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라-리] 일본인 대피용 동굴, 6·25 땐 피란민 거주하다 '동굴 식당'으로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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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부산일보> 독자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날라'주는 '이' 기자입니다.

갈고 닦은 취재 기술로 도심 속 미스터리를 파헤칩니다. 문득 '저건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주저 말고 제보해주십시오. 동네 어르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작은 제보가 거대한 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산 동구 도심 길가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일제강점기 동굴'이 있다는 제보입니다.

지금껏 가본 곳들과 다르게 내부가 밝고 외부 방문객 발길도 꽤 있다고. 가덕도 절벽 동굴, 오륙도 지하벙커 등 '은밀한 군사시설'이 아닌 도심을 가로지른 '오픈된 공간'이라고 합니다. 어떤 곳인지 직접 가봤습니다.

<부산일보>에서 직선거리 1.4km. 수정터널 아래 도로를 건너자 왼쪽 언덕벽에 '좌천동굴' 글씨가 크게 보입니다.

골목길을 따라 50m 정도 언덕을 오르자 양쪽에 나 있는 입구 포착.

점심시간 때 몇 번 오갔던 것 같은데, 여태껏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이날 동행한 PD 등은 이미 한 번씩 다녀온 곳이었습니다.


성인 2~3명이 들어갈 정도로 입구는 넓습니다. 내부는 크게 3구간입니다.

첫 번째 구간에는 작은 신발장 같은 사물함이 있습니다. 예전 부산 동구 전통 막걸리를 보관했던 '저장고'라고 합니다.

10~20m 짧은 1구간을 지나 2구간은 분위기가 딴 판입니다. 마치 '수족관'처럼 파란색 불빛의 조명이 뒤덮었습니다. 바닥에는 흰색 '무드등'이 선명하게 뻗었고, 천장에는 별 모양의 장식물이 여기저기 붙었습니다.

2구간은 '자개 전시관'입니다. 지금도 가구거리로 유명한 좌천동은 예전부터 '자개(금조개 껍데기를 썰어 낸 장식용 조각) 동네'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굴 안에는 자개로 만든 도자기가 전시됐고, 학·소나무 등 무늬의 조형물이 벽 곳곳을 장식했습니다. 자세히 보면 금속처럼 반짝이는 인공 바위도 숨어있습니다.

3구간은 다시 어둡고 스산한 동굴입니다. '지하벙커' '지하감옥'처럼 붕괴를 막는 철조망이 천장을 덮었고, 부수고 때렸던 거친 돌들이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습니다. 바위 색도 더 어두웠고, 벽과 천장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좌천동굴 코스는 100~200m로 길지 않았습니다. 막걸리 저장고는 비었고, 자개 장식물은 부분적으로 훼손되는 등 추가 정비는 필요해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여태껏 10차례 가까이 동굴을 가봤지만, 이처럼 관광지로 단장된 곳은 처음입니다.

과거 주막으로 쓰이던 좌천동굴 모습. 과거 주막으로 쓰이던 좌천동굴 모습.

좌천동굴은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1941~1945년) 때 뚫린 '방공호'로 추정됩니다. 미군 공습과 상륙에 대비한 '대피용 동굴'로 한국인을 강제 동원해 만든 인공굴입니다. 특히 좌천동은 일본 군사 물자를 수송하던 부산진역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공습의 위험이 컸습니다. 인근 증산 자락에 일본군 방공포진지가 있다는 옛 기록도 있습니다.

과거 주막으로 쓰이던 좌천동굴 모습. 과거 주막으로 쓰이던 좌천동굴 모습.

좌천동굴은 이후 6·25 전쟁 때 '피난민 임시거처'가 됩니다. 근처 동광동에서 발견된 땅굴(busan.com 2월 25일 자 '[날라-리] 부산 동광동 100평 '거대 땅굴'이 목격됐다'편 참고)과 용도와 역사가 비슷합니다.

이후 '배고픈 시기'에는 '구 동굴집'이라는 상호의 주막으로 쓰였습니다. 파전, 아귀찜, 국수 등을 팔았다고. 그리고 민방위교육장으로 활용하다가 2009년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으로 '관광지'로 탈바꿈했습니다. 입구를 더 크게 뚫고, 정식 간판을 달고, 안전시설을 확충했습니다.

좌천동 주민이자 동굴 안내원인 박정자(78) 씨 기억도 생생합니다.

"시집온 지가 60년인데 그때도 굴이 있었습니다. 앞에 동그랗게 문만 있고, 들어가면 박쥐 날아다니고…. 여기뿐 아니라 저 건너편 아파트, 수정산 터널 옆에도 굴이 뚫렸었고 다 연결돼 있었습니다. 아파트 짓고 하다 보니 망가지고 이것만 살아 있는 거죠."

취재팀은 수소문 끝에 옛 좌천동굴처럼 현재 식당으로 사용 중인 다른 동굴을 포착했습니다. 좌천동굴에서 불과 1km 떨어진 범일동 한 골목길에 뚫려 있는 ‘동굴 식당’입니다.

현장은 독특했습니다. 좌천동굴보다 내부가 족히 2배는 넓었고, 포장마차에서 보던 테이블과 의자가 깔렸습니다. 오른쪽에는 바위에서 나온 물들이 고였습니다. 동굴 안은 '무풍 에어컨'을 켠 것처럼 바람도 없이 서늘했습니다. 식당 공간이 지난 뒤에도 동굴은 계속 뚫려 있습니다. 천장에서는 쉴새 없이 물이 떨어졌고, 내부는 깊이 들어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형태입니다.

이곳은 50년 전 처음 발견됐습니다. 식당 사장인 김진영(51) 씨의 할아버지께서 이 부지를 사들여 집을 짓던 중, 동굴을 처음 발견한 겁니다.

그리고 당시 작은 동굴이었던 것을 확장해 식당으로 썼다고 합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니 인기를 끌었다고.

“할아버지, 삼촌, 그리고 저까지 3대째 가게를 운영 중입니다. 도심에 동굴이 있다는 거에 손님 대부분이 신기해하시더라고요.”

지금은 밝은 분위기의 '이색 동굴'이지만, 두 동굴 모두 '아픈 역사'의 흔적입니다. 범일동 동굴 식당도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민간인 대피용 방공호로 추정됩니다. 이때의 '민간인'은 ‘한국인’이 아닌 대부분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 일본인 대피를 위해 한국인이 뚫은 동굴인 겁니다.

더불어 이곳들은 6·25 피난 등 부산 원도심 역사의 발자취를 간직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다행히도 이전에 갔던 동굴들과 달리 방치된 모습은 없었습니다. 완전히 정비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역사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고 새단장이 계획되는 등 ‘부분 보전’이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은 "부산은 근대 개항부터 일제강점기 말까지 일본의 대륙침략과 본토 수호를 위한 거점으로 개발한 곳"이라면서 "일종의 '다크투어리즘' 형태의 관광지로 개발하는 방안을 광범위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좌천동굴은 다시 새단장을 준비 중입니다.

동구청 전석중 관광개발계장은 "동굴 내부 습기로 인해 특별 제작한 자개 전시관 등이 계속 부식되고 있어 해결할 방안을 찾는 중"이라면서 "동구 전통주인 '우리술 이바구' 홍보관을 계획하는 등 좌천동굴과 지역 문화를 알리는 일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취재를 끝내고 돌아가려던 찰나, 동굴 앞에서 한 어르신이 마지막 말을 건넸습니다.

“옛날 기계가 없었으니 함마로 때려서 (바위를) 깼을 거고, 결따라 잘못 쳐 무너지거나 파편이 튀었으면 (한국인 인부들이) 얼마나 다쳤겠습니까…. 6·25 동란도, 나라 없는 설움도 겪어보지 못하면 모를 겁니다. 절대 나라의 아픔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승훈·남형욱 기자 lee88@busan.com

제작=정수원 PD / 정연욱·홍성진 대학생인턴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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