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男걷는女] 도심 속 산골마을,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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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동 아파트 숲속 산골마을 '물만골'
무허가 건물 탓 수십 년간 철거 불안
마을 주민 뜻 모아 10년 동안 땅 구입
'공부방'엔 아직도 아이들 웃음꽃이…

걸어야 보이고, 걸어야 느껴집니다. 부산을 제대로 보기 위해 운동화 끈을 동여맵니다.

진 땅이든 마른 땅이든, 까꼬막이든 계단이든, 어디든 가겠습니다. 걸어서 부산 속으로. 저는 ‘걷는 여자’입니다.


<아파트 숲 속 산골 마을> -체험기-

2년 전까지만 해도 ‘뚜벅이’. 차를 산 뒤론 10분 거리도 잘 걷지 않는다. 하지만 더 넓게, 더 깊게 보기 위해 또다시 걷는다. ‘본캐’는 기자. 2주에 한 번씩 ‘부캐’ 뚜벅율(이하 ‘율’)이 되기로 했다.

세 번째 촬영을 앞두고 장소를 물색하던 중, 새로운 ‘뷰’를 보여주자는 의견이 나왔다. 첫 장소였던 중구 동광동, 동구 좌천동 모두 ‘북항 뷰’를 담았다.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시티 뷰’를 볼만한 장소가 없겠냐는 제작진의 말에 율의 머릿속을 스친 건 황령산이다. 황령산을 떠올리니 몇 달 전 봉수대에 오르기 전 지나쳤던 '물만골 마을'이 생각났다. 자동차로 스쳐 지나가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빼곡한 아파트 단지 사이를 가로질러 산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보이는 작은 마을.

출발은 연제구 연산동의 ‘연이 공원’에서 시작됐다. 이 공원은 P건설사, L건설사, K건설사의 아파트로 둘러싸인, 그야말로 ‘아파트 숲속’ 작은 공원이다. 지난 두 번의 촬영에 비하면 출발은 매우 순탄했다. 율은 며칠 새 부쩍 따뜻해진 햇볕을 즐기며 가볍게 발걸음을 뗐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자, 풍경은 180도 바뀌었다. 제대로 된 산길의 등장이다. '1번 마을버스' 속 승객들이 걸어올라오는 율을 의아하게, 혹은 안쓰럽게 쳐다보는 듯하다.

지난 두 번의 '계단 걷기'를 통해 경사길에 단련된 율은 한층 여유를 부린다.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도, 간간이 주변을 둘러본다. 물만골 마을로 오르는 길옆 수로에는 산에서부터 물줄기가 졸졸 내려온다. 따뜻한 날씨 때문인지 산수유, 매화도 이른 꽃망울을 터뜨렸다. 걸어 올라가는 동안 양방향으로는 차들이 꾸준하게 지나갔다.

연산동 아파트 숲 사이로 들어서니 물만골 마을까지 오르는 경사로가 나타났다. 황령산 봉수대로 가는 길목이라서인지, 쉴 새 없이 차들이 오갔다. 이재화PD 연산동 아파트 숲 사이로 들어서니 물만골 마을까지 오르는 경사로가 나타났다. 황령산 봉수대로 가는 길목이라서인지, 쉴 새 없이 차들이 오갔다. 이재화PD

한 15분쯤 지났을까. 율의 왼쪽부터 하늘색 지붕의 집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 율의 키보다 살짝 높은 정도의 낮은 집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차 두 대가 충분히 지날 정도의 도로는 마을로 들어서자 급격히 좁아졌다. 좁은 구간에서 맞닥뜨린 차 한 대가 비상 깜빡이를 켜면서,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길은 다시 넓어졌다. 도롯가 주차공간 옆으로 오래된 놀이터가 눈에 들어온다. PD는 조금만 더 가면 미션 장소인 마을회관이 있다며 율을 격려한다.

'악덕' 제작진의 고난도 미션. 율은 홀로 황령산 전망쉼터까지 걸어서 올라가는 벌칙에 당첨됐다. 마을회관까지 걸어온 길보다 체감상 10배는 더 힘든 극강의 경사가 율을 기다린다. 차를 타고 지날 때는 아주 작은 동네라 생각했다. 물만골 마을은 생각보다 컸고, 황령산까지 오르는 길은 상상 이상으로 험난했다.


<공기 좋고, 물 좋고, 인심도 좋은> -취재기-

■ 가난하지만, 누구보다 강한

마을회관에서 산길을 따라 100m 정도 올라가면, ‘물만골 공부방’이란 이정표와 함께 샛길이 이어진다. 굽이굽이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공부방을 찾을 수 있다. 율이 찾는 곳은 공부방에서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 목적지에 다다르자 전화를 건다.

율의 가슴팍까지 오는 분홍빛깔의 낮은 대문. 그 너머로 희끗희끗한 머리칼의 어르신이 한 손엔 휴대폰을 쥐고, 다른 손으론 미닫이문을 열고 나온다. 이 동네에서 2년째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김작치 회장이다.

회장님은 제 가슴 높이밖에 오지 않는 문도 못 여는 율을 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손수 대문을 열어주곤, 율을 집 안으로 안내한다. 안방 TV에선 트로트 가락이 흘러나온다. TV를 보던 사모님이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사모님은 따뜻한 안방에서 이야기기 나누라며 손짓했지만, 율은 괜찮다며 마루에 자리를 잡았다. 봄의 기운만큼 따뜻해진 햇볕이 마루에 내려앉아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사뭇 어색한 공기 속에서 인사가 오갔다. 언제나처럼, 율은 이 동네가 궁금하다며 운을 뗐다. 회장님의 고향은 부산 영도. 한국해양대 전수과를 나와 30년 동안 배를 타고 세계 각국을 오갔더랬다. 1978년 영도에서 나와 범어사 인근에 집을 구해놓고 양산에서 농장을 운영하다 고배를 마셨다. 사업 실패 이후 동래구 온천동에 셋방을 얻어 지내던 중, 배를 탈 때 알던 후배가 끈질기게 설득해 물만골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배가 3년 동안 나를 찾아다녔다더라고요. 온천시장에서 우리 집사람을 우연히 만나가지고는, 어머니 모시고 셋방살이하지 말고 물만골로 오라고 했대요.” 회장님의 어머니는 만류했다. 요즘 세상천지에 무허가로 집을 짓고 살 수 있냐며. 하지만 그런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결국 이 동네로 오게 됐다. 그때가 1984년쯤이었다.

'율'을 반기는 물만골 노인회 김작치 회장님. 마당에 심은 자목련의 꽃봉오리가 움트고 있다. 서유리 기자 '율'을 반기는 물만골 노인회 김작치 회장님. 마당에 심은 자목련의 꽃봉오리가 움트고 있다. 서유리 기자

회장님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사는 동네’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더랬다. ‘물이 많은 골짜기’라는 이름처럼, 산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과 흙이 뒤섞였다. 집에 도착하면 신발은 온통 진흙 범벅이 됐다. 당시만 해도 몇몇 집에만 전기가 들어왔다. 한 집에 들어오는 전기를 두세 집이 당겨썼다. 물만골 마을은 부산에서 상수도가 가장 늦게 깔린 곳이기도 하다.

물만골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건 1953년쯤. 한국전쟁 휴전 이후 피난민들이 살 곳을 찾아 한두 사람씩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1964년 동구 초량동 매축지 철거민들이 이주해오면서 마을의 인구가 늘어났다. 그 이후로도 ‘못사는 사람들이 살기 편한 곳’이라고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회장님이 통장을 할 때인 1990년대만 해도, 500가구에 투표 인원만 1200명이 넘었다.

“가난하게 살아도 참 살기 좋은 마을이었어요. 공기 좋고, 물 좋고, 인심도 좋고요.” 하지만 주민들은 늘 철거의 불안에 시달렸다. 개발제한구역에 지은 무허가 집들이었기 때문이다. 1990년 당시 관할이던 동래구청이 무허가 건축물 철거를 강행하려하자, 주민들은 똘똘 뭉쳐 맞섰다. 물만골에서 쫓겨나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이들이었다. 주민들의 조직된 힘 앞에 구청도 결국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형편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황령산을 지키는 데도 앞장섰다. 1997년 황령산에 온천을 짓는다는 계획이 나오자, 마을 주민들은 환경단체와 연대해 ‘황령산 살리기 운동’을 벌였다. 마을 사람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황령산 올라가는 길 자락에 벚꽃나무도 심었다.

주민들은 더 나아가 마을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가구별로 10만 원 씩 모아 조금씩 땅을 매입했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을 공동체가 뜻을 모은 것. 결국 10년 동안 마을의 모든 땅을 사들였다. 주민들은 스스로 찬조금을 내 마을회관도 손수 세웠다. 어려운 사람들끼리 모인 만큼, 서로 맞잡은 손을 절대 놓지 않았다.

주민들이 찬조금을 마련해 지은 물만골 마을회관. 지금의 마을회관 모습은 2015년 'HOPE프로젝트' 사업에 선정돼 리모델링된 모습이다. 서유리 기자 주민들이 찬조금을 마련해 지은 물만골 마을회관. 지금의 마을회관 모습은 2015년 'HOPE프로젝트' 사업에 선정돼 리모델링된 모습이다. 서유리 기자

하지만 아직 풀어야 할 숙제도 남았다. 땅은 사들였지만, 건물엔 여전히 '무허가 건축물' 꼬리표가 붙었다. 이 때문에 경로당은 별다른 지원을 못 받고 있다. "우리는 무허가라는 이유로 10원 한 푼도 지원을 못 받아요. 그러니 노인들이 돈 아낀다고 여름엔 에어컨을 안 틀고, 추워도 보일러도 안 틀죠. 이제 마을엔 노인들이 대부분인데, 회장으로서 보기가 너무 안쓰러워요." 회장님의 말에 아쉬움이 가득 묻어났다.


■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회장님을 만난 뒤, 율은 아까 스쳐 지났던 ‘물만골 공부방’을 기웃거린다. 공부방 밖에는 아홉 켤레의 운동화가 나와 있다. 안에서는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웬 낯선 여자가 기웃거리자, 수녀복을 입은 분이 나와 묻는다. "어떤 일로 오셨어요?"

율은 '걷는 여자' 취지를 설명하고, 인터뷰가 가능할지 물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수녀님은 온화한 미소와 함께 공부방 안으로 안내했다.

물만골 공부방 앞에 아이들의 신발 아홉 켤레가 놓인 모습. 유리문 너머로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온다. 서유리 기자 물만골 공부방 앞에 아이들의 신발 아홉 켤레가 놓인 모습. 유리문 너머로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온다. 서유리 기자

물만골 공부방 시설장을 맡고 있는 김현선 아가다 수녀님이 환한 눈빛으로 율을 맞이한다. 수녀복 위에 유니폼 같은 앞치마를 두르고, 겉옷을 걸쳤다. 혹여나 방해가 된 게 아닐까 싶어 율이 미안한 기색을 보이자, 지금은 괜찮다며 흔쾌히 시간을 허락한다.

물만골 공부방은 1994년 생겼다. 빈민 사목 활동을 하던 한 신부님이 물만골 마을에 올라와 공부방 문을 열었다. 학교를 마친 학생들은 집으로 가기 전 공부방에 들러 공부도 하고, 친구들과 시간도 보냈다. 당시 수녀님들은 공부방 바로 옆 숙소에서 지내며 '무지개 놀이방'을 운영했다.

그때만 해도 마을에 젊은이들이 많았더랬다. 하지만 10년 새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신부님도 떠나야 할 때가 되어, 수녀회에 공부방 운영을 부탁했다. 2007년 공부방을 인수한 수녀회는 공부방과 놀이방을 함께 운영해오다, 놀이방 아이들이 점점 줄자 공부방만 운영하게 됐다.

"예전엔 40~50명 정도였죠. 그중에 80% 이상이 이 동네 아이들이었어요. 지금은 16명이 다니는데, 동네 애들은 40%정도예요. 이 동네에 살다가 이사간 아이들도 있고, 아예 아랫동네에서 소개받아서 오는 경우도 있고요." 공부방 아이들은 초등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연령대가 다양하다.

김 수녀님은 2005년 물만골 마을과 연을 맺었다. 2년 정도 있다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는데, 10년 뒤 다시 오게 됐다. 10년만에 만난 마을은 몰라보게 바뀌어 있었다. "처음 마을에 왔을 때만 해도 차 있는 집이 거의 없었거든요. 근데 다시 왔더니 차가 너무 많아졌더라고요. 또 예전엔 대부분 푸세식(재래식) 화장실이었는데, 동네도 많이 깨끗해졌고요. 그런데 사람은 훨씬 줄어들었어요. 애들도 그렇고요." 수녀님들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마을 어르신들을 위한 공부방도 운영 중이다. 일주일에 두 번씩 한글 교실, 토요일엔 트로트 교실도 연다.

수녀님의 꿈은 공부방 아이들이 자라서 다시 공부방 아이들을 돌보는 것. 그 꿈은 올해 초 이뤄졌다. 올해 대학에 입학하는 남학생이 공부방에 와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갔다. 이 학생은 수능이 끝난 뒤 알바를 해서 번 돈으로 공부방 아이들에게 용돈도 쥐어줬다. 용돈을 주기 위해 알바를 한 거라며. 얼마 전 25주년 행사 때도 졸업생들이 찾아왔다. 애틋하고 대견한 마음에 김 수녀님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와 인연을 맺은 아이만 100여 명이 넘어간다.

사진을 찍는다는 율의 말에 물만골 공부방을 이끌어가고 있는 두 수녀님이 다정하게 포즈를 취했다. 오른쪽 수녀님이 시설장을 맡고 있는 김 아가다 수녀님이다. 서유리 기자 사진을 찍는다는 율의 말에 물만골 공부방을 이끌어가고 있는 두 수녀님이 다정하게 포즈를 취했다. 오른쪽 수녀님이 시설장을 맡고 있는 김 아가다 수녀님이다. 서유리 기자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는 선교 목적도 아니고,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해서예요. 아이들의 외로움을 돌보고, 상처받은 부모님들의 마음도 치유하기 위해서죠. 아이들 수는 점점 줄고 있지만, 아직도 외롭고 마음이 힘든 사람들이 많잖아요. 공부방을 계속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앞으로도 계속 공부방을 운영할지에 대한 수녀님의 답변이다.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율은 수녀님과 인사를 나눴다. 어느덧 마을엔 땅거미가 졌다. 마을에서 내려가는 길, 전날 촬영 장소를 지나다 율은 한 주민의 말을 떠올린다. "우리 마을은 벚꽃 필 때 오면 더 좋아. 그때 또 와."

아직 코끝에 닿은 공기가 차다. 율은 저녁 공기마저 따뜻해지는 4월이 오면, 다시 와야겠다고 다짐하며 걸음을 뗀다.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촬영·편집=이재화·정수원·김보경 PD, 진유민 작가

그래픽=장은미 기자 mimi@busan.com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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