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선거구 획정위 이대로 둘 건가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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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6월 1일 치러지는 지방선거를 위해 ‘부산시 자치구·군의원 선거구 획정위원회’(이하 획정위)가 꾸려진 게 2021년 10월 1일이다. 위원은 모두 11명. 부산시의회, 학계, 법조계, 시민단체, 선관위, 언론계 인사로 꾸려졌다. 이들은 2022년 4월 20일 최종 회의까지 모두 6차례 회의를 가졌다. 틈틈이 별도의 의견청취 절차도 거쳤다. 그런 산고 끝에 나온 게 ‘부산시 기초의원 선거구 조정안’이었다.

획정위는 2인 선거구를 기존 44곳에서 18곳으로 줄이는 대신, 3인 선거구를 23곳에서 27곳으로 늘리고, 한 곳도 없는 4인 선거구를 10곳 신설하자고 주문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장악한 기초의회에 군소 정당도 진입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혀 다양한 민의가 반영되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진일보한 선거구 조정안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군소 정당들의 기대도 컸다. 그런데 애써 조정안을 짜면서도 획정위원들은 “이렇게 해 봤자 어차피 시의회에서 마음대로 할 건데…”라는 자조 섞인 전망을 보인 터였다.


‘4인 선거구 10곳 신설’ 담은

부산 기초의원 선거구 획정안

시의회가 1곳만 남기고 없애


사실상 들러리 역할에 머물러

구속력 있는 결정권 갖도록

시급히 제도적 장치 마련해야


전망은 현실이 됐다. 획정위 조정안은 묵살됐다. 시의회는 지난달 27일 기초의회 선거구 획정 조례안을 의결했다. 획정위가 10곳으로 제안한 4인 선거구를 1곳만 남겨 두고 나머지 9곳은 2인 선거구로 쪼갰다. 27곳으로 제안된 3인 선거구는 25곳으로 줄였다. 대신 18곳으로 제안된 2인 선거구는 39곳으로 크게 늘렸다. 군소 정당들과 시민단체들은 “시의회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폭거를 자행했다”고 비난했다.

이런 일은 반복되고 있다. 2018년 지방선거 때도 당시 획정위는 2인 선거구는 기존 50개에서 30개로, 3인 선거구는 18개에서 23개로, 4인 선거구는 7개로 조정했다. 하지만 시의회의 결론은 ‘2인 선거구 44개, 3인 선거구 23개, 4인 선거구 0개’였다. 획정위는 유명무실했던 것이다. 이는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2005년 8월 4일 개정된 공직선거법은 기초의원 선거 방식을 1명만 뽑던 소선거구제에서 2~4명을 뽑는 중대선거구제로 바꿨다. 이를 계기로 2006년 지방선거 때부터는 기초의원 선거구 획정위도 각 시도에 설치토록 했다. 소선거구제는 아무래도 기성 정치인이나 기득권을 가진 세력에게 유리한 법이다. 중대선거구제로 바꾼 것은 군소 정당이나 정치 신인을 지지한 유권자들의 선택이 사표화 되는 것을 방지해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해나 요구를 지방 정치에 적용하자는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취지는 크게 왜곡돼 왔다. 시도 획정위가 아무리 중대선거구제 취지를 살리기 위한 선거구 조정안을 내놓아도 시도의회는 이를 무시하고 맘대로 선거구를 결정했다. 특히 4인 선거구는 아예 빼버리거나 2인 선거구로 쪼개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 결과 중대선거구제가 도입됐음에도 불구하고 거대 양당이 의석을 독식하는 결과가 발생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공직선거법의 허점에 있다. 현행 선거구 획정 시스템은 시도 획정위가 조정안을 마련해 제출하면, 시장·도지사는 이를 시도의회에 제출하고, 시도의회는 심의 후 조례로 의결한다. 그런데 법에 따르면 획정위의 조정안은 최종안이 아니라 단지 권고안일 뿐이다. 시도의회는 획정위의 결정 사항을 ‘존중’만 하면 된다. 조례로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수정 가능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당 간 담합의 여지도 상존한다. 또 하나의 허점은 ‘하나의 선거구에서 4인 이상을 선출할 때는 2개 이상의 선거구로 분할할 수 있다’는 규정이다. 4인 선거구를 2인 선거구로 쪼개는 편법이 그래서 가능해졌다.

선거구 획정의 결정권은 오롯이 시도의회가 갖고 있다. 어렵게 획정위를 꾸려 오랜 기간 격렬한 토론과 논의 끝에 선거구 조정안을 마련해도 시도의회가 거부하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이다. 획정위는 말 그대로 들러리일 뿐이다. 이 무슨 낭비인가.

더 큰 문제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이 돼야 할 기초의회를 거대 양당이 장악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이는 민의를 왜곡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히 우려할 일이다.

민주주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사소한 선거구 조정만으로도 민주주의의 진전을 가져올 수 있다. 선거구 획정 결정권을 이해충돌의 소지가 다분한 정치인에게만 맡겨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대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획정위의 권한이 강화돼야 한다. 획정위의 결정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채택되도록 해야 한다. 선거 때마다 급조하는 일시적인 기구가 아니라 일관성과 전문성을 갖춘 상설위원회로 기능할 필요도 있다. 획정위가 자문 그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제라도 바꿔야 한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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