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연극 자조모임 '뻔데기'] 나비 변신 '뻔데기'처럼… 연기 통해 도약 꿈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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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데기 단원들이 연극 '젤소미나'의 대본을 처음으로 리딩하는 모습. 강승아 선임기자·해운대장애인자립생활센터 제공

세상을 향해 나비처럼 날아오를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모임의 이름은 '뻔데기'. 그들은 번데기가 화려한 나비로 변신하듯 하루하루 착실히 도약할 준비를 한다.

매주 목요일 오후, 그들이 조금씩 도약하는 시간. 비가 온 지난 5일 오후 궂은 날씨에도 '뻔데기' 회원 9명이 연습실에 빠짐없이 모였다. 내년 4월 해운대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여는 연중 최대 행사 '드림 페스티벌'에 선보일 정극 '젤소미나' 대본 첫 리딩을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2014년 창단 '연극 모임'
배우들, 각종 연극제서 수상

내년 4월 선보일 정극 '젤소미나'
회원 9명 대본 리딩 등 연습 열정

"단원들은 장애인 아닌 예술인
전문극단 발돋움 위해 노력"

2014년 창단한 '뻔데기'는 지체장애인, 뇌병변장애인들의 연극 자조모임. 20대부터 50대까지 당당한 실력파 배우들이 포진해 있다. '뻔데기'는 지난 4월 '을숙도시민연극제'에서 연극 '김종욱 찾기' 공연을 했고, 5월 부산국제연극제 10분 연극제에선 '어쩔 수 없이 비극 배우'로 은상을 받았다. 을숙도시민연극제에선 단원 김선영 씨가 최우수 연기상을, 김중혁 씨가 우수 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연극, 내 안의 새로움을 만나는 방법

이날 연극 수업은 단원들이 '젤소미나'란 공연을 처음 만나는 시간. 공연 영상을 함께 본 후, 대본 리딩을 하는 순으로 진행됐다.

'젤소미나'는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1954년 작 영화 '길'을 각색한 작품. 떠돌이 차력사의 곡진한 삶의 여정을 그린다. 무지하고 난폭하지만 마음은 따뜻한 차력사 잠파노, 어수룩하지만 순수한 여인 젤소미나, 젤소미나에게 삶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광대 아또…. 등장인물들이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떠나기도 하는 과정이 애잔한 작품이다.

대본 리딩 시간. 잠파노 역을 맡은 김중혁 씨와 젤소미나 역을 맡은 김선영 씨는 연극 무대에 선 것처럼 감정을 실어 능수능란한 리딩을 선보였다. 누군가 발음이 정확하지 않거나, 리딩을 잘못하면 서로 바로 잡아주기도 하면서 그들은 작품을 조금씩 이해해 나갔다.

창단 멤버인 김중혁(53·지체장애인) 씨는 "아직도 무대에 서는 게 떨리지만, 이런 경험들이 가라앉아 있던 삶에 큰 활력소가 된다"고 했다. 연극 덕분에 자신감과 자존감이 높아졌고, 발성을 많이 해 폐활량이 좋아진 것도 덤이다. 모기만 하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뇌병변장애인들은 언어적 발전도 거듭했다. 일주일이면 대본을 다 외우는 노력파 배우 김 씨는 프로 볼링 선수이기도 하다. 그는 "여러 세대가 함께 어울리면서 느끼고 배우는 것도 많다"고 말했다.

김윤정(44·지체장애인) 씨는 "멋모르고 시작했는데 이제는 TV 드라마를 볼 때도 '내 연기를 어떻게 발전시킬까'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 연극해 본 경험이 있어 지난해 '뻔데기'에 가입한 김평준(22·뇌병변장애인) 씨는 '뻔데기'의 가장 젊은 피. "대본 리딩을 하고, 동작도 맞춰보고 하는 게 재미있다"고 했다.

지난 5월 부산국제연극제 10분 연극제에서 선보인 '어쩔 수 없이 비극 배우' 공연 장면.
부산국제연극제 10분 연극제에서 김선영 씨와 2인극 '어쩔 수 없이 비극 배우'를 공연했던 윤미란(33·지체장애인) 씨는 "맡은 역할에 따라 내 안에 있던 새로움을 발견하기도 하는 경이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년 4월 '젤소미나'가 기대되는 이유

수업 총평 시간. 강사 이승아 씨는 "잠파노가 너무 선해 보인다. 유혹하는 배역인 마리아는 좀 더 섹시하게 연기하라"고 주문했다. 다음 시간엔 느낌을 실어 한 번 더 리딩 연습을 할 예정이다. 배역이 확정된 게 아니어서 더욱 적합한 배역을 찾으려는 시도다.

이 강사는 "단원들에게 지금껏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똑같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비장애인 극단 못지않은 작품을 선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단원들은 장애인이 아니라 예술인"이라며 "지금은 동아리 형태의 자조모임이지만, 장애인 전문 예술단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취미보다는 하드한 트레이닝을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맡은 배역에 생기를 불어넣을 9개월. 내년 4월 무대에서 만날 '젤소미나'은 어떤 감동을 담아낼까. 어쩌면 지금 우리의 삶일 수도 있는 츤데레 '잠파노의 사랑'이 기대되는 이유다.

강승아 선임기자 seu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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