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수도에서 평화수도로] 9. 우암동 소막사(현 우암동 소막마을)
일제수탈·전쟁·산업화의 흔적 간직한 삶의 터전
오늘날 소막마을 모습. 연합뉴스·부산일보DB"비참함은 상상도 못 할 정도지만….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아. 그때도 나름대로 살았어."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이후 14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와 지금껏 우암동을 지키고 있는 귀환 동포 임병열(82) 씨는 6·25 한국전쟁 당시 부산 남구 우암동 소막마을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재차 말했다.
일제, 소 수탈 위해 검역소 설치
1600마리까지 수용 전국 최대
광복 후엔 日 귀환동포 거처
6·25 땐 피란민들 품던 곳
1960~1970년대 산업화 시기엔
목재·방직공장 노동자들 안식처
다닥다닥 붙은 집, 실핏줄 골목길
개발 광풍 비켜간 '살아 있는 역사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소를 반출했던 수탈 창구에서 귀환동포의 임시 거처, 6·25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 수용소를 거치면서 역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은 공간. 젊은이들이 떠나며 쇠퇴했지만, 여전히 삶이 이어지는 터전. 부산근현대사의 여러 지층이 차곡차곡 쌓인 '우암동 소막사'(현 우암동 소막마을)다.
■근현대사의 지층 겹겹이
동아대 연구팀, 기획 시리즈 '소설, 피란수도 부산'에 참여 중인 임성용 소설가와 함께 소막마을을 둘러봤다. 다닥다닥 붙은 집 사이로 실핏줄 같은 골목길이 과거를 고스란히 품은 채 마을 구석구석을 잇고 있었다. 일명 '골목시장'으로 불리는 구시장 맞은 편엔 소막사의 흔적이 담긴 주택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소막사 환풍구 부분은 물론 피란민 수용소 시절 덧댔던 벽면도 시선을 모았다. 지붕 반쪽이 소막사 형태를 띠고 있는가 하면 소막사 내 소 1마리가 머물렀던 좁은 공간을 토대로 집이 만들어졌음을 보여주는, 원형 그대로의 주택도 발견할 수 있었다. 임시수도기념관에서 발행한 <우암동 사람들의 공간과 삶>의 표현대로 '천막집에서 합판집으로 그리고 다시 벽돌로 집을 개보수하면서 예전의 형태가 유지'된 것이다. 김기수 동아대 건축학과 교수는 "과거가 남겨진 소중한 자산이자 근현대사의 발자국"이라고 말했다.
우암동 소막마을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 우암동 일대는 초량왜관에 인계되는 일본 표류민뿐 아니라 대마도를 거쳐 초량왜관으로 이관된 우리나라 표류민이 인계됐던 표민수수소(漂民授受所)였다. 이곳에 부산이출우검역소가 설치된 때는 1909년. 남구청에서 발간한 <부산 우암동 소막사 및 생활문화자원 복원 기록화 보고서>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이후 식용목적으로 조선의 소를 수탈하고자 한 일본은 1909년 부산을 시작으로 인천(1925년), 함경남도 원산(1925년), 함경북도 성진(1925년), 평안남도 진남포(1925년), 경북 포항(1937년) 등 전국 6곳에 검역소를 설치했다. 부산항 끝머리에 해당하는 7부두와 8부두 뒤편에 위치한 부산이출우검역소에는 소막사 19동과 소각장 등 건물 40여 동이 배치되고, 한꺼번에 1400~1600마리를 수용하는 등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인근에는 자연스럽게 우시장이 형성됐으며, 거래액도 서울에 이어 2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피란수도 부산 흔적 고스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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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故) 하 안토니오 몬시뇰이 제공한 1950년대 소막마을 풍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