 책을 읽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서점의 리뉴얼이 진행되는 지난 5개월 동안 여 대표도 책 한 권 읽지 못했다. "독서는 마음이 고요하고 몸은 피곤하지 않은, 몸과 마음이 모두 조건을 갖춰야 이루어지는 고급 노동행위이기 때문"이다.

여 대표는 "세상에 책만큼 특별한 물성을 가진 물건은 없다"고 했다. 책은 사람 냄새가 스며들기 전부터 자신만의 냄새로 말을 건다. 스마트폰의 대용량 소프트웨어 역시 책에서 나온 지식. 모든 새로운 것의 기반은 책에서 나온다.

"서점 말고 다른 것을 꿈꿀 수도 없고, 꿈꿀 이유도 없는" 책방 주인은 2015년 지역 출판사 '펄북스'를 열어 새로운 실험도 하고 있다. 진주문고 32년, 펄북스 3년은 하루하루가 만만찮은 날들이다. 그러나 책은 좀 어려워졌다고 해서 버릴 수 없는 영원한 소울메이트. 여 대표는 "변화와 혁신을 통해 책이 훨씬 다채롭고 멋진 곳에 놓여 있을 뿐 세상의 근본과 사람의 근본이 바뀌지 않는 한 그 지혜의 보고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주=강승아 선임기자 seu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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